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역습>을 보이는 대로 읽다
연휴만 되면 친구와 연희동 책바에 간다. 위스키 한 잔 하며 책을 읽는다니, 낭만적이지 않은가. 아니라고? 책 읽는데 무슨 술이냐고? 질문을 바꿔보자. 책바는 서점일까 바일까? 책을 팔고 있으니 서점이다. 술도 팔고 있으므로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서 술을 주문하고 책을 읽는다. 그럼 도서관인가? 아니면 카페인가?
무언가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으니 둘 다 맞고, 둘 다 아니다. 이렇듯 우리의 상식으로 책바를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책바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츠타야서점, 땡스북스, 최인아 책방, 철든 책방, 유어 마인드 등 책을 팔지만 책만 파는 곳은 아닌 서점들. 이제 동네 서점의 고정관념을 바꿀 시간이다.
저자 우치누마 신타로는 시모기타자와에서 B&B를 운영하고 있다. B&B는 책과 맥주의 앞 글자를 따 만든 책방이자 펍으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책맥 트렌드의 원조격이다. 그는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한다. 스스로를 북 코디네이터라고 부른다. 이 책은 책의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그는 이 책에서 출판 업계가 아닌 책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출판업계의 사정이 아닌 독자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책을 파는 공간인 서점이 아닌 책과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을 매개하는 책방을 말하고 있다. 그의 관점에서 위에 언급한 모든 곳은 단순히 책을 파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책의 만남을 매개한다는 점에서 서점보다 넓은 의미의 책방인 셈이다.
책 소개를 간단히 했으니, 이제는 문장 몇 개를 살펴볼 차례. 늘 그렇듯 내 마음에 와 닿은 문장이기 때문에 책과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책 내용과 다른 문장들이 궁금하면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어보자.
창작자는 지속해서 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문장. 너무 훅 들어와서 가져왔다. 저자는 뮤지션이 꿈이었다. 그러나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했다. 그는 이제 알고 있다. 정말로 뮤지션이 되고 싶은 사람은 재능 없음과 자신감 부족에서 오는 끊임없는 좌절과 갈등을 극복하면서 꿈에 다가간다는 것을. 당연한 말이다.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 말이다. 나는 몇 년을 창작자라고 주장했다. 나는 지속해서 하는 사람인가? 고민은 하는데 실행은 안 한다. 이리 재고 저리 재다 보면 어느새 짜게 식는다. 그러고는 빠르게 합리화한다. 여우가 신 포도 보듯한다.
올해부터는 창작자가 되자. 지속해서 하는 사람이 되자. 얼마 전 페이스북 코리아에서 본 포스터 문구가 눈앞을 아른거린다. Done is better than perfect. 무작정 뭘 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HUGE 슬로건처럼 사랑하는 걸 만들고(Make something you love) WeWork 슬로건처럼 사랑하는 일을 하는(Do what you love)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
어떤 베스트셀러라도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성과 만날 때를 상상해 보세요. 결혼상담소처럼 스펙을 열거해서 당신과 맞을 것 같다고 소개받은 사람보다 우연히 술집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과 훨씬 사이가 좋아지지 않습니까? 어차피 모르니까 때로는 우연히 만나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묻는다. 책 좀 추천해주세요. 무슨 책을 읽을지 모르겠어요. 아무거나 읽고 싶지는 않은데. 나는 이 질문이 세상에서 제일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책은 잘 아는데 상대가 좋아할 책은 모르겠다. 책을 골라주는 대신, 일단 책방을 가보라고 한다. 가서 책을 슥 둘러보다 눈에 들어오는 책을 들고 계산대로 가라고 한다. 아니면 그냥 베스트셀러 중에 하나 적당히 고르던가.
당신이 고른 그 책은 우연히 만난 책이 아니다. 분명 이유가 있다. 표지가 예뻐서, 제목이 좋아서, 마케팅에 속아서, 저자가 유명해서 등. 이제 책을 읽어보자.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처음부터 좋은 책을 만나기는 어렵다. 다시 책방에 가자. 같은 방법으로 책을 고르고 읽어보자. 역시나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이렇게 책을 자주 만나다 보면 내 취향을 알게 된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생긴다.
