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이 만든 가상현실 헤드셋 오큘러스 고 개봉기
새벽 2시, 페이스북 개발자 컨퍼런스 F8에서 오큘러스 고(Oculus Go)가 출시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주문하기 버튼을 눌렀다. 스웨덴에서 주문한 바람에 세금이 25%가 붙어서 미국에서 $199 하는 32GB 모델을 €219나 주고 사야 했지만, 바로 주문할 수 있는 게 어딘가 싶어서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배송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3일 만에 사무실에 도착했다. 불타는 금요일,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천천히 패키지를 열어보았다.
오큘러스 고는 페이스북이 투자한 가상현실 전문 기업 오큘러스(Oculus)가 만든 무선 가상현실(VR) 헤드셋이다. 머리에 장착하는 화면이라 하여 HMD, 헤드 마운트 디스플레이라고도 부른다. 2012년 킥스타터에 처음으로 DK1(Developer Kit)이 등장한 이래, 2016년 첫 번째 가상현실 헤드셋 오큘러스 리프트(Oculus Rift)를 정식으로 발매했고, 이번이 정식으로 발매된 두 번째 기기이다.
나는 2015년부터 2년 동안 현대자동차 WRC팀, 아이오닉 등 다양한 VR 콘텐츠를 만들었다. 코엑스 현대 모터 스튜디오 디지털에 있는 가상현실 존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덕분에 오큘러스 DK2를 시작으로 구글 카드보드, 삼성 갤럭시와 결합해서 사용하는 기어 VR 시리즈, HTC 바이브, 오큘러스 리프트,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 등을 접하면서 가상현실 기기의 기술적, 비용적 한계와 부딪혀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고, 가상현실의 보급은 여전히 멀어 보였다. 나는 가상현실 콘텐츠가 성공하기 위해서 우선 가상현실 기기가 각 가정에 한 개 이상은 보급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사람으로서 컴퓨터나 스마트폰 없이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가격 또한 감당할만한 무선 가상현실 헤드셋이 출시되는 날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2017년 10월, 오큘러스의 개발자 콘퍼런스 오큘러스 커넥트에서 오큘러스 고가 출시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지셔널 트래킹 기능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오큘러스 리프트의 기능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으며, 가격 또한 $199로 괜찮은 편이었으나 출시 전 가격을 $200 가량 올린 전적이 있었기 때문에 100% 믿기는 어려웠다. 올해 1월, 샤오미와의 파트너십을 발표하면서 그 의혹을 깔끔히 지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1일, F8에서 정식으로 출시했다.
이 정도면 내가 흥분한 이유가 설명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면 지금부터 박스를 열어보자. 오큘러스 리프트나 HTC 바이브와 같은 다른 VR 헤드셋 박스가 크고 아름다웠던 반면 오큘러스 고의 박스는 꽤 컴팩트하다. 예전 삼성 기어 VR 박스 정도 크기인 것 같다.
박스 전면에는 어떤 콘텐츠가 있는지, 우측에는 박스에 뭐가 들어 있는지, 좌측에는 기기 스펙이 적혀있다. 보급형 기기인만큼 다른 기기보다 조금 더 친절해졌으며, 샤오미 로고도 찾아볼 수 있다. 얼른 열어보자.
짜잔. 필요한 것만 딱 들어있다. 회사에서 받았던 터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열었는데, 깔끔한 패키징에 다들 감탄했다. 최근 프로젝트에서 패키지 디자인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매니저는 극장에 앉아 있는 모습이 상상된다고 말했다.
패키지에는 오큘러스 고 본체, 컨트롤러, USB, 건전지, 설명서 등이 들어가 있는 박스가 들어가 있다. 얼른 꺼내서 써보고 싶은데 개봉기 사진 찍으려고 열심히 참았다. 컨트롤러가 기본 제공이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전체적인 제품 디자인은 기존 오큘러스 리프트보다 훨씬 깔끔해졌다. 색도 검정에서 연한 회색으로 바뀌면서 무게감이 줄어들었고, 고무로 된 부분도 현저히 줄어들어서 이질감도 적다. 좌측에는 USB 충전 포트와 이어폰 단자가 있으며, 체감 무게도 선이 없다 보니 기존 리프트보다 훨씬 가볍다.
상단에는 전원 버튼과 음량 조절 버튼이 있으며, 좌측 하단에 샤오미 로고를 살펴볼 수 있다. 흠집에 취약한 재질로 보이지만, 다행히 그 정도로 약하지는 않다. 안면 접촉부는 천 재질로 되어 있으며, 실제 착용해보니 착 붙으면서도 압박이 적어서 다른 어떤 기기보다 편했다.
