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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Sep 04. 2019

<나와 타자들> 서평 by 김보현

2회 진보너머 트레바리 선정 도서 서평

1. 정체성 정치 논쟁과 모순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라는 주제에 천착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조던 피터슨 같은 우파는 정체성 정치를 개인주의의 결여라고 비판하는 반면, 마크 릴라와 같은 좌파는 개인주의의 과잉으로 비판하기 때문이다. 양쪽 주장 모두 근거는 있다. 정체성 정치에서 개인보다 집단적 정체성(성별, 인종 등)에 몰입하는 측면은 피터슨의 주장과 부합하며,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 없이 자신의 정체성에만 몰입하는 측면은 릴라의 주장과 부합한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은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없다. 사실 정체성 정치의 문제 자체가 진지하게 논의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졸데 카림의 <나와 타자들>은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을 줄 수 있는 최초의 책일 것이다.


2. 개인주의의 3가지 모델


  이졸데 카림은 개인주의를 하나로 보지 않고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어 분석한다. 먼저 1세대 개인주의는 1800년대의 민주화, 그리고 민족 형성과 함께 등장한다. 근대 국가에서 민주화와 민족 형성은 각기 다른 역할을 한다. 민주화는 부르주아(사인)와 시투아앵(공인)을 분리시키고, 민족 형성은 시투아앵이라는 추상적인 민주주의의 주체에게 구체적인 정체성을 제공한다. 그래서 근대 국가의 국민들은 사인간의 차이를 후순위로 취급하고 하나의 민족이라는 상상적 정체성을 우선시할 수 있게 되었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했듯이 민족은 상상에 불과하지만, 잘 작동되는 상상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1세대 개인주의는 “보편적 개인” 개념을 처음으로 창조했다.


  두 번째로 2세대 개인주의는 1960년대 신사회 운동과 함께 등장한다. 신사회 운동은 과거와 달리 계급 중심의 의제가 아닌 여성운동, 사회운동, 반전운동, 환경운동과 같은 보다 다양화된 의제들을 제시했다. 신사회 운동은 2세대 개인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에 정체성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정체성 정치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처럼 공인과 사인 사이에 있던 구별을 걷어내려는 시도였다. 여기서 민족 국가로부터 권위적으로 부여되었던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축소되고, 개인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내세우게 된다.


  마지막으로 3세대 개인주의는 ‘다원화 그 자체’이다. 3세대 개인주의는 2세대 개인주의보다 정체성의 축소가 더 심화된다. 정체성의 축소라는 점에서 3세대 개인주의는 2세대 개인주의와 유사하다. 그러나 신사회 운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적으로 했고 이를 위한 정치적 행동에 힘썼던 반면, 다원화는 정치 ‘운동’이 아닌 ‘현상’이며 새로운 공적 정체성을 제공하지 않는다. 때문에 민주주의의 주체는 민족이라는 구체적 형상에서 개인적 정체성으로, 그리고 개인적 정체성에서 텅 빈 자리로 바뀌게 되었다. 3세대 개인주의의 특징은 ‘감소된 주체’ 혹은 ‘축소된 자아’다. 사람들은 텅 빈 정체성의 자리로 인해 혼란과 불안을 느끼게 되지만, 더 이상 1세대 개인주의 시절처럼 민족과 같은 하나의 거대한 정체성을 제공받지 못한다. 이처럼 답이 없는 문제가 계속되는 상황이 바로 오늘날의 다원주의 환경이다.


  다시 정체성 정치가 가지는 모순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카림의 관점으로 보면 피터슨과 릴라의 정체성 정치 비판은 모두 오래된 1세대 개인주의에 근거한다. 단지 피터슨은 부르주아라는 위치에 기반을 두는 반면, 릴라는 시투아앵이라는 위치에 기반을 두고 있을 뿐이다. 사실 피터슨과 릴라 모두 현대의 다원화된 환경에서 정체성 정치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 종교, 문화, 정치에서의 개인주의