내 기준은 이렇다. 나는 우연의 힘을 믿는다. 우연을 맞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열린 마음으로 보기. 디자인, 제목, 저자, 출판사, 장르, 번역, 재질, 출판 연도, 서점 그 모든 것을 떠나서 책 내용을 살펴본다. 서문을 읽고, 목차를 본다. 궁금한 내용인가? 신선한 내용인가? 제목과 목차가 이 책의 전부는 아닌가? 뻔한 내용에 사례만 가득한 건 아닌가? 마음에 들면 바로 계산대로 간다.
책을 읽는다. 문장은 잘 읽히는데 내용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뒤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경우도 있다. 저자가 횡설수설하는 경우도 있고, 주장이 너무 복잡한 경우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선정한 올해의 책 후보에 오른다. 순위는 내 생각을 얼마나 흔들었는가로 정한다. 시간이 되면 블로그에 서평을 쓴다.
사실 나는 책을 고르는 상대방의 기준이 궁금하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종종 묻는다. 책 고르는 기준이 뭔지, 무슨 책 읽는지, 올해 읽은 책 중에 뭐가 제일 좋았는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큼 자신을 잘 말해주는 것은 없다. 따라서 취향을 묻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게 뭐라고 또 이만큼이나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간단하다. 좋은 책을 읽고 싶으면 서점에 가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면 사자. 그렇게 우연히 만난 책이 누군가 추천한 책보다 좋다. 객관적으로 좋은 책이 있지 않냐고? 있다. 다만 나는 그렇다. 에펠탑은 정말 누가 봐도 좋고 아름답지만, 파리 뒷골목에서 우연히 들른 이름 모를 빵집이 더 기억에 남는 것처럼 책도 그런 게 아닐까.
우리가 사랑해 마지않는 작은 동네 서점의 비즈니스 모델을 갱신해서 앞으로의 시대에도 유지될 수 있는 형태로 무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2011년 말에 ‘함께 책방을 하자’라고 결정하고 2012년 7월에 ‘B&B’를 열었습니다. 콘셉트는 ‘앞으로의 동네 서점’입니다.
한국의 동네 서점은 책을 팔았다. 그냥 책만 팔았다. 사람들은 책을 사러 왔다. 조금 더 싸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온라인 서점이 나타났다. 동네 서점은 가격 경쟁력에서 밀렸다. 불을 꺼보려고 도서 정가제를 시행했다. 대형서점 몇 개를 제외하고는 버틸 힘이 없었다.
동네 서점은 곧 멸종했다. 사람들은 교보 문고에 갔고, 영풍 문고에 갔다. 동네 서점의 존재가 희미해져 갈 무렵, 그 폐허 속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시작은 독립출판이었다. 몇 년 사이 독특한 컨셉의 동네 서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 서점들이 앞으로의 동네 서점일까?
질문을 해보자. 책을 팔 것인가? 취향을 팔 것인가? 경험을 팔 것인가? 책을 파는 서점은 옛날 동네 서점과 다를 바가 없다. 결말도 마찬가지. 취향을 파는 서점에서 책은 취향을 보여주는 도구다. 갤러리에 걸려있는 그림처럼, 편집 샵에서 파는 물건처럼 책 제목만 스쳐 지나가게 된다. 경험을 파는 서점에서 책은 경험 뒤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책을 읽을 수도 있지만, 책을 살지는 모르겠다.
질문을 뒤집어보자. 책을 팔면 돈이 될까? 취향을 팔면 돈이 될까? 경험을 팔면 돈이 될까? 책을 팔면 돈이 안된다. 책 팔아 번 돈으로 임대료 내기도 급급하다. 취향을 팔면 때때로 돈이 된다. 그러나 한국은 모든 게 빠르고 변덕스럽다. 앞서간다고 생각하는 순간 뒤처지기 십상이다. 경험을 팔면 그 가치만큼 돈이 된다. 그 가치가 독보적이라는 전제하에. 카피캣이 넘치는 한국에서 과연 그 가치를 지킬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만.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우후죽순 생겨난 이 서점들이 앞으로의 동네 서점이냐고?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유행처럼 반짝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런 곳은 동네 서점이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정체성과 수익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면서도 그 서점의 취향과 가치를 지속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내가 생각하는 앞으로의 동네 서점이다.
