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랄리-안나푸르나 B.C.-도반
Day 4. from Deurali 3200m
롯지에는 난방 시설이 없다. 보온은 각자의 몫이다. 그래서 침낭 준비는 필수다. 침대 위에 침낭을 펼쳐 몸을 쏙 밀어 넣고, 그 위로 이불을 덮고 잔다. 하지만 직접적인 온기가 없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날진 물통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백패커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그것, 날진 물통. 필요한 모든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걷는 장기 트레킹을 해보면, 가볍고 활용도 높은 물건 하나가 얼마나 기특한지 절실히 알게 된다. 잠자리에 들기 전, 뜨거운 물을 물통에 채운다. 한 김 뺀 뒤 뚜껑을 닫아 침낭 깊숙이 넣고 자면, 침낭 속이 금세 후끈해진다. 핫팩 대용이다. 발이 따뜻해지면서 노곤해지면, 발을 꼼지락거리다가 기분 좋게 잠에 빠져든다. 물통에 담아 두었던 물은 다음 날 보행 중 식수로 사용하면 된다.
여섯 시, 알람이 울리기까지 30분이나 남았는데, 발끝으로 한기가 스며들어 잠에서 깼다. 침낭 속의 온기가 완전히 사라진 새벽은 몹시 추웠다. 게으름도 추위에 쫓겨 달아난 통에 벌떡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식당으로 향했다. 애플 팬케이크와 달걀을 시키고, 뜨거운 물에 누룽지와 김치 콩나물국 블록을 풀었다. 뜨끈하고 얼큰한 김칫국물에 구수한 누룽지가 더해져 완벽한 한 끼가 완성됐다. 미슐랭 맛집이 부럽지 않았다. 국 블록을 챙겨온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대망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ABC)다. 최종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피로는 차곡차곡 쌓였지만, 설렘과 기대감이라는 강력한 촉매가 에너지원이 되어 몸을 움직이게 했다. 데우랄리 롯지를 나서자 눈앞에 그랜드 캐니언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각기 다른 색을 띤 돌산들에 겹겹이 둘러싸인 첩첩산중의 협곡.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작고 변변찮고, 물렁물렁하고 무방비한 생물인 내가 자연의 깊은 골짜기까지 걸어 들어와, 이토록 아름다운 내면을 마주하며 경이를 느끼고 있다니. 숨죽인 감탄사만 새어 나왔다.
검은 돌산 너머로 유난히 하얀 눈 덮인 산봉우리가 보였다. 저 산은 대체 이곳에서부터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아주 가까운 듯한 거리감이 묘했다. 원근감을 흐릴 만큼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내뱉는 숨이 점점 가빠졌다.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마차푸차레 롯지(3700m)에 도착했을 때는 약간 멍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점심을 먹어야 했지만 입맛이 없었다. 밥은 대충 먹고, 눈을 감은 채 햇빛을 빨아들였다. 마치 빛에서 영양분을 얻는 식물처럼, 한참 동안.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차푸차레 롯지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가 저 멀리에서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안도감에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신기루 같은 ABC는 아무리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아아.’
머리가 멍해지더니 찌릿했고, 북이 된 듯 둥둥 울렸다. 정신을 부여잡고 의식적으로 호흡을 길게 하며, 이 여정에 대해 생각했다.
오가는 트레커들과 ‘나마스테’ 인사를 나누고, 이마로 무거운 짐을 나르는 셰르파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안나푸르나를 향해 걷고 또 걷는 이 특별한 경험이여! 흐릿한 정신으로 앙금앙금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의 특별함과 소중함을 곱씹다 보니, 마침내 ABC가 발 앞에 와 있었다. ‘여기에 왔다. 왔어!’
오후 두 시 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에 도착했다!
안나푸르나 남봉, 힘출리, 마차푸차레. 장엄한 산들이 병풍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시시각각 새로 태어나는 구름은 산이 토해 내는 힘찬 숨결 같았다. 정교하게 조각된 이 산들은 그 어떤 생명체보다도 견고하게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했다. 이 황홀한 위엄이여! 압도적인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도착하자마자 진통제 한 알을 삼켰지만, 증상은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많이 안 좋으면 말하라며, 조금만 내려가도 괜찮아질 거라고, 내려가자는 포터의 제안에 나는 무엇이 현명한 선택인지 판단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미동도 하지 않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지나온 고통의 순간들이 떠올랐다. 한여름 마라톤에서 견뎌야 했던 인내의 시간. 수영하며 호흡이 달려 죽을 것 같았던 공포의 순간들.
‘그래 다 이겨냈고, 지나갔지.’, ‘긴장 풀고, 호흡에 집중하면 괜찮아질 거야. 내가 여기서 죽는 건 좀 안 어울리잖아?!’
생각의 산을 넘고 넘다 잠깐씩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숨 막히는 불안의 밤은, 영원할 것처럼 길고 적막하고 캄캄했다.
Day 5. from Annapurna B.C. 4130m
고산 증세로 두려움과 싸워야 했던, 길고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휴, 살았구나.’
어둠이 물러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유리창의 투명함이 무척 반가웠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켜 방을 나섰다. 태극기가 펄럭이는 추모비 뒤로 안나푸르나 남봉이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뭐야, 거짓말!’
누군가 밤새 작업해서 영상을 띄워놓은 것 같았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고요하게 찬란했다. 뜨거운 감정이 차올라 목이 조여왔다.
“천상에서도 더 높은 곳을 향하고 있을 그대들이여!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이곳에서 산이 되다.”
돌무덤 아래 새겨진 추모글에 코끝이 찡해졌다.
지난밤 저녁도 먹지 못했으니, 뭐라도 조금 먹어볼까 싶어 매쉬드 포테이토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미역국 블록을 물에 풀어 억지로 몇 숟갈 넘겨보았지만, 속이 메스꺼워 곧 숟가락을 내려놓고 서둘러서 하산길에 나섰다.
곰에게 쫓기듯 쭉쭉 내려오자, 고산 증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증상이 가시자, 배가 무척 고파졌고, 지난밤 불면이 남긴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우리는 롯지 스테이 일정을 조정해 산행을 일찍 마무리하기로 했다. 잠 보충과 휴식이 절실했다.
목적지를 도반 롯지로 바꿨다. 여기서 1시간만 더 내려가면 된다. 등산길에 이름을 새겨두었던, 밝고 깨끗해 보이던 곳. 그곳에서 여장을 풀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오후 두 시가 되어 도반 롯지(2520m)에 도착했다. 그날도 마당에는 햇빛이 가득했다. 등산복을 빨아 널고, 배낭도 햇살 아래 말렸다. 고도 2500미터 지점이라 우리는 마음껏 핫 샤워를 즐길 수 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머리칼을 말리고, 개운하게 맥주도 한 캔 마셨다. 무한한 행복이 차올랐다.
도반 롯지는 포터들이 트레커들을 우르르 데려와 머무는 대형 롯지가 아니라, 차분하고 아담했다. 덕분에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 물질을 말끔히 벗겨낼 수 있었다.
잠자리에 누우니 누적된 피로 탓에 다리가 저렸다. 이제 장시간 걷는 일이 쉽지 않겠다고 생각하다가 스르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 글은 2017년 10월의 여행을 기록한 것으로, 지금의 현지 풍경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