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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gan Jan 29. 2023

엄마의 삶

시작

언니가 미국으로 떠났다.

동시에 엄마의 삶의 일부분도 잘려나간 것 같았다.  


엄마는 나에게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고, 결국 당분간 서로 얼굴을 보지 말자고 했다. 엄마는 나에게 "너를 용서할 수 있을 때 보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엄마가 습관처럼 기분대로 내뱉는 말에 정확한 이유를 찾고 싶어 혼자 머리를 굴려봤지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 역시 집을 나왔다. 엄마는 집을 나오는 나에게 열쇠는 꼭 두고 나가라고 했다.  


언니가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까지 우리 둘은 성북동의 작은 집에서 같이 살았고, 엄마는 언니의 갑작스러운 결정에는 내 책임이 있다고 믿는 것처럼 행동했다.  


엄마는 그렇게 내게 모진 말을 던져놓고는 당장 온 신경을 쏟을 만한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섰다. 그게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알 수 없지만, 엄마의 희생과 노력을 담보로 존재를 인정받을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언니가 떠났기 때문에 엄마는 새로운 대상이 요구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아빠에게서 큰 이모의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아빠도 엄마와 이모를 따라 이곳저곳 병원을 쫓아다니느라 주말에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한다고 했다. 늘 집안이 어수선했다고 했다.


나는 엄마는 병원이라는 공간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 결혼하기 전까지, 간호조무사로 20대의 절반을 보냈다. 그리고 언니와 나를 키우는 동안에는 가끔 수원 남대문 시장에 가서 링거약을 몇 개씩 사 와서 동네 어르신들이나 가족들에게 수액을 놔주며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때는 의학분업 전이라 그게 가능했다.


그리고 5년 전, 아빠가 교통사고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가까스로 살아났을 때도 엄마는 온전히 병간호를 도맡아 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에 나는 아빠를 보러 병원에 갈 때마다 엄마의 얼굴도 살폈는데 그때마다 얼굴에 언뜻 비치는 성취감의 조각을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엄마가 가진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자 엄마가 좋아하는 희생이라는 가치와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엄마는 그 공간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엄마는 수원에서 태어나 줄곧 그곳에서 살다가, 성인이 되어 직업을 가져야 할 때가 되자 상경했다. 누군가가 엄마에게 간호조무사 공부를 해볼 것을 추천했고 엄마는 자격증 시험에 지원하기 위해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마침 그때 엄마의 언니는 이미 서울에서 미싱 일을 하면서 가족을 꾸려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던 엄마는 자연스럽게 언니 집에서 얹혀살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큰 이모의 좁은 집에서는 네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엄마까지 숟가락을 더했으니 부지런한 엄마는 미안한 마음에 어린 두 조카의 보모 역할을 자처했다. 엄마는 좁은 방에서 두 다리를 뻗고 편하게 잠을 잔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큰 이모는 엄마보다 10살이나 나이가 많았고,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고자 일찍부터 서울에서 미싱일을 했다. 그래도 생활이 쉽지 않아서 나중에는 신용카드 돌려 막기까지 했었다.


엄마는 학원을 다니면서 같은 반 친구들을 사귀었고 어쩌다 친구가 쉬는 시간에 커피 한잔을 사준다고 부르면 그때나마 겨우 자유시간을 가졌다. 수업이 끝나고 버스비가 없는 날에는 엄마는 수원역에서부터 2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엄마는 그때도 강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합격한 간호조무사 자격증이 형제 중에서 첫 전문직 종사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고, 엄마는 자부심을 가지고 일했다. 엄마는 간호조무사 실습을 나갔을 때부터 환자들에게 링거를 놔줄 때 피멍이 하나 없이 깔끔하게 일했다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어렸을 때부터 칭찬받을 일을 하지 않으면 관심을 거의 받지 못했을 엄마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또 '잘하려고' 했을 것을 떠올려본다.


그리고 나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늘 먼 거리를 걸어 다니느라 날씬했을 젊은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 엄마는 영화 속 싱그러운 젊은 여자로 내 머릿속을 사뿐히 걸어 다녔다.  


그런 엄마의 이야기가 단순히 그 시절 대다수의 여자들이 흔히 겪는 무용담으로 치부가 되고 상상 속의 젊은 엄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엄마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정말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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