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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Sep 09. 2019

정의당의 낙태죄 폐지 법안 관련 논란에 대한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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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맞춰 발의한 정의당의 낙태죄 폐지 법안이 당 안팎에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진보너머는 이러한 논란이 자칫 다수 여성의 삶을 바꾸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채, 선명성 경쟁에만 매몰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지 우려스럽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먼저 진보너머는 정의당이 발의한 법안에 우리 사회의 새로운 균형점을 찾기 위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평가합니다. 일각에서는 “여성의 임신중절에 그 어떠한 허락도 처벌도 필요하지 않음”에도, “정의당의 법안이 여전히 임신중절을 법의 틀에 따라 제한하고 징벌하고 있다”며 정의당 법안이 헌법재판소 결정보다 후퇴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이는 헌재 결정의 취지를 왜곡한 자의적 해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헌재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통해 낙태죄 규정은 위헌이지만 구체적인 대안 규정은 국회가 정하라고 밝혔습니다.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인 생존을 할 수 있는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를 ‘결정가능기간’이라고 정의하며, 결정가능기간의 최대치를 언제로 잡을지, 언제까지 사회경제적 사유를 묻지 않을지 언제부터 제한할지 등을 국회에서 정하라고 판단했습니다.


‘단순 위헌’ 의견을 낸 헌재 재판관들 역시 “14주 이내의 낙태 처벌은 위헌”이라면서도, 14주 이후부터는 낙태 여부를 여성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하되 일정한 한계를 두어야 한다고 했으며, “임신 22주 이후에는 원칙적으로 인공임신중절을 제한하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허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정의당의 법안에는 22주 이후에도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을 허용할 수 있도록 하는(건강상의 위험 등)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를 받아들이면서도 최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으로 만든 법안입니다.


실제 임신중절을 인정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각자의 상황에 맞춰 다양한 임신중절 허용기간과 사유 제한을 두고 있습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그리고 공익이 합치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어야만, 낙태죄 폐지라는 법률적 판단이 다수가 동의하는 굳건한 사회적 합의로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간과 사유 제한이 없이 임신중절을 허용하는 나라는 북한, 베트남, 중국, 캐나다 정도입니다.


이제 정치가 할 일은 헌재 결정을 토대로, 다수가 합의하여 낙태죄 폐지가 실제 여성들의 삶을 바꿀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균형점을 찾는 것입니다. 논의의 방향은 기간이나 사유가 아니라 최대한 신속하게 낙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는 것, 그리고 안전하고 저렴한 시술 환경을 국가가 전적으로 지원하는 데 맞춰져야 합니다.


아무리 임신중절을 법으로 허용해도 가난한 여성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그런 낙태죄 폐지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실제 미국에서는 공화당 행정부가 집권한 뒤 낙태죄 폐지 판결을 되돌리지 못하자 임신중절에 대한 지원금을 삭감하는 방식으로 여성들의 임신중절 선택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보수 정권이 집권하더라도 가난한 여성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저렴한 임신중절’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너머는 정의당의 법안 내용에 가난한 여성들의 실질적 자기 결정권을 보장할 수 있는 방안을 추가할 것을 제안합니다. 여성이 임신중절을 선택할 때 반드시 의료기관으로부터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이를 국가가 지원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것이 대표적인 방안입니다.


상담 제도의 마련은 국가가 여성들의 임신중절을 돕겠다는 첫 신호탄이 될 것입니다. 이미 독일, 미국의 19개 주, 우루과이 등에서 임신중절시, 임신중절 전 여성의 상담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임신중절이 자신의 몸과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임신중절 외 다른 대안(출산 후 입양제도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제공 받습니다.


이는 그동안 낙태죄를 유지하며 여성이 홀로 위험하게 임신중절을 결정하도록 방치해왔던 국가와 사회가, 낙태죄 폐지를 계기로 그 부담을 함께 짊어지고,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여 여성이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실제 2010년 보건복지부 실태조사에 따르면 임신중절 수술을 경험한 여성 중 전문기관 상담을 거쳤다는 여성은 3.3%뿐이었습니다. 반면 응답자의 96%가 “전문기관 상담이 필요하다”고 답했습니다.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대한민국 사회가 진보하고 있음을 알리는 빛나는 성취였습니다. 불과 7년 전 헌재는 낙태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국가가 시민을 더 자유롭게 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그간 대한민국은 낙태죄를 통해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인생에 중요한 결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옭아매어 왔습니다. 따라서 낙태죄 폐지는 어둠 속에서 홀로 임신중절을 결정해야 했던 여성들의 승리이자, 국가로부터 자유를 빼앗겼던 모든 시민의 승리입니다.


지난 대선 내내 우리당 심상정 후보가 말했듯 정의당은 “선명성을 경쟁하는 정당이 아니라 책임성을 경쟁하는 정당”입니다. 지금 이 순간 한국사회가 도달한 위치를 소상히 진단하고, 다수가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책임 있는 진보적 대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정의당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진보너머는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많은 조치들을 폐기하는 것이 모두를 위한 진보정치라 믿으며, 낙태죄 폐지가 시민의 자유를 확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어떤 여성이든 안전하게, 합리적인 비용으로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자 해방이라 믿습니다. 정의당이 앞장서서 낙태죄 폐지가 다수 여성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만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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