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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딩트 요리 May 29. 2022

여전히 비판적 예술은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 웨이웨이 전시

얼마  4 16일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전시로 진행하던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 관람했다.   전부터 가야지 가야지 하다 종합시험부터 연구모임 논문 마감하느라  시간을 못냈고, 결국 전시 마감 이틀 전에 부랴부랴 미술관으로 뛰어가야 했다. (미술을 부르주아 예술이라고 생각해온  선입견 때문에) 원래 미술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서 미술사적인 배경들은  알지 못했지만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은 (미술관 해설과 여러 검색 결과들에 힘입으면) 어렵지 않게 충분히 이해할  있는  같았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활동과 작가에 대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그리고 현대미술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전시 자료집 또한 얻을  있으니  역시 참고하면 이번 기획전시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는 얻을  있을 것이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419/112954490/1

 

 

사실 다 제쳐두더라도, 내가 <아이 웨이웨이: 인간미래>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여전히 '비판적 예술'을 추구하는 작가가 존재하고, 많지는 않으나 이들의 작품이 대중들과 교통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이 웨이웨이의 경우에는 주로 중국 사회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녹여내는 특징을 지니고 있고, 그의 작품들을 보면 주로 난민 문제부터 중국의 소수민족 억압, 노동착취, 개발주의 등의 문제들을 작품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다. 내가 보기에 아이 웨이웨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은 현재 중국 자본주의의 모순들을 정확하게 관통하고 있고 반드시 국제적인 사회운동으로 지양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들이 한국의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는 점은 나름의 큰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다(물론 반공주의가 뿌리깊은 한국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들이 '공산주의의 폐해'로 독해될 위험 또한 클 것이다).

 

보통 '비판적 예술'이라고 하면 예술을 정치의 프로파간다(propaganda)로 삼으면서 예술 고유의 상대적 자율성(나는 유희가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한다)을 억압한다고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나는 예술이 여전히 비판적일 수 있고(혹은 비판적일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비판과 유희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뛰어난 작가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 역시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지배적인 공간들에 엿날리는 사진들이 참 재미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 앞에서 엿을 날렸다. 이 작품의 이름은 <원근법 연습>인데 재미 있는 점은 원근법 연습을 지배적인 권력의 공간들에 '엿'을 날리면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펠탑과 천안문 같은 지배적인 권력의 공간에 엿을 날리면서 '표현의 자유'를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참고로 아이 웨이웨이는 중국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감금된 경력이 있다). 이 작품만 봐도 아이 웨이웨이가 얼마나 자신의 문제의식을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지만, 많은 관객들이 이 사진 앞에 서서 함께 엿을 날리고 있는데, 이는 비교적 무거운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이 이 주제를 어렵지 않게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싶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반공주의'가 어떻게 작동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잠깐 여담이지만, 나는 사람들이 작품 감상은 안 하고 이 사진 앞에 서서 사진만 찍어대느라 관람에 방해되어 화가 나긴 했었다. 하여간, 이처럼 아이 웨이웨이는 자신의 작품에 비판을 담아내면서도 결코 예술의 유희를 포기하지 않는 성실한 작가라고 생각됐다.

 

 

아이 웨이웨이, <원근법 연습>

 

이에 더해서 아이 웨이웨이 작품이 소수자들을 재현하는 방식 역시 좋았는데, 아이 웨이웨이의 작품들을 보면 작품에서 재현하는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작가의 목소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관객과 소수자의 존재들을 접속시키려는 매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생각했다. 아까 아이 웨이웨이가 표현의 자유를 작품에서 강조한다고 했는데, 사실 한국의 논의 지형에서 '표현의 자유'라는 표현이 '(혐오)표현의 자유'로 곡해되는 경향이 커서 사실 나는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것을 어느 순간부터는 우호적이지 않은 태도로 보게 됐다. 그런데 아이 웨이웨이는 '표현의 자유'를 말하면서 얼마나 많은 소수자들의 목소리가 잊혀져 왔는지를 관객들에게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결코 '자유'를 지배적인 문법에 내어주지 않는다. 그는 아래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 목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문장을 만들 때마다,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목소리를 내어 왔을까 생각한다. 그들은 고작 숫자로 기억될 뿐이다. 많은 경우, 그 숫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목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잊혀진 이들을 위한 목소리라는 아이 웨이웨이의 말이 참 좋았고, 이런 목소리를 유쾌한 방식으로 작품에 녹여내는 그의 방식 역시 좋았다.

 

 

아이 웨이웨이, 표현의 자유



이번 기획전시의 부제는 '인간 미래'이다. 아이 웨이웨이가 자신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잊혀진 이들의 목소리'는 다가올 '인간의 미래'에 들릴 수 있을까? 아이 웨이웨이는 우리가 '인간의 미래'에 대해 질문할 때 끊임 없이 난민과 소수자를 상기시키면서 그 미래에 이들의 존재를 기입할 수 있을 것인지,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누가 인간인가?' '누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가?' 아렌트가 말했고, 발리바르가 비판적으로 정교화했듯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시민이어야만 한다(인간은 하나의 발명품이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 질문하기 전에 현재의 '인간'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이 권리의 주체인가, 누가 미래에 자신의 목소리를 기입할 수 있는가?

 

이익 배분과 권리의 정치를 혼동하면서 소수자의 권리 주장을 불이익/불편에 등치/연결시키고 인간(시민)의 영역을 폐쇄하려는 기획이 힘을 얻는 상황에서 해방적 미래에 대한 질문은 철저하게 봉쇄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이 웨이웨이의 시도가 참 귀하다고 생각됐고, 더 많은 대중들에게 그의 메세지가 효과적인 울림을 주기를 바랐다. 전시를 나오면서 세월호 8주기 피켓팅을 보게 됐다. 이 전시와 다소 느슨하지만, 이 전시가 세월호 이후 8년동안 많은 사회운동과 연대요구가 이루어졌고/이루어졌지만 우리가 현재 여기에 다다랐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부디 더 많은 성실한 '비판적 예술/유희'가 대중과 교통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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