  첫째로 종교적 측면에서 1세대 개인주의는 거대 종교가 중심이 된다. 예를 들어 교회는 획일적인 정체성을 제공하여 사람들을 교육하고 통합시킨다. 이러한 동질 사회에서 공적 영역은 백인 기독교인만 진출가능한 곳이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타종교가 등장하며,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를 공적으로 인정받기 원한다. 따라서 이슬람 신자라도 공적 영역에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3세대 개인주의는 다양한 종교가 난립하는 환경에서 나타난다.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은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된다. 동질 사회에서 종교란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태어남과 동시에 받아들여지는 당연한 존재였다. 그러나 다원화 사회에서 종교는 선택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종교를 선택하지 않는 무신론도 하나의 선택지가 되었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 ‘개종자’의 특성을 가지는 것이다. 모태 신앙으로 평생을 자라왔다 하더라도, 자신이 타종교인과 병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더 이상 동질 사회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때에 공적 영역은 종교에 관계없이 진출 가능하지만,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종교적 특성을 축소시켜야 한다. 예컨대 판사가 이슬람 신자라 하더라도 법원에서 히잡을 착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판사는 사인이 아닌 공인을 대표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문화적 측면에서 1세대 개인주의는 민족 중심이다. 문화는 개인을 잘 조직된 상징세계에 끼워 넣는 역할을 한다. 상징 질서를 어느 정도 흔드는 것은 예술가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다. 2세대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이질적인 상징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징들은 각 개인에게 여전히 완전하고 유일한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다양한 상징은 종종 자연으로의 귀환, 즉 루소주의로의 회귀를 불러왔다. 3세대 개인주의에서는 다양한 상징들이 병존하지만, 더 이상 개인에게도 상징의 의미가 일원화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요가가 가지는 상징성을 생각해 보자. 2세대 개인주의에 따르면 요가는 힌두교의 영적 훈련이다. 그러나 3세대 개인주의에서 요가는 신체 기술로써 훈련되기도 한다. 종교 영역에서의 개종자처럼, 문화 영역에서는 트랜스젠더가 전형적인 인물 유형으로 등장한다. 다원화 사회에서는 문화적인 상징 뿐 아니라 성(sex)과 같은 자연적인 상징조차 다의성을 띄게 되었다. 종종 이러한 다원화는 테러와 같은 근본주의적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측면에서 1세대 개인주의는 정당이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 정당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호명했고, 사람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특성들을 제쳐두고 집단 안에 녹아든다. 1세대 정치인은 사람들의 보호에 대한 욕구를 채워주어야 했기에 카리스마가 필요했다. 따라서 윈스턴 처칠이나 빌리 브란트 같은 권위와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 부상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정당에 대한 비판과 함께 다양한 NGO들이 등장한다. 이 때의 정치는 1세대 개인주의에서 제쳐두었던 개인적 특성들을 분명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대표해줄 정치인을 찾게 되었고, 다니엘 콩방디 같은 정치인을 모범으로 삼고 신뢰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인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켰고, 누구나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품었다. 3세대 개인주의 시대에 이르자 NGO는 자신이 비판했던 정당처럼 하나의 제도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대의민주주의와 정치 프로그램에 대해서 불신을 품게 되었으며, 이것은 종종 정치 혐오로 오인되곤 한다. 하지만 3세대 개인들은 여전히 정치에 대해서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정치적 수단을 찾지 못하였을 뿐이다. 3세대 개인들은 정치에서의 쾌락주의를 추구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치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변화시키고 싶어 하지 않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정체성을 해결하고 싶어 한다. 이 때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정치에서 나르시시즘적인 면모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을 통해 하나의 팬덤처럼 자신의 정치적 쾌락주의를 대리만족으로 채운다.


4. 다원주의에 대한 우파의 방어: 우파 포퓰리즘


동질 사회의 디폴트였던 백인 남성에게는 다양한 인종/성별과 나란히 서있는 그림 자체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하락한 위상을 나타낸다. 이들은 더 이상 보편적 개인의 상징이 아니다.


  포퓰리즘은 ‘포퓰리즘 국면’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포퓰리즘 국면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통합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 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되는데, 이와 같은 포퓰리즘 국면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발생했다. 그러나 오늘날 포퓰리즘 국면의 특별한 점은 다원화가 포퓰리즘 국면을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사회적 홈리스 상태가 곧 감정적 홈리스 상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좌파 대중 정당이 일종의 “분노 은행”으로 작동한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좌파 정당에 맡겼고, 정당들은 사람들의 예금을 관리하고 키우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모든 정당과 모든 감정에 확장하여 적용할 수 있다. 정당이란 곧 감정 은행이다. 사람들은 자주 정치에서 감정의 중요성을 망각한다.


