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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gan Jun 25. 2018

영화 <버닝>
머릿 속에 맴도는 기억같은 영화

*읽을 수록 예상하지 못한 스포가 곳곳에..*

어딘가 불편하고 답답한 전개, 이토록 현실적인 대사를 던지는 인물들, 그리고 경계가 모호한 결말.

나는 이 모든 것이 공존하는 영화를 일찍이 본 기억이 없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이창동 감독이 영화 <버닝>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이 시대 젊은사람들의 분노와 불온한 자화상에 내가 철저히 합체된 듯한 느낌을 받아서 인지도 모른다. 


늘어뜨린 어깨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못하고 끊임없이 삼키는 듯 약간 벌린 입을 한 종수, 온몸으로 삶의 찰나에 욕망을 드러내는 혜미,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소와 수수께끼같은 말을 던지는 벤. 그들 각자의 애매하고 은유적인 것은 내가 어디선가 이미 그들을 마주치거나 알고 지낸 듯 하다. 


영화는 어깨의 무거운 짐을 얹고 익숙한 종로거리 어딘가를 걷는 종수의 뒷모습을 따라가면서 시작한다. 곧 날씬하고 예쁘장한 얼굴을 하고 가게 앞에서 손님몰이 춤을 추는 혜미가 종수에게 알은 체를 한다. 둘은 고향 파주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던 동네친구였고, 그렇게 우연히 만나 담배를 태우고 술을 마신다. 


혜미는 앞에 앉은 종수가 물어보는 말에 대답하기보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프리카로 떠날 것이라던지 팬터마임을 선보인다. 종수는 연신 느긋이 대답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듣는 듯 마는 둥 귀기울인다. 아프리카로 떠나있는 동안, 자신의 고양이에게 먹이주기를 부탁한다는 이유로 혜미는 종수를 그녀의 집으로 부른다. 둘은 금세 옷을 벗고 각자의 몸 가장 깊은 곳으로 서로를 집어넣는다. 그 와중에 종수는 그 앞에 보이는 벽에 가만히 날름 들어온 햇살을 응시할 뿐이다. 


고양이 밥을 주기 위해 혜미의 방을 찾은 종수는 그곳에서 연신 수음을 한다. 혜미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덜컹거리는 흰색 트럭을 몰고 공항으로 가자, 그녀는 뜻밖에도 머리를 잘 쓸어올린 남자, 벤과 함께 있다. 그들은 함께 술을 마시고 혜미는 벤의 포르쉐를 타기로 한다. 종수는 혜미의 선택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종수는 혜미가 만나자는 연락을 할때마다, 그 자리에 벤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또한 갑작스레 그의 앞마당에 들이닥친 그녀와 벤을 감당해야 한다. 혜미는 종수의 마당에서 벤이 준 대마초를 피고서는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착란의 순간을 맞이하여 새처럼 춤을 춘다. 


벤은 종수에게 비닐하우스 이야기를 꺼낸다. 세상에는 쓸모없는 비닐하우스가 너무 많고, 그것들은 내가 태워주기만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들일 뿐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에게는 연실 거슬리는 말투에 베어나오는 자만심이 있다. 벤은 마치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된 것 마냥 모든 것을 꽤뚫어보고 있는 듯 말한다. 


종수는 이날 이후로 벤이 태운다는 비닐하우스를 찾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동네를 뛰어다닌다. 그가 절박하고도 어리석게 비닐하우스를 찾아다니는 동안, 벤은 조수가 좋아한다는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종수가 벤을 일방적이고 쉽게 비난하거나 증오할 수 없는 이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차 비닐하우스의 결말을 쫓던 종수의 집착은 벤에 대한 미행으로 이어진다.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이유는 언제나처럼 벤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수의 미행을 알아챈 벤은 그를 다시 한번 그의 집안으로 초대하고 종수는 혜미가 없이 혼자 그의 집과 화장실을 둘러본다. 화장실에서 혜미의 핑크색 손목시계를 발견하고, 그동안 본 적없던 고양이가 '보일'(혜미의 고양이 이름)이라고 부르자 종수에게 달려와 안긴다. 마치 혜미의 자리를 대체한 듯 보이는 젊은 여자와 그날 저녁 벤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는 종수에게 벤의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일종의 실마리를 주고, 앞으로의 종수가 할 행동에 혼자만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어느 순간 집합된 종수의 분노의 감정은 그의 집에 있던 아버지의 '칼'이라는 도구와 함께 분출된다. 종수의 손에 들린 칼은 여러차례 벤을 찌른다. 시종일관 답답한 모습을 하던 종수의 감정이 승화되어 폭발한 순간, 그는 아이처럼 맨 몸을 하고 벌벌 떤다. 


