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서평
편집자 주 : 박가분 운영위원이 기고한 샹탈 무페 著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 서평입니다.
검찰총장 징계 문제를 둘러싸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 사이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약간의 단순화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이 갈등은 한편에서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선량들이 검찰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는 엘리트주의와, 다른 한편에서는 엄연히 공무원 조직인 검찰조직도 (의회정치를 매개로 한) 다수파의 민주주의적 통제를 따라야 한다는 포퓰리즘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은 비단 한국만의 갈등은 아니다. 가령 유럽을 보면 해묵은 갈등 중 하나가 EU 문제이다. EU는 알다시피 일국에서 선출되지 않았거나 대중에 대한 민주적 책임을 지지 않는 관료집단과 이해단체들이 때로는 한 나라의 정부조직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곤 한다. EU는 예전부터 이민문제에서 보다 더 ‘개방된 유럽’을 지향해 왔다. 그러나 개방된 노동시장에서 외국인 저숙련 저임금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는 하층 노동계급에게 EU는 불편한 존재이다. 이민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에서 반(反)EU 구호가 단골로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민주적 통제와 책임을 따르지 않는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 바로 포퓰리즘 정치의 핵심이다.
한편 과거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작업했던 유명 정치학자인 샹탈 무페는 포퓰리즘이 반이민, 반이슬람의 기치를 내세우는 우파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는 최근작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적 정치상황이 ‘포퓰리즘적 모먼트(moment)’ 위에 놓여 있으며 좌우 모두 그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진단한다. 금융위기 이전에는 초국적 자본과 국제기구들이 개별 주권국가의 민주적 합의와 공론 과정을 건너뛴 채 자본에 유리한 질서를 강제했다. 앞서 예를 든 EU 역시 회원국의 내부적 사정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이민 자유화나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관철시켰을 뿐만 국가의 재정규모마저 제한함으로써 국민복지에 국가가 개입할 영역을 극도로 제약했다.
이런 ‘비민주적’ 관료조직과 엘리트에 대해 누적된 대중적 피로감 및 반감이 금융위기 이후에는 ‘포퓰리즘 정치’를 통해 분출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신도 진보파 정치학자인) 무페는 포퓰리즘을 ‘정치적 욕설’로 쓰는 게으른 관성에 굴복하는 대신, 좌파들이 현재의 포퓰리즘적 모먼트를 보다 적극적으로 움켜쥐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좌우를 막론하고 전세계적으로 大포퓰리즘 시대를 맞이했다는 무페의 상황 진단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상진단은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의에는 여러 한계가 있다. 우선 무페는 현재의 포퓰리즘적 모먼트가 가진 정치적 모호성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
문제의 EU를 다시 예로 들어 보자. 이들이 지난 금융위기를 전후해서 저지른 몇 가지 실책이 있다. 이들은 산업 및 복지 인프라에 더 많은 정부투자가 필요한 가난한 남유럽 국가에게도 일률적으로 엄격한 재정준칙을 강요했다. 또한 이들은 이민과 자본이동의 자유화가 선진국 유럽의 노동자들에게 반드시 유리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며 정치적 반발 또한 극심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물론 이런 실책들은 전통적인 좌파의 입장에서도 '신자유주의' 정책의 폐단이라고 아주 손쉽게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또 다른 지점이 있다. 이들 신자유주의적(!)인 EU 관료들은 동시에 '인권', '생태', '다양성', '정치적 올바름', '국제주의'의 명분을 등에 업고 일국의 합의를 건너뛴 초국적 정책들을 입안했다. 이것이 좌파들이 EU에 대해 정치적으로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이유이다. 예컨대 노동과 자본의 이동 자유화는 더 많은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을 확보할 절호의 기회라는 식으로 선전됐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좌파조차 이런 위선적인 수사법에 대해 별 다른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유럽국가의 상당수 노동자들이 전통적 좌파정당과 그 이념에 등을 돌리게 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세계화에 대한 그들의 모호한 태도도 한 몫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노동자 계층의 문화적 소외감도 무시할 수 없다. <엘리트가 버린 사람들>의 데이비드 굿하트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토박이 노동자들의 불만에는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안정 뿐만 아니라 삶의 방식과 문화적 정체성 그리고 자아 존중감의 위기도 공존한다. 이들의 분노를 특히 부채질하는 것은 그러한 위기감을 못 본 척하거나 마치 원-파시즘이나 인종주의의 발로인 것인 양 폄하하는 엘리트들의 오만이다. 그들은 예컨대 불법이민 규제에 찬동하는 히스패닉 하층계급 노동자가 있다는 사실(그들은 2016년보다 2020년에 더 많은 표를 트럼프에게 안겼다)에 눈을 감는다. 그런데도 정작 포퓰리즘 정치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이러한 정서적 자원들을 무페는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결정론을 비판해온 무페가 진보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 불만의 문화적 차원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무페의 한계점은 (그 자신이 도래하길 바라는) 좌파 포퓰리즘의 진정한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호한 처방으로 이어진다. 가령 무페의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는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함께 쓴 과거의 히트작 <사회주의와 헤게모니 전략>(1985)에서 물씬 풍겨오던 80~90년대식 신사회 운동가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다.
