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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Oct 30. 2017

잡캐의 진화, 프로토타이퍼

조금 더 행복한 잡캐가 되어볼 참이다

회사 후배와 메신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하고 싶은 일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하이퍼 아일랜드에 온 가장 큰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80일이 지난 지금, 파운데이션, 브랜딩 모듈을 지나 UX 모듈을 듣고 있다. 다양한 분야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영감을 받았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언도 구했다.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일을 과연 얼마나 찾았을까. 



잡캐의 탄생


본격적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왜 이렇게 방황하는지에 대한 이유부터 이야기해보자. 나는 맥가이버 칼 같다. 기획, 디자인, 개발 다 조금씩은 할 수 있다. 디자이너, 개발자만 있는 곳에서는 기획자 역할, 기획자, 디자이너만 있는 곳에서는 개발자 역할, 기획자, 디자이너만 있는 곳에서는 디자이너 역할을 했다. 쉽게 말해 이거 저거 다 할 수 있지만,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는 잡종 캐릭터, 흔히 말해 잡캐다. 


말하자면 길다. 그동안 해온 일을 읊어보자. 대학에서 심리학과 경영학을 전공했고, 광고/소비자 심리학, 브랜딩, 광고 기획을 중심으로 공부했다. 여기까지는 일관성이 있었다. 문제는 광고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지원할 때 직무 설명을 잘 못 읽었다. 디지털 콘텐츠 "기획"인 줄 알았는데, 붙고 보니 디지털 콘텐츠 "기획 및 개발"이었다. 괜찮겠지?


첫 명함을 받았다. 직무에 "사원"이라고 적혀있다. 동기들 명함을 봤다. Account Executive, Art Director, Copywriter 등 아주 휘황찬란하다. 팀에 배치받은 첫 달, 나는 디지털 신사업 기획과 신규 제작 VR 콘텐츠 QA 일을 했다. 잠들었던 재무 책을 꺼내어 재무제표 읽는 법을 익히고, VR이 뭔지 알기 위해 하루 종일 구글을 붙잡고 있었다. 시간이 생기면 코딩 공부도 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2년 정도 일하면서 일에 적응을 할 무렵, 팀이 없어졌다. 나는 디지털 크리에이티브 팀으로 가기로 했다. 새로 받은 명함에 처음으로 직무 이름이 생겼다. 크리에이티브 디벨로퍼. 기존에 없던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라고 하셨다. 신기술 리서치도 하고, 아이데이션도 실컷 하고, 프로토타입도 종종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정체성은 흐려졌다. 내가 이걸 하려고 광고 회사에 온 걸까?



하고 싶은 일


'하고 싶은 일'은 뭘 의미하는 걸까. 타인의 시선, 수입, 명예, 안정성, 미래 그 모든 걸 떠나서 내가 정말 빠져서 하루 종일 설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어느 정도 타인의 시선도 신경 써야 하고,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정도의 수입은 있어야 한다. 당연히 재능과 적성도 중요하다.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도 못 벌면서 뮤지션을 할 수는 없으며 디자인이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능력도 없는데 디자이너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하고 싶은 일'이란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타인에게 명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선에서 적성도 맞고, 능력도 어느 정도 있으며, 나름 좋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잡캐가 되었다. 어느 정도 돈도 벌고, 어느 회사에 다닌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적당히 적성도 맞고, 나름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말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말한다. 


하루 24시간 중에 가장 중요한 8시간을 온전히 바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설레는 일이라면, 다른 자극은 절대 필요하지 않다. 그 일이 한없이 깊고 새로운 것을 계속 발견하게 하며 오르지 못한 높은 산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음을 깨우쳐 준다면, 손대지 않은 광맥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 같은 흥분을 준다면 기분 전환이나 속풀이 등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생각해보면 내 기준은 모두 밖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타인의 기준이 '하고 싶은 일'을 정하는데 쉽게 껴들어왔다. 회사를 그만두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이 뭘까. 남이 원하는 내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는 누굴까. 잘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잘하고 싶은 건데.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스톡홀름으로 떠나기 전, 네이버 인큐베이션 스튜디오의 성준 님을 만났다. 한참 동안 내 이야기를 듣다가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좋지만 일단 하나에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해주셨다. 모든 걸 잘하면 당연히 좋지만, 모든 걸 잘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칼, 가위, 손톱깎이가 나타나면 맥가이버칼도 쓸모 없어지는 것처럼. 그럼 어디에 집중하면 좋을까. 어느 칼날을 갈아볼까.