나는 종수를 알고 있다. 종수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다. 아버지의 폭력에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또다른 폭행사건으로 아버지는 감옥에 간다. 그가 하는 일은 파주 집에서 살면서 송아지 똥을 치우고 밥을 주는 것이고, 시끄럽게 흔들리고 시커멓고 때가 탄 트럭을 몰고 무거운 짐짝들을 옮기는 것이다. 연애를 생각하는 것도, 소설을 쓰는 일도 사치로 느껴질 지경이다. 혜미에게 느낀 그의 감정은 사랑인지, 동료애인지, 단지 욕구를 충족하는 수단인지 헷갈린다. 


나는 혜미와 닮은 여자를 본 듯하다. 그녀는 항상 춤을 춘다. 처음 종수를 만났을 때도, 가게 앞에서도 춤을 추고 있었고 종수 앞에서 술을 마시면서 팬터마임을 보여주었고, 집에서 종수와 첫 섹스를 했을때도, '그레잇 헝거'와 '리틀헝거'를 설명하면서 춤을 춘다. 그리고 종수의 집 앞마당에서 상의를 벗어던지면서 춤을 춘다. 그녀가 몸으로 전달하는 이야기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뒤엉킨 감정을 분출하는 수단인 지 모른다. 


나는 벤과 같은 남자들도 어디선가 마주쳤다. 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의 말과 생각은 곧 종수나 혜미와 같은 비닐하우스인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비참함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벤과 같은 사람들은 물질이 주는 여유를 통해 매력적으로 보이는 방법도 알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왜 벤은 자꾸만 그들을 만나는 것일까. 그에게 한낮 비닐하우스 정도밖에 되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고 새롭게 사귀는데, 그것은 과연 태워주기를 기다리는 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일까. 아니면 내면의 극복할 수 없는 자아분열 같은 것 때문일까. 


영화 <버닝>은 감독이 제시하는 이미지와 사건읭 조각들을 맞춰 진실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 수록 그것이 절대 풀 수 없게  만들어 놓은 수수께끼 같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다. 종수가 혜미에게 준 시계는 왜 다른 여자 손목에 있고, (정말 준걸까, 그냥 우연일까) 그리고 그것은 왜 또 벤의 집 화장실 서랍에 있을까. 혜미으이 집에 있던 고양이는 왜 단 한번도 볼 수 없었고 아파트 주인 아주머니는 고양이 키우는 것은 금지고 그것이 있을리 없다고 하는 걸까. 그러면서도 벤의 집에 있는 고양이는 왜 '보일'이라는 말에 반응하는 걸까. 벤은 정말 비닐하우스를 태우기는 하는 걸까. 종수네 집 가장 가까운 곳의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했는데 왜 흔적도 찾을 수 없을까. 벤은 어떤 일을 하길래 한낮에 포르쉐를 몰고 커피숖에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그가 말한 비닐하우스는 혜미같이 잠시 만나다가 헤어지는 수많은 여자들인지, 그보다 종수의 사고와 행동을 조종하기 위해 택한 단어인 걸까. 그리고 왜 벤은 종수가 갑작스레 파주의 허허벌판에서 만나자는 제의에 응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하면서도 답답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아름다운 영화 속 이미지와는 상반된 종수의 분노와 드러난 모순적 사회가 끊임없이 머릿 속에서 재생되어 불편했다. 더욱 불편했던 것은 우리시대 청년의 분노를 담았다고 했는데, 이 영화를 보고 분노와 공감을 동시에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대한민국 청년들은 과연 이 영화를 볼 기회가 얼마나 있을지. 반대로 종수가 처한 환경을 이해하기 어려운 그들은 포르쉐를 몰고 영화관으로 갈 것이고,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시대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었다.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서사에 익숙해 이토록 시적인 영화를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나 뿐일까. 그런데 계속해서 멤도는 이미지가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이창동 감독의 다음 영화가 어떤 말을 내게 건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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