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 여행기 #4] 빛의 베일 속 마차푸차레

뱀부-데우랄리

by 진초록


Day 3. from Bamboo 2145m


아침 여섯 시 반. 알람이 울리는 시각은 매일 같았다. 구운 감자와 달걀, 토마토수프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롯지를 나섰다. 뱀부 롯지는 산속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해 빠져나오는 길은 꽤 정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길을, 징검돌을 디디며 아슬아슬 건너기도 하고, 진흙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마치 정글 탐험을 하는 기분이 들어 은근히 신이 났다.

성큼성큼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을 빠져나오자, 햇살이 퍼진 파란 하늘에 마차푸차레가 빛의 베일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물고기 꼬리처럼 가운데가 갈라진 모양을 한 마차푸차레는 네팔어로 ‘물고기 꼬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래서 영어로는 ‘피시 테일’이라 불린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우리는 도반 롯지의 마당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사과 한 입을 베어 물고 눈을 감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몸을 데워주었다. 조금만 더 걸어와 지난밤을 이곳에서 묵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아쉬운 마음이 크게 들 만큼, 그곳은 예쁘고 밝고 깨끗해 보였다. 도반 롯지. 가능하다면 하산길에 묵고 싶어서 나는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눈으로 새겼다. 햇빛 샤워를 기분 좋게 마치고 다시 출발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 앞에 펼쳐지는 멋진 풍경은 자주 발걸음을 붙잡았다. 구름은 한층 더 깊은 입체감을 띠며 힘 있게 생동하는 듯했다. 그 힘은 우아한 손길로 구름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끌어당겼다가 흩어 놓았다. 하늘에 구름이 하얀 눈처럼 쌓여갈 즈음, 히말라야 롯지(2920m)에 도착을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걸음을 멈추자 땀이 차갑게 식으며 금세 싸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서둘러 화장실로 가 등산복 상의 안에 입었던, 흠뻑 젖은 탱크톱을 갈아입었다. 냉기가 몸속으로 스며들기 전에 젖은 옷을 벗어야 저체온증을 막을 수 있다. 바람막이를 챙겨 입고, 햇빛이 비치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치즈스파게티와 망고 주스 한 캔을 주문했다. 볶음밥도, 스파게티도, 피자도 이제 물릴 대로 물렸지만 새로운 선택을 할 만한 메뉴는 없었다. 늘 같았다. 달라지는 것이라곤 고도가 높아질수록 함께 높아지는 식음료 가격이었다. 콜라 한 캔의 가격이 200루피대에서 300루피로 앞자리가 바뀌었다. 모든 식자재는 당나귀나 말에 실리거나, 사람의 머리나 어깨로 운반된다. 운반 기점으로부터의 거리와 고도에 따라 가격이 오르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때부터는 음식 맛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에너지 보충을 위한 식사였다. 풍경은 맛을 더해가는데 음식은 점점 고역이 되어갔다.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내어놓아야 하는 것. 대자연의 품 안에서 그 단순한 이치를 체감하며, 남모를 특별한 감정에 조용히 잠겼다.


이치니 섭리니 하는 말을 입에 올리며 꼰대 같은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건 꽤 어린 시절부터였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이 소소한 일로 괴로워하면 ‘인생은 원래 고통이 기본값인 거야.’라는 말을 툭 내뱉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농담처럼 받아들여져 웃음꽃을 피웠지만, 지금은 웬만하면 속으로 삼키며 혼자 조용히 전율을 느낀다. 변태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진리의 말이라도 남발하면 재미도 감동도 얻지 못한다. 고작 음식 맛에 물렸을 뿐인데 대자연의 흐름 속에 있으니, 생각이 깊어졌다.


곧 고도 3000m를 넘는 지점이 시작된다. 고산 증상이 나타날 수 있으니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고산병 대비 의도적 서행을 외치며 출발했지만, 곧바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어 속도는 저절로 느려졌다.

구름 모자를 쓴 뾰족한 할배산들이 우뚝우뚝 솟은 풍경에 감탄하며 오르다 쉬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머리가 띵해졌다. 기분 탓인지 고산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더 자주 쉬어가며 걷다가 오후 두 시, 데우랄리 롯지(3200m)에 도착했다. 하루에 고도를 많이 올리는 건 위험하다는 포터의 말에 우리는 그곳에서 묵기로 했다.



‘으, 추워’ 너무 추웠다. 히트텍을 입고 두꺼운 패딩까지 겹쳐 입었다. 이곳부터는 핫 샤워를 하지 않았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건강 염려증 인간이라 위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씻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대신 한국에서 챙겨온 바디 물티슈로 몸을 닦는 것으로 만족했다. 티슈로 몸을 닦으니 베이비파우더 향이 났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향에 잠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롯지 앞마당에 나선 순간, 그 감정은 바로 사라졌다.


‘우와….’

솜구름이 짙어졌다가 연해지며 은은하게 퍼져갔다. 그곳은 섬세한 구름의 움직임이 상영되는 무대였고, 롯지의 마당은 관객석이었다. 넋 놓고 감상하고 있자니 머리가 다시 띵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스트레칭을 쭉 쭉 하고, 심호흡을 깊게 했다. 다행히 금세 띵한 느낌은 사라졌다.

식당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제대로 된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마당 너머 펼쳐진 멋진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마셨다. 황홀경에 빠져 커피 맛도 좋게 느껴졌다.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과 구름의 모양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생동하는 작품 감상을 끝내고, 저녁 메뉴를 골라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제는 메뉴 선택에 큰 의미가 없었지만, 그래도 습관처럼 신중히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음…또 볶음밥을 시켰다. 하하. 생존 본능으로 먹었다.


내일은 이번 등산의 최종 목적지인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향하는 날이다.

내가 여기까지 와있다니… 그리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가게 된다니... 이 모든 게 신기하고 믿기지 않았다. 밤 아홉 시에 불을 끄고 누웠지만, 벅차오르는 마음 탓에, 한참을 뒤척이다가 새벽 한 시쯤에야 잠이 들었다.



이 글은 2017년 10월의 여행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의 현지 풍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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