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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의 습격

맛없는 음식으로 키워진 자가 갖춘 미각의 습성, 그리고 굴복하지 않은 자

by 윤지나

나와 식사를 하면 "밥맛이 떨어진다"고 직공을 하는 선배가 있는가 하면, "너는 인생의 즐거움 중 커다란 묶음 하나를 모르는 자야"라고 안타까워 하는 친구가 있을 정도다. 나는 먹는 것에 (다른 대부분의 것과 마찬가지로) 부지런하지 않다. 선천적으로 유전자가 게으른 측면도 있겠으나 엄마의 무지막지한 요리 솜씨 때문이라는 후천적 요인이 매우 클 것이라 본다.


아직도 잔인하게 맛 없던 음식들과, 음식이 차려져 있던 좁은 식탁의 풍경이 생생하다. 한 번은 엄마가 자장면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도대체 왜!!!) 차디찬 면발과 자장소스가 따로 놀며 중국집의 그 것과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맛을 내던 정체불명의 음식을 반나절에 걸쳐 먹었다. 해가 져서 어둑해졌지만 어린 심신은 고단에 쩔어 불을 켤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어둡고 주방과 거실이 구분되지 않았던 답답한 공간을, 자장면이 든 그릇 하나를 든 채 서성댔다. 저절로 줄어들진 않을까 기대하면서. 옆에서 동생은 토를 했다. 엄마는 그래도 끝까지 먹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동학대 수준이다.


맛이 없더라도 먹어 치워서 없애 버리면 그만인데, 우리 엄마는 양 조절에 실패하기 역시 일가를 이루셨던 분이다. 카레가 집에서도 먹을 수 있다는(일반 가정식이라는?) 평가를 들은 초등시절의 내가, 어리석게도 엄마에게 카레를 해달라고 요구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아마도 작은 몸집의 어린 지나의 기억이기에 과장된 회고가 분명하겠으나, 황토색 카레가 정말 '빨래통 만한' 스댕 냄비에서 괴로운 듯 펄펄 끊어야 했다. 냄비 옆으로 보기 싫게 흘러 내린 카레 줄기를 보며, 연좌제를 당할 아빠와 동생에게 머리를 찧고 사죄해도 시원찮을 죄책감을 느꼈다. 다행히도, 다음 기억은 없다. 못해도 일주일 내내 (분명히 맛도 별로였을) 카레를 먹었을 게다. 그 기억까지 자장면처럼 또렷하게 남아있었다면, 나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직장 생활을 기자로 시작하면서 비싸고 맛있고... 여튼 좋은 음식을 먹을 기회가 많아졌지만 내 미각의 습성은 쉬이 변하지 않았다. 굉장히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평가하는 곳이라도 부러 찾아서 먹는 일은 없다. 어떻게 보면 나에게 섭취란, 미학적인 면은 극히 일부고 생명을 유지하고 사지를 움직이기 위한 굉장히 기능적인 활동이다. 때문에 맛 있는 음식에 대한 갈망은 거의 없는 반면에 배가 고픈 상황에선 되레 짐승과 비슷하다는 단점이 있다. 허기에 먹이를 찾는 형형한 눈빛의 나를 경험한 사람들은 내가 식탐이 있다고 착각할 정도인데, 그래도 뭐, 그 시간도 잠깐이다.


이런 새삼스러운 주제의 끄적거림은 아빠 덕분이다. 내가 이렇게 커오는 동안 아빠는 "나는 뭐든지 잘 먹어"라며 엄마발 고통에 무감각해져 있었지만, 알고보니 나와는 정반대 미각의 소유자인 모양이다. 어제는 내가 저녁식사에서 싸온 음식에 굉장히 행복해 하셨다. 데워서 드린다니까 그냥 먹어도 맛있다며 급하게 포장 뚜껑을 제낀다. 맛집에 가면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리는 우리 아빠, 내가 그새 또 깜박했나 싶다.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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