텅빈 아트 보드만 보면 모든 생각이 사라진다


예전 글에서 말했지만, 나는 늘 만드는 사람을 동경했다. 하이퍼 아일랜드에 다니면서 개발자든 디자이너든 뭐든 손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브랜딩 모듈에서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어 로고를 그리기에 도전했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옆에 있는 친구들은 이렇게도 그리고, 저렇게도 그려보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하얀색 텅 빈 아트보드를 멀뚱멀뚱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었다.


대신 나는 로고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전달할까. 어떤 이야기가 적합할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면 좋을까. 그리고 이 생각을 실제로 만들어볼 기회가 생겼다. 브랜딩 모듈 마지막 주, 인더스트리 리더에게 새로 만든 매니페스토를 영상으로 만들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매니페스토를 쓴 팀원과 작업에 착수했다. 기획부터 스토리보드, 촬영, 녹음, 편집까지 마치 오래전부터 해온 일처럼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완성한 매니페스토 영상을 보여주었다. 다른 팀원들은 물론 클라이언트도 대만족. 이 경험 덕에 자신감이 생겼다. 나는 단지 그래픽에 강한 디자이너가 아니었을 뿐이다. 스토리를 만들어 로고에 숨을 불어넣고, 경험을 디자인해서 브랜드가 살아 움직이게 만들고,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 이게 앞으로 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감을 준 사람들


추상적으로는 알겠는데 구체적으로는 뭘 해야 할까. 많은 이의 강의를 듣고 조언을 받으면서 영감을 받았다. 먼저 브랜딩 모듈 인더스트리 리더 스타이너(Steinar Danielsen). 그는 스웨덴의 이노베이션 에이전시 Above에서 서비스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고, 인터페이스로서 브랜드라는 강의를 진행했다. 만들어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사용자와 만나는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커뮤니케이션할지, 어떤 경험을 제공할지에 대한 강의였다. 그는 디자인이 그냥 예쁜 무언가를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자 경험 전체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전체론적 접근법이라고 말했다. 


그다음은 UX 모듈 인더스트리 리더 하파엘(Rafael Coimbra). 그는 스웨덴의 헬스케어 스타트업 Lifesum에서 UX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는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하이퍼 아일랜드를 거쳐 UX 디자이너가 되었다. 나는 그에게 개발자에서 디자이너가 되는 일이 어렵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오히려 코딩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UX 디자이너로서 강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전히 코딩으로 프로토타입을 만든다고 말했다. 너저분한 코드기 때문에 프로덕션에 사용할 수는 없지만, 실행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는 충분하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리액트.js로 간단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라고 조언했다. 


마지막으로 UX 모듈에서 프로토타이핑 워크숍을 진행한 로렌(Lauren Shapiro). 뉴욕에 있는 프로덕트 디자인 에이전시 Work & Co에서 디자인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Work & Co는 내가 꽤 오랫동안 눈여겨봐왔고, 일해보고 싶었어서 커리어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것들을 물어보았다. 나는 디자이너, PM, 개발자 중간에 서 있는 나의 애매한 커리어를 설명하며,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프로덕션 코드를 쓸 수 없기 때문에 개발자는 될 수 없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코딩 스킬을 프로토타입을 디자인하는 데 사용한다면 디자이너로서 강점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프레이머 js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프로그램 매니저와의 면담


하이퍼 아일랜드는 총 두 번, 프로그램 매니저와 개인 면담을 실시한다. 프로그램은 어떤지, 반 친구들과는 잘 지내는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어려운 건 없는지 확인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진행한다. 우리 반에는 두 명의 프로그램 매니저가 있다. 하나는 얼마 전 소개한 크리스토퍼 로빈(Christopher Robin), 또 다른 하나는 요한 에릭슨(Johan Eriksson)이다. 둘 다 스타일이 조금 다른데, 지금은 확실한 이야기가 필요했기에 나에게서 답을 찾도록 도와주는 크리스토퍼보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요한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자기계발 피자. 한 칸은 혹시 몰라 비워놓았다


