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대표의 연금개혁론과 증세론에 부쳐
정의당의 ‘보수화’가 우려스럽다
- 김종철 대표의 연금개혁론과 증세론에 부쳐
김종철 신임 정의당 대표의 돌출발언이 연일 화제다. 당대표의 발언은 류호정 의원의 패션쇼와 달리 신선한 퍼포먼스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민주노동당에서 진보신당을 거쳐 정의당까지, 진보정당에서만 20여년간 활동한 그가 사회경제적 보수파 프레임에 투항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언론에서는 그러한 그의 행보를 ‘신선한 리더십’으로 칭찬하고 있지만 말이다. 마땅히 그의 발언을 비판해야 할 진보적 지식인들 역시 침묵하고 있다.
최근 김종철 대표는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국민연금과 통합’하는 방안을 거론한 적이 있다. 그동안 노동계와 시민사회가 줄곧 주장했던 대로 공적연금의 보장성을 ‘상향평준화’하자는 취지의 발언이라면 충분히 논의할 여지가 남아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연금개혁의 이유로 ‘재정적자’를 거론했다는 점이다.
“(공무원연금, 사학연금, 군인연금을) 정부 재정으로 적자를 보전하는데, 10년 후에는 10조원이 넘어간다. 이걸 누가 이해하겠나. 공무원연금, 사학연금은 연금 액수도 굉장히 높다. 그렇다면 국민연금에 통합해서 재정 적자를 줄이고 공평한 노후를 만든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한다.”
⁃ 김종철 대표의 10월 16일자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https://news.joins.com/article/23895716
그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재정적자를 이유로 윗돌 빼 아랫돌 괴자는 식의 연금개혁론(?)을 설파하는 것이 보수 시장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단골메뉴였다.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이 곧바로 김종철 대표의 발언에 대해 “포퓰리즘 경쟁 벗어나야”, “김 대표 용기 있는 제안에 박수 보낸다”고 화답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다.
정말 연금제도의 재정적자 자체가 문제일까? 수입과 지출이 누적되면 연기금이 고갈되고 사회보장제도 붕괴로 이어질까? 정작 앨런 그린스펀은 다르게 말하고 있다. 이때 그가 좌파 경제학자가 아닌 미국의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연준 의장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연기금이 파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정부가 원하는 만큼 통화를 창조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지급하는데 그 어떤 제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연금 수급자들이 구매할 실물 자산을 충분히 생산해낼 수 있는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가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기금의 문제는 재정을 유지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 2005년 미국 하원 질의에서
이는 발권력을 가진 정부에서 재정적자로 기금이 고갈된다는 시나리오는 허구적인 공포 마케팅이라는 것, 그리고 이를 통화정책의 책임자까지도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일정한 경제규모를 유지하는 한 재정적자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 않으며, 재정적자를 기피할수록 오히려 국민의 삶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이제 주류경제학에서도 차츰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진보주의자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일자리와 복지 등 국민경제 전반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 강화이지 보수적 관료주의자처럼 기금의 재정적자를 먼저 걱정할 때가 아니다.
또 얼마 전 김종철 대표는 "저소득층에도 세율을 올리는 보편적 증세가 필요하다. 복지국가들은 다 그렇게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를 예시로 들려면 저소득층 증세가 아니라 부유세 도입부터 논해야 한다. 부유세를 도입하지 않고 복지국가를 건설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부유세와 맞물린 각종 특권과 지대의 해소가 선행되지 않은 채 불평등·세습자본주의의 사회적 비용을 저소득층에게 물리면 복지국가가 잘 작동할 것이라 믿는 것은 엘리트주의 성향 지식인들의 몽상일 뿐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앳킨슨에서 피케티까지 불평등 문제에 매진한 연구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부유세를 재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꾸준히 내고있다.
또한 OECD 국가 중 최저수준의 국가부채 비율을 자랑하는 한국정부의 균형재정 추구가 오히려 공공 서비스와 사회안정망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은 여러 국제 지표들을 통해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김종철 대표의 인식은 재정건전성이 복지국가의 선결조건이라 믿는 우파적 복지담론에 포획되어 있다. 재정건전성에 집착하는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가 침체를 장기화시키고, 담세능력을 역으로 저하시키며, 복지전달체계의 효율성마저 훼손한다는 구조적 원인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재정에 대한 정부 책임성 강화와 부유세 도입 등이 시급한 상황인데 순서가 잘못되었다.
더욱이 그의 연이은 돌발 발언은 금융위기를 전후로 전세계적으로 발흥한 대중적 저항운동의 경향성을 망각한 것이기도 하다. 포데모스/시리자의 반긴축 투쟁, 부유세를 의제화한 버니 샌더스와 AOC에 환호한 미국민, 유류세 인상에 맞선 프랑스 시민들의 노랑 조끼 시위가 대표적이다. 이들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1)반긴축, (2)서민증세 반대, (3)경제적 특권해소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 속에서도 한국의 진보정당 대표는 방향성을 잃은 듯 하다.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김종철 대표는 ‘민주당의 보수화’를 비판했지만 자기 자신의 보수화도 걱정해야 할 처지이다. 균형재정에 집착하고 저소득층 증세를 외치는 자가 어떻게 민주당의 보수화를 비판하고, 국가와 정당을 진보적으로 견인할 수 있단 말인가?
진보너머는 오래전부터 사회경제적 정책 및 의제의 탈이념화와 탈정치화가 정체성 정치에 갇힌 진보 엘리트주의의 고질적 문제임을 지적한 바 있다. 지금도 이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의당이 차별화되어야 할 영역은 옷차림과 정체성에 기반한 구별의식이 아니다. 진보정치에 필요한 것은 다수 시민의 삶을 관통하는 문제를 환기하고 이에 대한 집합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이 결여될 때 진보정치는 정체성 정치와 엘리트적 관료주의로 퇴행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정의당이 그러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 우려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