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클 저그는 조기가 흔전만전혔지. 제법 어른 팔뚝만한 것들도 잡히곤 혔어. 여그 장자도허고 관리도 사이 요 앞바다를 ‘밭도’라고 허고, 선유 3구 돌아가는 물목을 ‘청돌’, 글고 무녀도허고 선유 1구 사이 물길을 ‘만잔여’라고 혔는데, 물살이 시어서 주로 거그서들 잡았지.”
장자도에서 태어난 김도형씨는 어린 시절, 조기가 흔했던 장자도를 아직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100동? 아니 그렇게까지는 못 허고, 1동이 얼만지는 알지? 천마리여. 10동만 혀도 풍선배들 깃발 꽂고 요란시럽게들 들어왔지. 얼음이 없던 시절잉게 소금으로 절여서 강경이며 심포, 곰소, 줄포로 나댕기며 팔았어. 뭐, 돈받고 팔은 것은 아니고 주로 쌀이랑 수박, 참외랑 바까 묵었지. 광어나 아구 같은 것은 먹을 줄도 몰랐어. 말리면 기름이 뚝뚝 떨어지고, 생긴 것부터가 재수가 없다고 혀서 잽히면 그냥 바다에 던져버리곤 혔어.”
바다가 아직 풍요롭던 시절이 있었다. 진달래꽃이 곱게 필 즈음이면 덩달아 고군산 앞바다에도 큰 소란이 일었다. 봄을 불러오는 것은 조기였다. 동중국해 심해에서 월동했던 조기는 추위가 풀리면서 서해 연안을 따라 북상했다. 입춘 즈음에 흑산도 해역을 지나 칠산 바다와 녹도 근해를 통과한 조기들은 5월이면 멀리 연평도까지 올라갔다. 조기 떼를 쫓아 전국의 고깃배들이 몰려들었고, 흑산도와 위도, 연평도에서 파시가 섰다. 칠산 바다에서 멀지 않고, 위도에서도 지척인 고군산 바다도 음력 3월이면 술렁거렸다. 조업은 낮과 밤에 상관없이 들고 나는 물때에 맞춰 이루어졌다. 바람에 의지해 움직이는 풍선배들은 보름과 그믐사리에 맞추어 조기를 거두었고, 물살이 약해지는 조금에는 항구에 배를 대고 식수와 먹을거리를 구하거나 그물을 손질했다. 술에 취한 선주와 뱃사람들의 노랫소리로 섬의 포구들이 흥청거렸고, 만선의 기쁨으로 들뜬 콧노래로 바다 위에 뜬 배들도 출렁거렸다. 산란을 앞둔 조기들은 살이 오르고 한철의 풍요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물질은 한밤중에도 계속됐다. 장자도 밤바다에는 때 아닌 꽃들이 환하게 피어났다. 섬사람들은 바다가 풍요를 주던 그 시절을 ‘장자어화壯子漁火’라는 말에 담아두고 되새김질한다. 그러나 이제는 단물이 다 빠진 빛바랜 추억이 되고 말았다. 선유 8경의 하나로 꼽히던 장자어화도 흐릿한 중노인의 기억에서나 가물거리는 흑백필름일 따름이다.
조기들의 씨가 마르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즈음이었다. 나일론 그물의 등장과 조기 떼들보다 빠른 동력선에 힘입은 남획 때문이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를 것 같지 않던 조기는 60년대 이후 점차 숫자가 줄더니 이제 팔뚝만 했다던 조기는 제사 때가 아니면 특별한 손님상에나 오르는 귀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진달래가 피는 봄이 다시 와도 개구리 울음소리 같다던 조기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고, 한번 풍요를 잃어버린 서해는 배들도 뱃사람들도 더는 불러오지 못한다.
조기만이 아니었다. 봄 조기 철이 끝나면 멸치와 병어, 민어와 갈치 떼가 차례로 몰려왔다. 그 덕분에 1919년 최초로 군산 수협의 역사를 태동시켰던 장자도 섬의 영화도 되돌아오지 않았다. 목조건물의 수협 어판장이 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장자도 복합센터’가 들어서 있다. 마을 회관을 겸하면서 간혹 섬을 찾은 손님들을 위해 숙식과 여행안내를 제공하는 시설이다. 센터를 맡아 운영하는 김도형씨가 선유도에서 소랏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열여덟 살 무렵이었다. 기관장 밑에서 뒤치다꺼리를 하며 뱃일을 배웠고, 멀리 남지나해까지 나가는 갈칫배를 6년 정도 타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한참 성황이던 멸치어장을 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섬에 눌러앉게 되었다. 30년을 일궈 먹어 왔고, 60년 가까이 지켜본 바다였다. 아직도 그는 뱃일을 놓지 못하고 있다. 겨울철에는 섬을 찾는 손님도 거의 없어 복합센터 운영은 휴어기에 생계를 위한 방편일 따름이고 주업은 김 양식이다. 한 겨울철에 바닷일은 고생스럽지만 그래도 목돈을 쥘 수 있다. 김 양식이 끝나면 주로 멸치를 잡는 낭장망을 설치하곤 했지만, 손맛을 볼 수 있는 기간은 고작 한 달 남짓이다. 따뜻해진 여름 바다에 번성하는 해파리 때문에 고기는 둘째치고 그물 자체를 망치기 십상이다. 겨우 액젓 담을 정도 건지고 나면 아예 걷어버리는 것이 낫다. 이른 가을까지 넉넉하게 멸치가 들던 아버지의 그물을 잊지 못하는 그의 눈에 바다는 늙어가며 쪼그라든 어머니의 젖가슴만 같다.
요즘 장자도 사람들은 잔뜩 꿈에 부풀어 있다. 새만금 방조제가 연결된 신시도로부터 장자도까지 섬과 섬을 잇는 연결도로가 완공됐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선착장과 여객터미널도 새로 조성될 계획이다. 지금껏 군산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출발하던 뱃길도 옮겨왔고, 인근 관리도와 방축도 그리고 명도와 말도를 다니는 여객선도 이곳에서 드나들게 됐다. 대규모 어판장이 있는 비응항이나 유람선들이 뜨는 야미도 그리고 현재 신시도 항구를 거점으로 형성된 어로 거점을 둘러싸고 섬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지만, 장자도 주민들의 기대는 대체로 낙관적이다. 서둘러 팬션을 짓는 사람도 있고, 새로 낚싯배를 구입할까 고민하는 어민도 있다. 평당 땅값이 250만 원에서 300만 원대까지 올라있지만, 실제 거래는 거의 없다. 아마도 개발심리 때문인 듯싶다. 사람들은 오래전 잊힌 장자어화의 꿈을 다시 꾸고 있다. 수협어판장이 제일 먼저 들어서고 고군산 일대에서 학교가 처음 세워졌던 장자도, 큰 인물 많이 날 거라던 이름처럼 장자도가 고군산의 새로운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인가. 쉽지만은 않을 듯하다. 점점 풍요를 잃어가는 바다와 거센 외지바람을 견디기에 섬은 너무 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