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디자인 스쿨 하이퍼 아일랜드 유학 이야기 #9
어느새 연말이다. 하이퍼 아일랜드 여정도 절반이 지났다. 숨 가쁘게 달려온 5개월이었다. 모두에게 2주간의 방학이 주어졌다. 나는 숨도 고르고 중간 점검도 할 겸 한국에서 그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디에서 출발해서 어디까지 왔을까.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배웠을까. 유학은 옳은 결정이었을까.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은 찾았을까. 어차피 비행기 안이라 시간도 많은데 하나씩 훑어보기로 했다.
학교에서는 실제 클라이언트와 리브랜딩, 웹사이트 사용자 경험 개선, 인터랙션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브랜딩 모듈에서는 브랜드 전략을 짜고, 카피를 쓰고, 영상을 만들었다. UX 디자인 모듈에서는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유저 테스팅을 진행했다. 익스피리언스 디자인 모듈에서는 아두이노와 프로세싱을 연동한 인터랙션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저녁과 주말에는 다양한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브런치와 디자인 매거진 CA에 글도 쓰고, 공연도 하고, 여행 스냅사진도 찍고, 뮤직비디오도 만들었다.
이런저런 시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 속에서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도 찾았다. 탐색은 끝났다. 이제는 더 다양한 경험과 반복 숙달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년에는 더 많은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 다양한 형태의 인터랙션도 만들고, 정교한 프로토타입도 만들고 싶다. 이와 별개로 시간이 나면 글도 더 자주 쓰고, 출사도 종종 나가고, 영상도 몇 개 더 만들고 싶다. 욕심은 금물이다. 작은 프로젝트부터 하나씩 차근차근히 해나가야지.
하이퍼 아일랜드가 디자인 스킬을 알려주는 학교는 아니기 때문에 집에 오면 항상 컴퓨터 앞에 앉아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인터랙션 디자인 공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포토샵, 일러스트레이터 대신 UX 디자인 이론, 스케치, 프레이머, 프로세싱, 자바스크립트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배운 내용을 실제 프로젝트에 써보면서 실습을 진행했다.
디자인은 여전히 어렵다.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은 더듬거리고, 어수룩하고, 굼뜨다. 하긴 남들이 몇 년 동안 꾸준히 해온 걸 5개월 만에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면 뭐가 달라졌을까. 디자인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뭐든 만들어보고 싶고, 시도해보고 싶다. 방법이야 찾거나 물어보면 된다. 서툴면 뭐 어떤가. 처음부터 완벽할 수는 없다. 실패가 쌓여 경험이 되고, 경험이 모여 실력이 되는 거 아닌가.
한국을 떠나기 전 가장 큰 걱정 중 하나는 커뮤니케이션이었다. 언어는 물론이고 행동, 손짓, 표정, 유머 등 모든 게 다를 텐데 그 속에서 나는 얼마나 자유롭게 내 의견을 전달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잘살고 있다. 26개국에서 온 65명의 친구와 함께 부대끼면서 때로는 웃고, 때로는 부딪히면서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문법은 엉망에, 발음은 꼬이고, 여전히 더듬거리지만 말이다.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가 그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건 아니었다. 말을 유창하게 한다고 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잘하는 건 아니다. 잘 듣고, 잘 말하면 된다. 영어 못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이해한 척 넘어가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내가 이해할 때까지 듣고, 상대가 이해할 수 있게 명료하게 말하면 된다. 영어는 여전히 어렵고, 다른 나라 문화도 여전히 생소하다. 하지만, 조금 더 지내면서 애쓰다 보면 자연스레 해결될 것 같다.
한국을 떠나기 전 외국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꽤 걱정했었다. 언어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데, 대체 무슨 이야기가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차이 덕분에 이야기를 시작했고, 서로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법을 배웠다. 지금은 서로 고민을 나누고, 영감과 자극을 주고받는 든든한 사이가 되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외면하지 않는다. 서로 돕고, 조언을 주고받는다. 전 세계에 지원군이 생긴 기분이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다 같이 모여 각자 집에서 만들어온 음식을 나눠 먹기도 하고, 친구 집에 모여 소소한 파티를 즐겼다. 이브 점심에는 스웨덴 친구 집에서 선물을 교환하고, 저녁에는 같이 교회에 가서 크리스마스 미사를 지켜봤다. 온기 가득한 시간들이었다.
남은 절반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까. 하이퍼 아일랜드는 이제 비즈니스 모듈, 개인 프로젝트, 인턴십을 남겨두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게 될까. 누구와 일하게 될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분명 쉽지는 않을 것이고, 종종 힘도 들 것이다. 분명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설레고, 기대가 앞선다.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해왔기 때문에, 남은 시간들도 이 페이스를 유지해 나가고 싶다. 졸업하는 그 날까지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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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자인 매거진 CA에서 <하이퍼 아일랜드의 기록>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1-2월호에는 브랜딩 모듈에 대한 이야기가 담았습니다. 근처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