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
얼마 전 디자인 매거진 CA에서 주최한 ‘나라는 브랜드’의 첫 번째 발표를 맡았다. 주제는 ‘나’라는 브랜드 만들기.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하고, 뻔뻔하게 알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 자랑으로 끝나기 쉬운 주제라 준비하는 내내 부끄럽고, 막막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열심히 준비했다. 100명 앞에서 하는 발표는 처음이라 조금 떨리는데, 잘할 수 있겠지?
브랜드와 브랜딩이 무엇일까. 브랜드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충분한 시간과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럴듯한 이름과 보기 좋은 로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목표, 시간, 노력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목표가 분명하고 일관될수록, 시간이 길수록, 노력이 많이 들어갈수록 브랜드의 색깔은 짙어진다.
브랜딩은 상대 마음속에 남기고 싶은 내 모습을 이야기로 전달하는 일이다. 아무 말이나 통하는 건 아니다. 브랜드가 지키고 싶은 가치를 어떻게 찾았는지, 이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고 있는지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는 진정성이 중요하다. 메시지가 분명하고 일관될수록, 이야기가 참신하고 흥미로울수록 더 효과적으로 브랜딩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볼보는 안전한 자동차로 잘 알려져 있다. 안전벨트를 처음 개발했고, 그 기술을 다른 자동차 브랜드가 사용할 수 있도록 특허권을 개방했다. 지금도 안전을 위해 기술 개발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2020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를 0명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으로 삼고 있다. 여기까지는 브랜드다. 여기서부터는 브랜딩이다. 볼보는 이 이야기를 광고로 만들었고, 흥미로운 볼보의 안전 이야기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 결과 볼보는 소비자 머리 속에 안전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자. 여러분에게 박재범은 어떤 사람인가? 누군가는 박재범을 아이돌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박재범을 SNL 크루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박재범은 R&B 힙합 아티스트이자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힙합 레이블의 대표이다. 그가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본 사람이라면 그가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알 것이다. 박재범이라는 브랜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브랜딩은 그의 작업물인 셈이었다.
여기에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브랜드와 브랜딩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고, 위는 그저 내가 바라보는 '나'라는 브랜드와 브랜딩일 뿐이다. 셀프 브랜딩에 브랜드 아이덴티티 시스템처럼 복잡한 무언가는 필요하지 않다. 자기가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되고 싶은지, 스스로를 어떻게 알리고 싶은지만 정하면 된다.
그러면 '나'라는 브랜드는 어떻게 만들고, 브랜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디자인 싱킹에서 자주 사용하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을 가져왔다.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은 아이디어를 최대로 발산한 다음,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제거하며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해나가는 디자인 방법론이다. 지금부터 이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의 발산하고 수렴하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나'라는 브랜드의 목적을 찾고, 어떤 매력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서 브랜딩 하는지 들어보자.
'나'라는 브랜드 만들기 첫 번째. 지금까지 내가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았는지 순서대로 적어본다. 쓰기 전에는 모르지만, 쓰고 나면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혹은 내가 얼마나 적은 일을 했는지 보인다. 반성은 조금 있다가 하기로 하고, 내가 다음 선택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되는 사건을 표시한다. 그렇게 하나씩 모아 보면 분기점이 보일 것이다. 광고에 미쳐있던 시절, 나에게는 세 가지 분기점이 있었다. 하나는 5학기 동안 활동한 대학교 마케팅 학회, 다른 하나는 TBWA KOREA 주니어보드, 마지막 하나는 제일기획 아이디어 페스티벌(이하 제일기획 공모전) 대상.
그때만 해도 나는 대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제일기획 공모전이 눈에 보였다. 3년 동안 약 50여 개의 공모전을 하면서 제일기획 공모전에는 7개의 작품을 제출했지만, 번번이 떨어졌다. 졸업하기 전에 동상이라도 꼭 타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2주 동안 준비했고, 대상을 받았다. 나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심정으로 대학원을 포기하고 광고 회사에 지원했고, 직장인이 되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내가 상을 타지 않았더라면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사건이 바로 당신 인생의 분기점이다.
내 삶의 여정은 유난히 산만하다. 대학에서는 심리학과 경영학을 전공했고, 광고 회사에서 디지털 크리에이티브를 만들다가, 스웨덴에서 디자인을 공부하고 지금은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광고, 디지털, 디자인. 연관성이 있는 듯 없는 이 세 가지를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이럴 때 사이먼 시넥의 골든 서클만큼 좋은 툴이 있을까? 골든 서클은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 내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준다.
How는 어떤 방법 혹은 과정으로 What을 달성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는 포스트잇을 활용하면 조금 더 편하다. 본인이 했던 일을 벽에 다 붙여놓는다. 비슷한 일끼리 묶어주고, 그 위에 제목을 달아준다. 이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보면, 그 뒤에 숨어있는 이유가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광고 회사에서는 한 번도 TV 광고를 만든 적이 없고, 디지털 팀에서는 한 번도 페이스북 광고나 배너 광고를 만든 적이 없다. 새로운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사용해 전에 없던 크리에이티브를 만들었다. 나는 무언가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고,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조금 다른 경험을 주려고 노력했다. 디자이너로 일하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코딩으로 디자인하고, 전에 없던 인터랙션으로 사용자에게 조금 다른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그 모든 사건 뒤에 숨어있던 단 하나의 이유, Why를 찾을 차례다. 전체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여기가 가장 어렵다. 스스로에게 계속 묻고 또 묻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그렇게 계속 파고 들어가다 보면 그 모든 행동과 과정이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그게 바로 '나'라는 브랜드의 목적이다. 누구나 할 법한 이유보다 당신 만의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게 앞으로의 브랜딩 과정에서 훨씬 유리하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나는 왜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하고, 왜 조금 다른 경험을 만들고 싶었을까. 나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분명 어딘가 더 쉽고 편한 방법이 있을 텐데. 이렇게 바라보고 다르게 붙여보면 전혀 다른 경험이 될 텐데. 전에는 소비자가 세상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 디지털 콘텐츠와 광고를 만들었고, 지금은 사용자가 세상을 조금 더 쉽고 편하게 살 수 있게 만들고 싶어서 제품을 만들고 있다.