전체가 천 재질로 되어 있으며 천 부분은 완전 분리가 가능하다. 기존 오큘러스 DK2와 리프트에서는 디스플레이 해상도가 낮아서 픽셀이 보이는 모기장 현상 때문에 꽤나 고생했었는데, 오큘러스 고는 해상도도 2160 × 1200에서 2560 × 1440로 조금 올라간 데다가 디스플레이에 최적화된 렌즈를 사용해서 성능과 화질을 높였다고 하는데 과연 얼마나 개선되었을지 궁금하다.
기본으로 포함된 컨트롤러. 컨트롤러에는 커다란 원은 터치 영역, 뒤로 가기 버튼, 오큘러스 홈으로 돌아가는 홈 버튼, 검지 손가락으로 누를 수 있는 클릭 버튼이 있다. 손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 상당히 좋다. 구글 데이드림 VR, 삼성 기어 VR에 들어가는 컨트롤러와 큰 차이는 없다.
상자에 들어가 있는 기본 구성품. 미국에서 판매되는 제품 한정으로 충전기가 들어있다고 한다. 오큘러스 고는 시력에 맞는 특수 렌즈를 주문할 수 있는데, 우측 상단에 보이는 검정 물체는 그 경우 천으로 되어 있는 안면 접촉부를 빼고, 그 자리에 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면 접촉부에 대는 천을 빼고 찍은 사진. 모터쇼나 프로모션 부스에서 VR 시뮬레이터를 운영하면서 어려웠던 점은 안면 접촉부의 위생 문제였다. 한번 쓰고 나면 화장품과 각종 이물질이 천 부분에 달라붙는 게 문제였는데, 이번 기기는 이 부분의 탈부착이 꽤 쉬워서 다양한 사람이 사용하기 용이해 보인다.
그럼 이제 오큘러스 고를 스마트폰과 연결해보자. 먼저 앱스토어/플레이스토어에 Oculus 앱을 설치한다. 로그인하고 나면 앱에 세련된 온보딩 화면이 나온다. 꽤 쉽고 간편해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쓱 따라 하면 된다. 그럼 준비 완료!
이어서 사용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을 애니메이션으로 살펴보고, 동의를 누르면 정말 정말 끝이 난다. 투박한 오큘러스 DK2 만 보다가 이런 세련된 애니메이션을 보니까 기대감이 점점 올라간다. 3년 전 오큘러스가 아니구나.
그렇게 책상에 앉아 약 20분 정도 UI와 콘텐츠를 살펴보았다. 설정에 들어가서 아바타를 만들고, Within 앱에 들어가 VR 영화 Invasion을 본 후, Youtube 앱에서 간단한 동영상을 시청했다. 컨트롤러가 있으니 사용하기도 훨씬 쉬운 데다가 UI는 이전보다 훨씬 세련되고, 깔끔해져서 개인적으로 뿌듯했다.
화질도 이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여전히 픽셀이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퀄리티라면 대단한 발전이다. 새로운 렌즈가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물론 가상현실을 처음 써 본 우리 팀 프로젝트 매니저는 픽셀이 보인다고 투덜거렸지만.
2016년에 비하면 콘텐츠가 많아진 건 사실이지만 절대적인 콘텐츠 양은 여전히 부족했고, 킬러 콘텐츠도 딱히 없었다. 소재도 여전히 롤러코스터, 공포, 우주, 다큐멘터리에 머물러 있다보니 내 입장에서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오큘러스 고는 기존 가상현실 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가격이 조금 더 저렴하고, 선이 없고, 얼굴에 잘 맞아서 더 편리하고, 무게도 가벼워서 조금 더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앞으로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지금 당장 사라는 말은 못하겠다. 그러나 가상현실이 어디까지 왔는지 궁금하다면 한 번 쯤 사볼만한 기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잡설로 개봉기를 마쳐볼까 한다. 가상현실이 등장한지 어느새 4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미래의 기술로 일반인들에게는 신기한 무언가로 머물러 있다. 비싼 가격과 킬러 콘텐츠의 부재 탓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새로운 기기는 세상을 바꾸는 콘텐츠의 밑바탕이 된다. 닌텐도 Wii와 닌텐도 스위치가 그러했고,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그러했다.
오큘러스 고는 일단 가격 문제를 해결했다. 이를 통해 가상현실이 많은 이의 생활 속에 녹아들 것이다. 이 변화는 킬러 컨텐츠가 나오기 위한 밑바탕이 될 것이다. 초기부터 가상현실 컨텐츠를 만들었고, 가상현실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사람이자, 인터랙션 디자이너로서 나도 작은 무언가라도 하나씩 만들어보면서 변화에 동참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