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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Mar 30. 2021

1억 글로벌 서비스를 만들며 배운 것들 1

디자이너의 역할 변화

8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다 처음으로 해외로 나가 몸 담게 된 첫 번째 회사, Grab. 입사 후 1.8억 명의 사용자가 매일 보는 앱의 홈스크린을 담당하여 2년 동안 일했고, 이후에 그랩 딜리버리의 사용자와 드라이버를 위해 디자인하기도 했다. 환경도 다르고 일하는 방식도 한국에서 했던 것과 많이 달랐기에, 디자이너로서 다양한 역량도 키우고 커리어와 성장에 대해 더 넓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시간이었다.


디자이너의 역할

한국에서 디자이너로 일한 경험은 거의 UI 디자이너로서 경험이었다. 나름 UX도 함께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그랩에서 제대로 일해보니 아니었다. 당시 취업 준비를 할 때 글로벌 트렌드는 점점 UI와 UX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선호하고 더 높은 연봉을 줬었다. 그 트렌드를 따라 나도 직군 변경을 시도하게 되었고, 덕분에 그랩에서는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거의 주니어로 돌아간 느낌이기도 했고, 내가 그동안 디자인을 잘못했었다는 반성도 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반추해보면,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비해 디자이너의 역할이 정말 한정적이었던 것 같다. 팀마다 많이 달랐지만, 기획자가 주는 아이디어에서 가장 보기 좋은 UI 솔루션을 찾아내는 일을 주로 했었다. 시간이 지나서 조금 더 역할이 확대되었을 때도,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프로덕트 아이디어를 내고 시안 내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랩에서 디자이너로서 나의 역할은 (1) 비즈니스 목표에 맞추어 피엠과 함께 문제를 발굴, 정의하여, (2) 관계자들과 협업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가설에 대한 힌트를 얻고, (3) 가장 가능성 있는 가설을 찾아내고, (4) 결과에 따라 추가적으로 개선하는 것이었다. 모든 과정에서 발생하는 커뮤니케이션,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스테이크홀더 매니지먼트 등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어찌 보면 기획자의 일이다. 한국에서는 사실 미팅도 많이 없었고,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통해서 사람들을 설득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랩에서는 기획 직무와 디자인 직무를 동시에 해야 했다. 내가 아이디어를 기획하고 팀과 협의하여 최종 결과물까지 만드는 것이다. 프레젠테이션과 미팅이 하는 일의 60% 이상을 차지했다.


어떤 문제를 풀어야 할까?

피엠(Product Manager)들이 분기마다 목표를 세우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함께 의논하고 정의한다. 주로 피엠이 큰 목표, 방향, 그리고 몇 가지 문제들을 정리해오면 디자이너들과 함께 토론하며 추가하거나 수정했으며, 때로는 디자이너가 주도적으로 문제와 프로젝트를 제안할 수도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문제가 진짜 근본적인 문제인지, 사용자의 문제뿐 아니라 다른 문제는 없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피엠은 비즈니스 목표를 바탕으로 전체를 보기 때문에, 디자이너가 예리하게 사용자 입장을 대변하고, 그 사용자의 불편함이 프로덕트의 구조나 프로덕트를 만드는 프로세스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닌지 찾아내야 한다.


그랩 앱 홈스크린에 배너를 처음 만들 때도 사용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배너를 제작하는 프로세스에 문제를 찾아낸 적이 있었다. 기존에 홈스크린 피드에 마케터들이 프로모션 이미지를 넣을 수 있는데, 나라 별로 각자 콘텐츠를 제작하다 보니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창의적인(?) 이미지들이 넘쳐났다. 배너에도 같은 문제가 생길 것이라 예상하고, 마케터들이 인터널 툴로 정해진 포맷의 이미지와 문구, 배경만 넣어 배너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기존에 배너를 만들기 위해 거쳤던 11번의 태스크가 6번으로 줄일 수 있었고, 배너 콘텐츠의 퀄리티도 훨씬 나아져서 사용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초반에 자주 들었던 피드백 중에는 문제에서 바로 솔루셔닝을 하지 말라는 지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프로젝트 브리프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아이디어들을 바로 와이어 프레이밍 하곤 했다. 하지만 그랩에서는 조금 더 문제를 분석하여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가설을 철저히 세우고 아이데이션을 해야 했다. 처음엔 왜 이리 당연한 말을 가설로 정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나중에 하다 보니 가설을 명확하게 세웠을 때 비즈니스 목표에 더 가까운 솔루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용자와 비지니스 문제를 탄탄하게 잡아야, 최대한 가능성 있는 가설이 나올 수 있다.