신사회 운동은 68혁명 이후 분출되기 시작한 다양한 소수자 의제와 생태, 여성, 지역 등의 부문의제들을 하나의 해방적 기획으로 묶을 수 있다는 전망에서 출발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잿빛 노동계급의 정체성을 탈각한 n개의 소수자적 정체성들을 무지개빛으로 나열하는 것이 대중적 다수파를 구축하는 기획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좋았던 옛 시절'의 이야기일 뿐 '트럼프 신드롬'과 '브렉시트' 이후의 세계에는 적용될 수 없는 논의다.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식 세계화의 불안정을 반세기 가까이 경험한 노동계층은 이제 여러 정체성들의 유희적 나열이 아니라 자존감을 충족할 수 있는 안정된 사회와 공동체를 원한다. 물론 그런 욕구 속에서도 함께 공동체를 일구어 나가는 소수자들의 권리 보장을 지지할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여러 논자들이 지적하듯이 소수자의 지위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정체성 정치는 세계화와 기술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지역사회나 전통적 질서에 대한 존중심이 별로 없는 고학력 엘리트들의 의제일 뿐이다. 반대로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영국 노동당의 제러미 코빈 등의 성공적인 좌파 포퓰리즘 정치세력의 비결은 지금까지의 정치질서에서 소외된 노동계급의 눈높이에 맞춘 급진적 사회경제적 강령을 제시한 데 있었다. 동시에 좌파 포퓰리즘 정치세력이 몰락하거나 한계에 부딪히게 된 공통적인 배경도 직시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위기를 등에 업고 성공한 좌파정치도 다수 노동대중과의 문화적 일체감을 효과적으로 창출하지 못한 채 나중에는 보수적 정체성 정치에 기반한 우파 포퓰리즘과 경쟁에서 밀려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가령 제러미 코빈은 당내 PC주의자들의 등쌀에 밀려 EU와 브렉시트 문제에 대해 분명한 견해(일설에 따르면 그 역시 하층 노동계급과 같은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를 표명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다른 민족주의 정당들에게 지분을 상당부분 빼앗기고 결국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좌파 포퓰리즘 기획’의 필요성 및 가능성을 역설한 통찰력 있는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무페의 저작에서는 포퓰리즘을 어디까지 긍정해야 하는 건가에 대한 문제도 모호한 지점으로 남겨 두고 있다. 이 점을 더 자세히 보기 전에 우선 포퓰리즘 정치가 얼마나 위태로운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포퓰리즘 정치는 기본적으로 진정한 민의를 대변하는 자와 민의를 왜곡하는 특권층 및 침입자의 대립을 환기한다. 여러 정치학자들이 지적하듯 포퓰리즘 정치가 소환하는 이 갈등은 어떤 형태의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에든 내재해 있다.