면담은 자기 계발 피자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묻는 것으로 시작했다. 자기 계발 피자는 자기 계발에 사용되는 도구이다. 먼저 원을 8조각으로 나눈다. 각 칸에 소프트 스킬과 하드 스킬 중 자기가 이 학교를 다니면서 이루고 싶은 것을 적는다. 그다음 현재 어느 수준이고, 졸업할 때 어디까지 하고 싶은지를 칸에 색을 칠해 표시한다. 단, 한 칸은 비운다. 새로운 것을 접하다 보면 새로운 목표가 추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세 개의 피자를 그렸다. 첫 번째는 하드 스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일러스트레이터, 포토샵, 스케치, 애프터 이펙트, 자바스크립트 등 새로운 툴로 칸을 가득 채웠다. 반 친구들과 각자 그린 피자 파이를 설명하며 피드백을 주고받는 시간이 있었다. 소프트 스킬로만 모든 칸을 채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디자인 스킬, UX 스킬 등 포괄적으로 칸을 채운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그린 피자 파이는 욕심만 가득한, 비현실적인 목표로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받은 피드백을 기반으로 새로운 피자를 그렸다. 이번에는 소프트 스킬과 하드 스킬을 적절히 섞었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들은 제외했다. 브랜딩 모듈이 끝나고 세 번째 피자를 그렸다. 그래픽 디자인에 흥미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에 관련 디자인 툴은 제외했다. 대신 글쓰기와 사진을 추가했다. 블로그와 잡지에 꾸준히 사진과 글을 쓰고 있고, 조언해줄 사람이 많은 이 곳에서 확실히 그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파와 로렌이 조언해준 대로 프로토타이핑할 수 있는 툴을 추가했다. 


요한은 한참 내 이야기를 듣더니 지금까지 잘하고 있고, 존재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피드백 주었다. 그러면서 해외에서 인턴을 구하려면 업계 사람들과 네트워킹을 최대한 많이 하라고 알려줬다. 메일도 보내고, 사무실도 찾아가고, 커피도 얻어 마시고, 포트폴리오 피드백도 받고 등. 또한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신하는 시대에서 나는 어떤 강점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특히 내가 가진 공감 능력을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가 열쇠가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잡캐의 진화, 프로토타이퍼


나는 프로토타이핑에 집중하기로 했다. 프로토타입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기로 했다. 이른바 프로토타이퍼. 이를 위한 세 가지, 먼저 휴먼 컴퓨터 인터랙션과 사용자 경험 디자인 이론 공부. 한국에서 가져온 <어바웃 페이스>를 기본으로 Udacity의 휴먼 컴퓨터 인터랙션 코스와 다른 인터넷 코스를 들어볼까 한다. 언제나 기본은 이론이다. 어떤 이론이 있는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는지, 주요 논점이 뭔지 이해해야 그다음이 의미가 있다. 


인터랙티브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는 프레이머 js


그다음은 프레이머 js. 프레이머 js는 커피스크립트 기반의 프로토타이핑 툴이다. 인비전, 어도비 XD 등 뛰어난 그래픽 기반 프로토타이핑 툴이 이미 많은데 굳이 프레이머를 고른 것은 스케치처럼 디자인도 가능하면서 함수 구현, JSON 데이터 불러오기 등 오브젝트 지향 프로그래밍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이다. 덕분에 정교하고 실제 결과물에 가까운 프로토타입을 만들 수 있다. 디자인도, 코딩도 적당히 할 수 있는 나에게 적합한 툴이다. 


마지막은 리액트.js. 리액트.js는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만드는 자바스크립트 라이브러리다. 내가 지금부터 코딩을 열심히 공부한다 해도 내 얼기설기한 코드를 실제 프로덕트에 바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코드에 서버를 붙여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개발자와 직접 이야기하면서 실제 프로덕트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디자이너와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야 방향이 조금 보인다. 할 일이 많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어떤 타이틀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하루 종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집에 오면 실제로 만들어본다. 손이 바쁘고, 눈이 바쁘다. 반복이 지루하지 않다. 평소처럼 다른 생각할 틈이 없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이거구나 싶다. 느낌이 좋다. 작가이자 예술가인 에밀리에 왑닉은 TED 강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수많은 열정을 받아들이세요. 여러분의 호기심을 따라 토끼굴로 내려가십시오. 교차점을 탐험하십시오. 내면의 길을 수용하는 것은 더 진실되고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세계가 우리 다능인(Multipotentialite)을 필요로 합니다.


잡캐로 시작했고, 잡캐로 끝날 운명이지만, 조금 더 행복한 잡캐가 되어볼 참이다. 



+ 디자인 매거진 CA에서 <하이퍼 아일랜드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시작했습니다. 근처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파운데이션부터 브랜딩, UX, 인턴십 등의 하이퍼 아일랜드의 생생한 체험 이야기가 담길 예정입니다. 11-12월호에는 1부 파운데이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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