레벨업 하기

그랩에 있는 동안 내가 성장함에 따라 피엠들과 일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 적응할 때는 이의가 있어도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서 피엠의 제안하는 대로 따랐다. 하지만 점차 내 역할을 이해하면서 피엠이 제안한 것에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근거들을 모아 개선안을 제안했다. 그랩 앱의 홈스크린 특성상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피엠 리드가 종종 특정 솔루션을 제안하기도 했다. 한 번은 도저히 동의하기 어려운 솔루션을 제안하길래, 나는 내 피엠과 디자인 매니저의 도움으로 4일 동안 미친 듯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했다. 우리의 비즈니스 목표, 현재 데이터, 리서치 인사이트, 예상되는 문제점들을 보여주며 그 솔루션은 왜 안되는지 반박하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했다. 다행히 성공적으로 그 피엠 리드를 설득할 수 있었고, 그걸 계기로 어떻게 효과적으로 내 생각을 설득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아예 새로운 문제와 가설을 피엠에게 역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기존 홈스크린에 계속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어 포화 상태가 되면서, 근본적으로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 구조를 건드리고 리디자인 하는 일은 너무 규모가 큰 일이라서 모두가 진행하기를 꺼려했다. 나는 리서처와 함께 협업하여,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여러 Fundamental 리서치를 통해 수치로 증명했고, 제안했던 문제점을 정식 프로젝트로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디자이너로서 큰 프로젝트를 이끄는 경험도 할 수 있었고 리드 디자이너로 승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히어로는 없다

그랩에서 일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당연하게도 프로덕트를 만드는 것은 팀 플레이라는 것이다. 리서처, 피엠, 애널리스트와 함께 가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사용자 리서치, 데이터)를 모으고, 개발자, 비즈니스, 피엠, 여러 관계자들에게 현재 상황(비즈니스, 개발 범위, 관계자들의 피드백)에 대해 듣고 정리한다. 이를 바탕으로 여러 디자인 아이디어들을 생각해내야 한다. 협업을 통해 모은 정보들과 아이디어들은 가설과 함께 여러 시안으로 공유한다. 각 시안이 어떤 장단점-단지 사용성뿐만 아니라 개발 범위, 예상 임팩트, 등등-을 가지고 있는지 함께 보여주며, 어떤 안이 가장 가능성 있을지 토론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팀 멤버들과 함께 가장 가능성 있는 솔루션을 찾는 것이다. 디자이너나 피엠 혼자서만 최선의 안을 찾을 수 없고, 찾으려고 해서도 안된다.


리서치는 반드시

그랩이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도시에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사용자를 어림짐작으로 디자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따라 업무 프로세스에서 리서치 과정은 필수였기에, 리서치를 배우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었다. 거의 모든 프로젝트의 20-30%는 리서치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리서치에서 나온 인사이트로 문제를 정의하거나, 가설을 뒷받침하는데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한국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거나 앱스토어 피드백을 듣고 개선했지만, 그랩에서는 타겟 사용자들을 고용하여 여러 준비를 거친 다양한 리서치를 진행했다. 주로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리서치를 기획하고 시행했다. 다양한 리서치 방법론을 경험하면서, 어떤 경우에 어떤 리서치를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질문 방식이 맞는지, 어떻게 인사이트를 뽑아내는지 등을 배울 수 있었다. 포커스 그룹, 1:1 인터뷰, 롤플레잉, 이멀시브, 서베이, 트리 잭, 카드 소팅, 프로토타입 테스팅 등을 새로운 리서치 방법론을 경험했다. 그리고 정말 재밌었던 것은, 매번 가설로 세웠던 부분 중 예상을 벗어나는 것들이 꽤 있었다. 특히나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사용자는 극과 극으로 달라서, 이를 고려하여 디자인하기 쉽지 않았다. 글로벌 사용자를 대상으로 디자인할 때는 사용자를 예상하기 정말 어렵고, 리서치가 필수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드라이버와의 인터뷰에서는 현장에서만 겪을 수 있는 생생한 피드백을 많이 얻었다.