브랜드 목적을 세웠으니 절반 이상은 왔다. 그러나 좋은 목적만 세웠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결국 상대 머리 속에 그걸 남겨야 의미가 생긴다. 이제부터는 감칠맛을 낼 크리에이티브가 필요하다. 살면서 겪은 재미있고,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모두 꺼내놓고, 임팩트가 있는 에피소드를 추려서 짧은 이야기로 만든다. 라디오 사연이나 영화 예고편을 생각해보자. 어쩜 그리 머리 속에 쏙쏙 박히는지. 디테일은 조금 틀려도 괜찮다. '나'라는 브랜드를 상대 기억 속에 남기는 게 중요하다.
다시 한번 내 사례로 돌아와 보자. 나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사용자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을 배웠고, 광고 회사에 다니면서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고, 하이퍼 아일랜드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그 모든 것이 섬세하게 디자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산만한 여정은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탄탄한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만드는 제품, 서비스 혹은 무언가가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떻게 동작하고, 또 어떻게 보이고, 그래서 사용자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어느 누구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제품과 서비스를 바라보고, 어느 누구와도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어떤 경험을 만들고 싶냐고 물어보면, 나는 보통 콜드플레이 공연을 이야기한다. 음악 따로, 공연 따로가 아니라 그 모든 게 사용자와 인터랙션 하면서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에피소드로 기억되는 그런 경험, 나는 이런 가슴 뛰는 경험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대답한다.
이 외에도 '이진재'라는 디자이너를 설명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는 상대와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고르는 게 중요하다. 만약 상대가 콜드플레이를 모르거나, 공연에 가본 적 없다면 위의 사례는 또 다른 설명을 요하는 복잡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마지막은 알리는 단계. 좋은 이야기라도 여기저기 알려야 누구 귀에라도 들어간다. 여기서는 뻔뻔해야 한다. 부끄러워하지 말자. 나는 정말 뻔뻔한 사람이다. 디자인 매거진 CA에 연재를 시작한 것도, 지금 회사에서 인턴을 구한 것도, 퍼블리에서 리포트를 쓰게 된 것도 나의 뻔뻔함이 한몫했다. 준비하는 내내 부끄럽고 막막했던 이 발표를 별생각 없이 한다고 했던 이유도 보나 마나 나의 뻔뻔함 덕분이다.
블로그나 브런치는 본인의 이야기를 알리는 좋은 수단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글을 쓸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럴싸한 이야기가 있으면 일단 써보자. 반응이 있으면 다른 이야기도 조금씩 써보자. 꾸준히 글을 쓰다 보면 그것들이 모여 매거진이 되고, 본인을 브랜딩 하는 좋은 채널이 된다. 나는 2014년 처음 블로그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2017년에 시작한 브런치에 디자인, 하이퍼 아일랜드, 일상 에세이를 쓰고 있다.
블로그나 브런치는 좋은 포트폴리오가 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린 칸 국제 광고제 방랑기는 퍼블리와의 인연으로 이어졌고, 브런치에 올린 하이퍼 아일랜드 유학 일기는 디자인 매거진 CA와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디자인 매거진 CA에 연재를 시작한 덕분에 한국 디자인 진흥원에서 스웨덴 디자인 리포터로 활동하게 되었다.
그냥 올린다고 누가 읽어주는 게 아니다. 홍보가 필요하다. 나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내 피드는 물론 관련 커뮤니티에도 올리고, 관련된 사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태그 한다. 하나라도 더 노출시키는 게 중요하다. 나도 당연히 부끄럽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진다는 걸 알기에 부끄러움은 잠시 접어두는 것뿐이다.
'나'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브랜딩 하는 일을 요약하면 나만의 타임라인을 만든 후, 산만한 여정을 정리하면서 '나'라는 브랜드의 목적을 찾고, 내가 가진 매력적인 이야기를 찾아서 적절한 채널에 뻔뻔하게 알리는 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금방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브랜딩은 장기전이다. 꾸준함과 일관성이 중요하다. 결국, 노오오오력을 하라는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Fake it till you make it. 될 때까지 해보자. 2015년만 해도 나는 코딩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개발자가 되어보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렇게 시간이 날 때마다 개발을 공부했다. 그리고 4년이 흐른 지금, 개발자까지는 아니지만, 코딩으로 디자인하는 인터랙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언니네 이발관의 이석원도 처음에는 기타 코드 하나 못 잡았지만, 밴드 리더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한국 대표 인디 밴드가 되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발표는 큰 무리 없이 마무리되었다. 부끄럽지 않으려 3주 동안 부단히 애썼지만, 강단에서 내려와서도 한참 동안 얼굴이 화끈거렸던걸 보면 꽤나 부끄러운 발표였던 것 같다. 산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셨다. 다행이었다.
'나'라는 브랜드를 만들 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으로 사는 일, 나 자신이 되는 일, 자기 안의 목소리를 듣는 일, 스스로를 믿는 일이다. 당신이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당신 안에 있다(나이키 광고카피). 마지막으로 찰스 핸디의 <코끼리와 벼룩>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쳐볼까 한다.
포트폴리오 인생에서 자네 직함은 어떻게 되는 건가? 前 소장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잠시뿐일 텐데. 친구의 물음에 내가 말했다. 그냥 찰스 핸디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