포퓰리즘 정치는 서로 상극인 원리인 자유주의(=권력분립과 개인의 자유 보호)와 민주주의(=국민주권의 실현)의 대립을 표면화한다. 독일의 헌법학자 칼 슈미트는 이 대립을 보다 극단화해서 '자유주의란 개개인의 비밀보장이 허용되는 무기명 투표이고 민주주의는 군중집회의 박수갈채'라고 요약한 바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 야스차 뭉크는 (나치 부역 이력이 있는) 슈미트처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이 최종결전의 형태로 폭발하는 상황을 불가피하다고 보지 않지만, 이들의 공존이 위태롭다는 점만큼은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한다(<위험한 민주주의> 참조). 물과 기름이나 다름없는 이 두 정치원리는 현실의 자유민주주의 제도 속에서는 긴밀하게 결합될 수 있다. 예컨대 현실의 선거제도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른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적이지만 개인의 투표여부에 대한 비밀을 함께 보장한다는 점에서 자유주의적이다. 많은 현실의 정치제도는 시민참여와 개인의 자유라는 두 가치를 동시에 담아내려 노력한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결합은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정치사회적 상황의 산물일 뿐이라서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불안정해 질 수 있다.
한편 무페 등의 좌파 포퓰리즘 옹호자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내재적 불안정과 위기를 나타내는 '증상'을 넘어 긍정적 '정치 기획'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더욱 국민주권의 실현과 개인의 자유라는 두 가치의 균형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컨대 여성의 대의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혜화역 워마드 시위에서 홍대 몰카 피해자의 인격을 짓밟았던 비열한 언행에 못 본 척 침묵해야 하는가?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사형시켜야 한다는 식의 엄벌주의 만능론에 편승해야 할까? 차베스씨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헌법재판관들을 갈아치우면 만사 ok인 것일까? 아무리 포퓰리스트라 해도 문명화된 사회의 좌파는 그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일 의무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포퓰리즘 정치가 소환하는 '대중' 대 '엘리트'의 대립구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요새 극우 유투버들을 보면 소위 대깨문, 공산주의자, 조선족, 페미니스트를 하나의 계열 안에 묶고 자신들을 이들 세력의 거대한 음모와 맞서 싸우는 충정어린 국민 중 한 사람으로 즐겨 소개한다. 또한 이들은 문재앙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현 정부와 대립구도를 세우는 잡다한 이들 간의 사소한(?) 차이를 불문에 붙이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의료정책에 대한 가부를 결정할 권한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는 젊은 국시거부 의대생들의 엘리트주의적 세계관은 밑바닥 대안우파 정서와 결이 다르지만 어쨌든 그러한 사소한 차이는 무시된다. 한때 부당한 탄핵정치 음모에 협력했지만 현 정권의 탄압을 받는 순간부터 윤석열도 애국보수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우파 포퓰리즘 속에 자유주의적 관용의 꽃이 피어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음화된 사례를 통해 역으로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겠다. 적이 누구인가를 보다 더 정확히 해야만 타자와의 사소한 불일치점에 대한 관용도 기를 수 있다고 말이다.
많은 우파 평론가들은 시민 개개인의 사상을 넘어 문화적 취미까지 검열하려 드는 요새의 래디컬 페미니즘이 공산주의(혹은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와 친화성을 갖는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실상은 오히려 정 반대이다. 엘리트들이 다수 대중의 삶에 가하는 위협에 초점을 맞추는 좌파일수록 오히려 대중 내부의 다양성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고취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반페미니즘, 반이민, 반이슬람으로 일관하며 분노를 고취하는 우파 포퓰리즘과 전혀 다른 노선의 좌파적 방식의 자유주의라고 해도 좋다. 예컨대 여성의 자유와 안전을 진짜로 위협하는 것은 섹스돌이나 선정적인 게임 따위가 아니라 무분별한 이윤추구와 불안정한 경쟁사회라는 점을 납득할 때 비로소 타인의 취향에 관한 쓸데 없는 걱정을 멈출 수 있다.