서문에서 언급한 책바가 서점인지 바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책바의 중심에는 늘 책이 있다. 사람들은 늦은 밤 책을 읽으러 책바에 간다. 자리에 앉자 주인은 안부를 묻고, 사람들은 가져온 책을 꺼낸다. 주인은 책에 어울리는 술을 한 잔 내어준다. 낮은 조명과 여유로운 술 한 잔, 음악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책과 사람이 만나는 동네 서점의 조용하고 차분한 밤이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오니까 B&B에 가자’였던 사람도 매일 이벤트를 하는 것을 알면 두 번째, 세 번째 방문 때는 ‘오늘은 B&B에 누가 올까’라고 생각이 전환됩니다. 항상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으며, 두근두근하는 장소가 역 앞에 있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면 언제라도 가면 됩니다.
2011년, 다이칸야마에 츠타야 서점이 생겼다. 새로운 서점이었다. 다양한 책이 있었다. 책만 있는 건 아니었다. 음악도 있고, 전자제품도 있고, 자리가 넉넉하고, 늦게까지 열었다. 사람들은 서점에서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고, 음악을 듣고, 밥을 먹었다. 츠타야 서점은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했다. 2016년부터 한국 대형 서점에서도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B&B를 통해 또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했다. B&B를 하나의 채널로 만들었다. 매일 쉬지 않고 이벤트를 했다. 강연도 하고, 대담도 하고, 공연도 했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사람들도 이내 이벤트가 열리는 시간이 되면 B&B를 기웃거렸다. 대형 서점은 책이 나오면 프로모션을 위해 저자 초청 강연이나 사인회를 한다. 사람들이 오게 만들어야 하니 열심히 알렸다. B&B는 그럴 필요 없이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게 만들었다.
마케팅에서는 이를 풀 전략이라고 부른다.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찾아오게 만드는 전략. 한국에서는 최인아 책방이 하고 있다. 사람들은 페이스북 페이지를 팔로우하고 소식을 기다린다. 회원가입을 하면 문자도 보내준다. 이번에는 누가 올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사람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 달의 이벤트를 기다린다. 책을 매개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게 하는 것, 앞으로의 동네 서점이 추구해야 할 방향 중 하나가 아닐까.
두근두근하는 아이디어에는 사람이 따라옵니다. 사람이 모이고 주목을 받으면 나중에는 돈도 따라옵니다.
올해 CES에서 석우형을 만났다. 회사에서도 눈이 반짝거리던 형이었는데, 지금은 그 10배 정도로 반짝거렸다. 우신이 형도 만났다. 스타트업에서 마케팅을 하고 있단다. 3년 만에 봐서 그런가 어색했다. 이 형도 눈이 반짝거렸다. 대학생 때보다 더. 상화 대표님을 만났다. 사업이 잘 안될까 걱정이 많으시단다. 그러면서 여기는 어떻게 왔냐고 껄껄 웃으셨다. 그 순간 대표님 안경 뒤로 반짝거리는 눈이 보였다. 세 사람 모두 마음이 두근거리고 있었을까.
나는 마음이 두근거리는 아이디어를 만나면 그게 내 아이디어든 남의 아이디어든 상관없이 마음이 설레서 잠이 안 온다. 대학교 때는 이런 날이 종종 있었다. 지금은 거의 없다. 회사를 다니는 2년 동안 심심했다. 그래서 올여름 스톡홀름에 간다. 사실 매일매일이 걱정 투성이다. 집은 어떻게 할지, 커뮤니케이션은 잘 될지, 인턴은 구할 수 있을지, 그래서 직업은 구할 수 있을지 등등. 딱 하나 다행인 건 마음이 두근거리고 있다는 점. 그러면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횡설수설하는 아무 말 대잔치 서평. 빠르게 요약해보면, 먼저 간결하고 쉬운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다. 최근 동네 서점 트렌드를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책의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거나 편집 관련 일을 하는 사람에게도 좋다. 책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동네 서점부터 대형 서점, 소규모 서가 등 책이 있는 곳을 둘러보자. 그것들이 조금 다르게 보일 테니.
사족. 설날 당일 저녁, 친구들과 책바에 갔다. 자리가 없어 주변을 전전하다 새벽 2시에 들어갔다. 나는 밀렸던 글을 쓰고, 친구들은 수다를 떨며 책을 읽었다. 마감할 때 즈음, 주인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세시 반쯤 책바에서 나와 택시를 탔다. 집에 오니 네시. 우리 집 근처에도 이런 동네 서점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잠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