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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Nov 13. 2017

하이퍼 아일랜드에서 보낸 첫 달

스웨덴 디자인 스쿨 하이퍼 아일랜드 유학 이야기 #8

디자인 매거진 CA에 실린 하이퍼 아일랜드의 기록 1부 파운데이션의 일부입니다.

전문은 CA 2017년 11-12월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주 차, VISION WEEK


2주 차는 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비즈니스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다. 이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찾는다. 예컨대, 우리는 종종 디지타이제이션(Digitization)과 디지털 라이제이션 (Digitalization)을 같은 개념으로 착각한다. 둘 다 디지털화로 번역할 수 있지만, 의미는 각각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문제를 표면적으로 바라본다. 이를테면, 냉장고나 전자레인지에 스크린을 붙이는 식이다. 후자의 경우는 더욱 근본적인 영역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해야 사용자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사용자를 먼저 봐야 한다. 사용자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기술을 어떻게 이해하고 활용하는지 등에 대한 관찰이다. 


버튼만 누르면 즉시 생필품을 주문할 수 있는 아마존의 대시 버튼(Dash Button)은 그 좋은 사례이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이 기기는 평소 자주 사용하는 생필품에 붙여 두었다가 잔여량이 부족할 때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자동으로 주문이 접수되어 즉시 배달되는 시스템이다. 2015년 3월, 출시 당시 많은 사람은 이를 만우절 장난 아니야? 라며 비웃었다. 하지만 아마존은 고객의 주문까지도 단순화하여 자동화시켰고, 사용자들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기마다 고유한 물품 코드의 사용자 정보가 내장되어 이 모든 사용자 요구를 원클릭으로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O2O 비즈니스를 대표하는 제품이 되었다.


인류가 수렵 사회에서 농경 사회로 진입한 이래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교실만 한 컴퓨터가 책상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아지기까지 38년이 걸렸지만, 손바닥 위로 올라가기까지는 12년밖에 안 걸렸다. 요즘은 말할 것도 없다. 얼마 전까지 빅 데이터와 가상현실이 세상을 바꿀 것 같더니 어느새 머신러닝, 증강현실, 인공지능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금방 도태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어떻게 해야 이 속도에 대응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동안 기술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는 사이 기술은 달려가기 바쁘고, 인간은 뒤처지기 바빴다. 이 관점에서는 인간이 기술을 쫓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관점을 바꿔보면 그 반대가 된다. 모든 기술은 인간의 필요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기술은 인간 행동에 영향을 주고, 다시 기술에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보면 기술은 인간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술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기술이 아니라 역으로 인간 행동 변화를 관찰해야 한다.



3주 차, INNOVATION WEEK


3주 차는 아이데이션, 콘셉트 개발, 프레젠테이션 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는 다른 과정의 학생 5명과 한 팀을 이뤄 작은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UN 지속 가능 개발 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17개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에 맞는 문제를 도출하여 솔루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게 과제였다. 전체 과정을 도와주는 퍼실리테이션은 팝업 에이전시(The Pop Up Agency)가 맡았다. 이 회사는 하이퍼 아일랜드 졸업생들이 모여 만든 크리에이티브 에이전시로 48시간 안에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개념으로 컨설팅과 워크숍 서비스를 제공한다. 나를 하이퍼 아일랜드로 이끈 회사이기도 하다. 2015년 6월, 칸 광고제에서 만난 그들은 확고하고 똑똑하고 열정이 넘쳤고, 순간 나를 세상으로 건져 올렸다.


팀 빌딩

나는 스웨덴, 노르웨이 친구들과 한 팀을 이루었다. 일단 팀 빌딩부터 시작했다. 팀 빌딩은 여럿이 팀을 이루어 진행하는, 업무나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일종의 조직개발 기법이다. 먼저 팀원들이 각자 자신을 간단하게 소개한 다음 다 함께 마시멜로 챌린지를 진행했다. 이는 스파게티 면, 테이프, 끈만 가지고 마시멜로를 가장 높이 세우는 워크숍이다. 우리 팀은 설계하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써서 마시멜로를 제대로 세워보지도 못하고 끝냈다. 무엇이 좋은 설계인지 고민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는 행동으로 과정을 하나씩 해보면서 시행착오를 겪어 나가는 게 훨씬 낫다는 걸 깨달았다. 팀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음 순서로, POD(Point of Departure) 문서를 작성했다. POD는 팀의 목적, 희망하는 결과, 타깃, 역할, 규칙 등 운영 방식을 규정한다. 다시 말해 팀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출발점이 되는 문서다. 우리 팀은 수평적인 조직을 지향하고, 의사결정은 민주적인 토론으로 정하며, 역할은 따로 없고, 많이 배우는 것을 목표로 즐겁게 하자는 식으로 적었다. 이 얼기설기한 논의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예측하지도 못한 채.


아이데이션

팀별로 주제와 핵심 문제를 도출한 후 본격적인 아이데이션을 진행했다. 아이데이션은 세 가지 워크숍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아이디어 스피드 데이팅(Idea Speed Dating). 흰 종이로 덮인 큰 테이블 중앙에 핵심 문제를 적어 놓고,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아 5분간 각자 해결책을 적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왼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다른 사람이 적은 아이디어에 약 2분간 보충한다. 이 방식으로 한 칸씩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한 바퀴를 다 돌면 끝난다. 짧은 시간에 다양한 관점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이 방법은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해준다. 


두 번째는 의사 결정. 테이블 위에 팀원들이 적어 놓은 아이디어 중 개인이 좋아하는 아이디어 한두 개를 뽑아 포스트잇에 옮겨 적는다. 그런 다음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디어를 발표하고, 논의를 통해 그 아이디어 중 임팩트와 실행 가능성이 큰 아이디어를 최종 선정한다. 


마지막 단계는 아이디어 트윗. 최종 선정된 아이디어를 140자로 요약해서 설명하고, 이모티콘 6개로 사용자 경험을 표현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해하기 쉽도록 아이디어의 핵심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게 중요하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더욱 단단하고 명쾌하게 만들어준다.


결과

우리 팀은 개발도상국의 정신 건강을 핵심 문제로 잡았다. 아이디어 스피드 데이팅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덕분에 괜찮은 아이디어 몇 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의사결정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아이디어 하나를 정하기 위해 논의하다가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그 여러 가지를 섞기로 한 것. 그렇게 아이디어 트윗 단계로 넘어가니

명료하게 요약할 수 없었고, 모든 아이디어를 뭉뚱그린 모호한 트윗이 되었다. 


그다음 하루는 이 트윗을 바탕으로 3분짜리 영상을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은 말 그대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POD에서 역할도 제대로 정의하지 않았고, 무엇을 만들지 불명확하다 보니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사소한 의사결정조차 10분을 잡아먹다 보니 시간이 무한정 늘어졌다. 결국, 새벽 2시가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발표가 끝난 후 자기반성과 피드백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프로세스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다음 팀 프로젝트는 제대로 해야지. 하이퍼 아일랜드에서는 이렇게 배우는 거구나 싶었다.


의심은 잠시 거두고 프로세스를 믿어보자


시리즈 순서


1부: 파운데이션 (CA #235, 2017.11-12월호) 

2부: 브랜딩 모듈 (CA #236, 2018.01-02월호) 

3부: 유저 익스피리언스 모듈 (CA #237, 2018.03-04월호) 

4부: 익스피리언스 디자인 모듈 (CA #238, 2018.05-06월호) 

5부: 비즈니스 모듈 (CA #239, 2018.07-08월호) 

6부: 인턴십 (CA #240, 2018.0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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