설득의 가장 쉬운 도구, 데이터

한국에서 일할 때는 아쉽게도 데이터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랩에서는 디자이너도 의사결정을 하는데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데이터는 주로 문제를 공유할 때 많이 사용했는데, 목표 지표와 함께 현재 데이터가 어떤지 공유하면서 문제를 공감시켰다.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구구절절 얘기하는 것보다, 현재 어떤 상태인지 데이터를 보여주면 사람들이 쉽게 가늠할 수 있다. 애널리스트와 함께 일하면서, 현재 제품의 문제를 파악할 때, 어떤 데이터를 보는 게 더 적절한지 함께 논의하여 요청하면, 데이터 애널리스트가 따로 뽑아주거나, 대시보드에 계속 찾아볼 수 있도록 세팅을 해줬다. 또한 디자인을 제안할 때, 목표 지표를 보여주며 어떤 시안이 목표 지표를 더 잘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기존 AB테스트 결과를 레퍼런스로 보여주기도 했다.


디자인 이터레이션과 커뮤니케이션

한국에서는 과정을 공유하는 게 마치 치부를 보여주는 것 같이 조심스럽지만, 여기서는 빠르게 초기 시안(정리되지 않았어도)을 공유하고, 여러 사람의 피드백을 받아 개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완벽한 최종 결과물이란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피드백을 듣고 개선하여 최선의 결과물을 찾아야 한다. 또 피드백을 받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도 중요하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피드백을 듣고 그냥 무시하기도 한다. 그럼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민망하기도 하고, 다음 번엔 피드백을 주고 싶지 않다. 나 같은 경우는 가능하면 받은 피드백을 빠르게 만들어 보여주고 적용하지 못한 이유를 얘기해준다. 그러면 멤버들이 이 디자이너가 모두의 피드백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더 깊이 있는 피드백과 아이디어를 줄 수 있다. 좀 더 번거로울 수는 있으나,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법이다. 다행히 한국에서 빠르게 시안을 치는 것에 익숙해 있던 터라서, 피드백을 받는 대로 바로 다양한 베리에이션과 이터레이션을 단시간 내에 보여주니 다들 좋아하고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그랩에서는 미팅도 많고 내 디자인을 발표해야 할 기회가 참 많았다. 처음에는 영어로 발표하는 자체도 너무 어려웠기에, 정보만 전달하는 데도 힘이 들었다. 하지만 점점 적응을 하면서, 단순히 정보를 공유하는 것으로는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데 부족하다고 느꼈다. 또한 내 디자인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계속 부딪히다 보니, 어떻게 하면 내가 원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전달할지 고민이 되었고, 다른 사람의 프레젠테이션도 많이 보고, 글도 많이 읽었다.


너무 복잡하고 구구절절하게 디테일하게 설명하는 것보다,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포인트와 맥락을 간결하게 논리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디테일한 내용은 프레젠테이션에서 표기하거나, 질문이 나왔을 때 대답하면 된다. 이것저것 다 이야기하다 보면 듣는 이로 하여금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고 집중력을 떨어뜨리게 된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면 듣는 사람 머릿속에 내가 풀고자 하는 문제와 그걸 왜, 어떻게 풀었는지 명확하게 남도록 해야 한다. 아무리 내가 디자인을 잘해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면 디자이너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는 것이다.


2편에서 커리어와 성장에 관한 글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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