  감정의 중요성을 망각한 사람들은 포퓰리즘적 국면을 이성적 계몽으로 해결하려는 전략적 오류를 저지른다. 앨버트 허시먼은 갈등을 나눌 수 있는 것과 나눌 수 없는 것으로 구분했다. 예를 들어 자원 분배의 문제는 나눌 수 있는 갈등이지만, 가치 분배의 문제는 나눌 수 없는 갈등이다. 이 두 가지 갈등은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정치에서는 이 갈등들을 항상 같이 다루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에 근거한 복지 국가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민주의 복지 국가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복지를 통한 인간다운 삶의 보장은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제시해준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 제 3의 길이 등장한 이후에 복지국가들은 더 이상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았고, 직업훈련을 통해 시장경제에 사람들을 재진입시키는데 힘썼다. 이는 곧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다시 말해 “나눌 수 없는 갈등”의 문제를 사민주의가 외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포퓰리즘적 국면에서 사람들은 예전의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 받는다고 느끼며, 특히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은 정체성의 위협과 경제적 위협이라는 이중의 위협을 받게 된다.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나눌 수 없는 갈등”이라는 지점을 파고들어 상처받은 자들의 변호인 역할을 자처한다. 백인 노동자 계급의 남성들은 외국인 노동자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으며, 예전과 같은 동질 사회의 정체성도 누리지 못하게 된다. 우파 포퓰리즘은 동질 사회의 환상을 회복시켜 민족에 기반을 둔 단일한 정체성을 복구시키려 한다. 하지만 ‘복구’라는 것은 ‘상실’이 선행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동질 사회의 복구 시도 자체가 동질 사회가 끝났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전통적 민족 개념에 부합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강제로 제거하고 배제함으로써 백인 노동자 계급의 감정을 자극한다.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칼 슈미트의 정치에 대한 정의에 따라, 우파 포퓰리스트들은 위로는 기존 엘리트를, 아래로는 외국인을 적으로 삼고 본인들이 하층 계급의 유일한 친구라고 주장한다.


5. 다원주의에 대한 좌파의 방어: 정치적 올바름


‘트리거 워닝’은 어떤 컨텐츠가 사소한 폭력성이라도 포함할 경우, 경고를 통해 트라우마 자극을 방지하는 것이다. 이는 책, 영화, 그리고 대학교의 강의에도 적용된다.


  미셸 푸코는 역사를 주피터 역사와 반주피터 역사로 구별했다. 주피터 역사는 권력과 영광을 갖춘 영웅이 숭배되는 사회다. 반대로 반주피터 역사는 권력에 대항하여 억압받는 자, 굴복된 자, 희생자가 중심이 되는 포스트영웅주의 사회다. 영웅주의 사회였던 냉전 시대의 질문이 “너는 어느 편인가?”였다면, 포스트영웅주의 사회인 탈냉전 시대의 질문은 “너는 누구냐?”이다. 그리고 포스트영웅주의 사회에서 피해자는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된다. “내가 피해자다”라는 선언은 곧 주체성 회복과 연결되며, 이러한 선언은 페미니즘부터 반인종주의까지 해방으로 가는 왕도로써 여겨졌다.


  피해자의 지위를 재정립하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법적 평등을 위한 정치적 싸움을 “도덕적 개혁주의”를 위한 싸움으로 바꾼다. 또한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는 좌파들은 싸움의 초점을 불의로부터 상처까지 확장하며, 이를 통해 상처받기 쉬운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을 그들의 핵심으로 삼는다. 우파 포퓰리즘이 다원주의 사회에서 백인 노동계급의 감정을 대변하려 했듯이, 정치적 올바름 역시 소수자 집단의 감정을 대변하려 한다. 그러므로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은 고도화된 민감성을 내세우며 평등 관념을 이기주의, 자아 중심주의, 나르시시즘으로 전도시킨다. 피해자의 지위는 정치에서 전략적 장점이 되며 우선권과 도덕적 우월을 얻는 수단이 된다. 또한 소수자들의 위태로운 정체성을 다원주의 사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문화적 분리주의를 주장하며, 정체성이라는 방호벽 뒤로 후퇴한다. 최근 미국에서의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 논쟁은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늘날 좌파의 방어 전략인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는 세 가지 비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우파의 비판이다. 우파는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 문제를 과장하며, 좌파들의 표현 독재를 타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우파는 르상티망의 빗장을 풀어 인터넷 공간에서 금기시 된 발언들을 마구잡이로 할 수 있게 만든다. 또한 이때 백인 이성애자 남성들은 좌파들의 정치적 올바름 전략을 뒤집어 자신들을 ‘피해자 중의 피해자’로 여기면서, 좌파의 표현 독재에 대항하는 영웅으로써의 정체성을 얻게 된다. 이것은 좌파의 전략에 대한 완벽한 전용일 뿐 아니라 포스트 영웅주의 시대의 전용이다. 실제로 사회적 관심이 정치적 올바름에 따라 정해진다면, 경제적 관심과 사회적 관심의 측면 모두에서 백인 남성들은 가장 아래에 위치한다. 이러한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반발은 슬라보예 지젝이 <정체성에 관한 문제들(Troubles with Identity)>이라는 글을 통해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백인 남성들이 자신의 보편적인 정체성을 포기한 채, “백인/이성애자/남성이 아닌 너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해”라고 말하며 정치적 올바름의 수사법을 그대로 들고 반격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 비판은 마크 릴라와 같은 자유주의자의 비판이다. 릴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라는 우파의 비판을 그대로 수용한다.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특수한 의제에 집중하지 말고, 자유주의가 애초에 주장했던 보편주의를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문제는 릴라가 1세대 개인주의에서 자유주의가 이룬 보편성이 남성, 백인, 이성애자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환상이 “정치적 올바름만 없다면 다시 조화로운 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라면, 릴라가 가진 환상은 “정치적 올바름만 없다면 보편적 시투아앵의 사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릴라의 주장에 따라 시투아앵 중심의 보편성을 회복하려면 ‘동질적이지 않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보편성을 어떻게 다시 규정할 것인 지’부터 고민해야 한다.