여기서 과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과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라는 저서에서 벌인 열띤 '포퓰리즘 논쟁'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지젝은 포퓰리즘이 '실천에서는 가끔씩 옳지만 이론에서는 항상 틀리다'고 논평한 바 있다. 그 이유는 라클라우가 추구하는 좌파 포퓰리즘 기획에서 무수히 많은 임의의 '억압자 對 피억압자' 대립구도가 가능하며, 그 와중에 무엇이 '진정한 대립'인지를 지시하는 정박점은 없거나 있어도 우연한 외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지젝의 지적은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대깨문=공산주의=페미니스트 계열의 음모에 맞서는 애국보수 시민=정의로운 검찰총장=국시 거부생=우파 유투버 계열을 소환하는 것도 충분히 훌륭한 포퓰리즘 기획으로 평가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수의 정체성을 포용해서 다수파를 창출한다'는 형식적 논리만으로는 이제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을 더 이상 엄밀히 구분할 수 없다. 요새는 우파 포퓰리즘도 그 내부에 노동계급의 불만을 수용하는 등 포스트모던한 다양성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슬라보예 지젝이나 알랭 바디우와 같은 고리타분한(?) 좌파들이 포퓰리즘 기획에는 고유의 ‘정치적 진리’가 부재하다고 비판할 만 하다.
하지만 여기서 (지젝이 선호하는 방식의) 변증법적 비틀림을 한 번 더 가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좌파 포퓰리즘의 성패는 계급과 같은 본연의 정치사회적 대립구도를 보다 구체적인 '그들'과 '우리'의 대립으로 제시하는 데 있지 않은가? 따라서 본연의 계급정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정확하고 올바른 포퓰리즘 정치 기획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포퓰리즘과 계급정치의 문맥을 넘어서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적 사회경제질서 속에서 오랫 동안 고통받아 온 노동계급의 도덕적 문화적 불만을 응집할 상징물을 성공적으로 제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그 동안 오남용되었던 ‘문화정치’의 모범적 사례가 될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한 번 '적을 명확히 하는 것'이 관건이다. 좌파들은 이번 검찰개혁 논쟁처럼 자신이 개입할 능력이 없는 첨예한 갈등에 대해서 초연하게 구는 것이 쿨하다고 정신승리하는 경향이 있다. 그보다는 검찰개혁 국면 이후에도 검찰의 전횡 외에 대중적 분노를 소환할 수 있는 엘리트 계층 후보군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당장 먼저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엘리트 경제관료들이다.
이들이 어디에 주로 포진해 있는지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사항을 지적해 보자. 비선출직 공무원인 이들은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을 주무르는 과정에서 민주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해 왔다. 이들은 IMF 이후 대중에게 온갖 사회경제적 고통을 강요했고, 정부와 의회가 입안한 정책을 실행단계에서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하기도 했으며, 시장개방과 독점이 가져올 민생경제의 폐단에 대해서 무신경했다. 최근 부동산 정책의 방향상실과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표류에 이들 관료집단의 책임이 상당부분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식 정치담론 상에서 이들의 정치적 책임이 검찰과 달리 제대로 '가시화'된 적이 없다(최근 재정적자를 충분히 편성하지 않았다며 경제부총리를 비판한 이재명 지사는 예외적 사례이다). 물론 검찰과 달리 경제관료의 폭주를 통제할 생각이 없는 정부의 의지박약도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좌파들에게는 이곳이 바로 로도스 섬이다.
한국형 좌파 포퓰리즘은 가능할까? 관련해서 몇 가지 개략적인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볼 수는 있다. 우선, 길게 볼 때에는 IMF 이후, 짧게 볼 때에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악화된 민생문제의 책임자를 제대로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좌파 포퓰리스트는 급진적 재분배 기획에 심취한 나머지 내 집 마련 등과 같은 대중의 물질적 소유욕을 손 쉽게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나아가 진정한 좌파 포퓰리스트라면 정체성 의제를 우파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 다수 인민’의 일체감을 북돋는 대중문화의 소재들을 손쉽게 비웃거나 폄하해서도 안 된다. 다양한 삶의 방식과 성적, 인종적, 문화적 소수자의 권리를 단호하게 옹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라는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도덕적 상징물 및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