  세 번째 비판은 계급을 중시하는 좌파의 비판이다. 계급 중심적 좌파들은 계급투쟁보다 정체성 정치가 우선시되는 현재의 상황을 고발한다. 이 과정에서 좌파는 우파 포퓰리즘의 주장을 일부 수용하는데, 그것은 자유주의 문화가 노동자의 대립하는 엘리트의 기획이라는 것이다. 좌파는 계급투쟁이라는 잃어버린 환상, 통일된 좌파라는 환상을 구원하려 한다. 그들의 환상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 올바름만 없었다면 우리는 완전한 좌파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나눌 수 있는 갈등”과 “나눌 수 없는 갈등”을 명확히 분리할 수 있다는 부당 전제를 가지고 있다. 3세대 개인주의 사회에서 문제는 언제나 감정, 감정, 그리고 감정이다. 좌파들은 우파 포퓰리즘이 경제적 문제뿐 아니라 백인 노동자 계급의 소외된 정체성을 공략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고, 애초에 계급 역시도 하나의 정체성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6. 좌파 포퓰리즘의 가능성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이 가져온 두 가지 교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체성이 만드는 전선을 거부하고 경제적 문제만 제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둘째, 포퓰리즘 국면을 이성적인 계몽으로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파 포퓰리즘에 대항한 좌파 포퓰리즘은 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정치 투쟁은 이념적일 뿐 아니라 감정을 동력삼아 움직인다. 그리고 감정의 충전은 언제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좌파 포퓰리즘이 가능하려면 위의 질문에 대한 보편적인 관념, 하나의 ‘국민’에 준하는 정체성 개념을 생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파 포퓰리즘이 그러했듯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보편성을 지향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파 포퓰리즘도 자신의 전선에서 누구를 적으로 규정할지를 선택해야 한다. 아울러 포퓰리즘은 적대자 규정 이외에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할 긍정적인 대상을 요구한다. 우파 포퓰리즘의 경우 이 대상은 민족이었다. 그들은 민족을 중심으로 뭉치려 하고, 민족에 부합하지 않는 구성원들을 적대시한다. 그러므로 좌파 포퓰리즘 역시 긍정적인 방식으로 지지자들의 감정을 다루는 정치가 필요하다.


  샹탈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등가 사슬”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는데, 이는 ‘대중’이라는 개념을 구성하여 계급 문제를 비롯한 진보적 의제들을 엮어 헤게모니 투쟁을 추진하는 전략이다. 무페의 기획이 카림의 분석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정체성보다 우선시되는 보편적 대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7. 징후적 질문: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포퓰리스트로 불릴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나 국민을 걱정해왔기 때문이다.”(출처: Snufkin Och My 유튜브 채널)


  책의 결론부에서 이졸데 카림은 요즘 들어 부쩍 회의주의자가 된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인용하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일종의 페티시이며, 과대 선전을 불러온다고 말한다. 따라서 카림은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카림이 언급했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정치가인 레닌의 것이었으며, 그 대답은 ‘의식적인 행동’에 대한 안내를 담고 있었다. 카림은 철학자로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룬 채 ‘미네르바의 올빼미’의 역할에 만족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좌파적 정치 운동에 대해서 고민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갈리아의 수탉’이 되어야 한다. 비록 ‘과대 선전’ 혹은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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