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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명절 풍경

명절만 되면 사람들로 북적북적

by 지니






"코코넛 카푸치노 한 잔만 타 줘요! “ 짝지에게 부탁을 했다. 오늘은 겨우 정리가 된 서제에 나와 글을 적는다. 가을맞이 인테리어는 거실 한 군데 정리가 끝났다. 어제 책장을 거실 한 공간 벽으로 세우고 5칸 중 위쪽 두 부분은 책으로, 밑에 두 칸은 시디로 맨 밑에 칸은 엘피로 채웠다.


아침, 오랜만에 머리를 했다. 10시 반에 가서 한 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식구들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 점심 먹고 난 잔재들을 치우려는 찰나 택배사 물건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서울에서 조카가 보낸 한우 세트를 비롯해 화장품 몇 개, 바디워시 등과 배추, 무 등이다. 하필 택배로 주문한 물건들이 동 시간대에 하나 둘 같이 왔다.


이어진 정리와 함께 김치를 담그려 배추를 손질해 소금을 뿌려두었다. 큰 볼에 김치 양념 만들 준비를 한다. 액젓과 사과, 양파, 찬밥을 넣고 믹서기에 갈아 준비해 두었다. 김치 한 통을 만들고 저녁에 먹을 두부 된장국도 동시에 끓였다.


정말 오늘은 주방에서만 살은 날이다. 좀 전엔 무김치를 담그려 무 두 개를 나박나박 썰은 뒤 굵은소금을 뿌려두었다. 그 사이 무김치에서 동치미로 바뀌었다. 동치미는 찬바람이 불어오면 만들기 시작하는데 무의 썰린 모양이 맛깔스러워 동치미로 정했다. 큰 냄비에 물 가득 담고 다시마와 감자 간 물을 넣어 끓여주었다. 지금은 식히는 중이다. 무는 잘 절여졌다.


그러니 이 연재글을 미리 써 두었어야 했는데 그걸 못했다. 오늘은 아예 할 시간이 없었다.





서두가 길었다. 이제 곧 명절도 다가오고 하여 대가족이 사는 집의 명절 분위기를 전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글 소재는 어제부터 생각했었는데 정작 오늘 아침엔 늦잠을 자는 바람에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하튼 그랬다. 오늘이라는 시간이 얼마 남진 않았지만 그래서 압박감도 있지만 나는 지금 쓰고 있다. 술술 이야기가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는 여기저기 시장을 다니면서 장을 봐 오신다. 큰 시장, 동네 시장을 전전하며 말이다. 그때 엄마는 바퀴 달린 시장가방을 끌고 다니셨다. 아... 지금 생각하면 큰 시장이 집이랑 꽤 먼데 그걸 끌고 다니셨을 엄마 생각을 하니 또 마음 한편이 짠해져 온다. 왜냐하면 나도 요즘 시장 보러 다녀보면 그 힘듦을 몸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온라인으로도 주문이 가능한 세상이지만 그때는 그런 게 있었는가. 작고 가냘픈 체구로 그 많은 식구들을 해 먹이기 위해 그렇게 고생만 하셨던 우리 엄마. 명절에 관한 글을 쓰니 당연히 떠오르고 만다.


우리 식구들만 먹으면 덜했겠지만 큰집이라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친척들이 오면 먹을 것까지 준비를 했어야 했으니 아마도 몇 날 며칠은 왔다 갔다 장 본다고 힘드셨을 것이다. 엄마의 그런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렇게 준비된 식재료들은 추석 전날부터 하나 둘 만든다. 그 당시 우리 집도 제사란 걸 지냈기 때문에 음식의 가짓수가 장난 아니었다.


생선은 밀가루물을 입혀 굽고, 닭은 삶아 두었다가 추석 당일에 간장양념에 조린다.


제사 음식 중에 내가 제일 좋아했던 건 상어고기다. 경상도 말로 돔베기라 하는데 요 아이를 달달한 간장물에 짭짤하게 조려주면 정말 맛있다. 아 그때 먹었던 돔베기 조림이 그립다. 그 뒤로는 제사를 매번 지내셨던 시댁 사촌 형님댁에서 맛을 보곤 했다. 나도 언젠가는 돔베기를 조리해보고 싶다.


그리고 소고기 간장조림 등 간장에 조리는 음식들이 몇 가지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방에서 각종 전을 구우셨다. 부추전, 명태 전, 소고기 전, 동그랑땡, 꼬치 전 등이었다.


부추전은 청양초를 특히 많이 썰어 넣는다. 각종 해물들을 넣어 풍미를 더해준다. 홍합, 조개, 오징어 등을 넣었다.


그리고 제삿날 명절 때만 먹을 수 있는 전 중에 하나가 바로 소고기 전이었다. 소고기 전은 정말 맛있다. 명절 아침 가족들과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 소고기 전에 은근 손이 많이 갔다. 그만큼 맛있다.


우리 할머니가 굽는 전 중 으뜸은 꼬치 전이다. 꼬치에 대파, 김치, 소고기 순으로 꽂아서 밀가루, 계란물을 입혀 앞 뒤 노릇하게 구워낸다. 산적꼬치라고 하나? 그랬는데 이 전은 명절 때 오시는 손님들한테 특히나 인기가 있었다. 이 음식을 유난히 맛있어하는 아재가 있긴 했다. 먹으면서 늘 맛있다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여느 집의 산적꼬치 전은 예를 들어 햄, 맛살, 단무지, 쪽파, 세 송이버섯 등을 꽂아하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 집 레시피는 특이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봐도 대파, 김치, 소고기의 조화는 정말 완벽 그 자체다. 결혼을 하고 난 어느 명절날 산적꼬치 전을 흉내 내봤는데 영 그 맛이 안나 좀 슬펐다. 이것도 한 번 시도해 봐야지 생각한다.


엄마가 맡아하는 음식들은 탕국, 닭 삶기, 튀김류(오징어, 고구마, 새우 등), 삼색나물, 단술(식혜) 등이었다.


그 당시 엄마도 일을 다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쩔 땐 필요한 재료들이 빠지기도 해서 동네 시장을 왔다 갔다 하시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음식 만드는 게 늦어져 새벽 늦게까지 해야 끝나곤 했다. 일찍 시작해 일찍 끝내면 되었겠지만 그게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노인 세 분을 모시며 밥을 챙기고 마당, 화장실 청소 등을 먼저 하고 시작해야 했으며 내가 시집와서 살아보니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엄마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 엄마의 꼼꼼한 성격도 한몫했겠지만. 어쩌면 엄마랑 나랑은 참 닮은 부분이 많다고 여겨진다. "엄마, 그동안 여러모로 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엄마의 명절음식 중 탕국이 또 별미다. 각종 해물과 소고기, 무 듬뿍, 두부 듬뿍, 우무가 들어간 우리 집 탕국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명절이 끝날 때쯤엔 남은 나물들과 탕국을 넣고 불에 얹어 만드는 나물 비빔밤은 정말 탑 중에 탑이라 하겠다.


그리고 단술을 참 맛나게 잘하셨다. 너무 달지 않게 하는 게 포인트다. 명절 아침이 되면 달콤한 단술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명절 음식을 먹은 뒤 후식으로 단술 한 잔 마셔주면 속이 시원해지면서 행복감에 사로잡힌다.


마지막으로 제사 명절 때만 먹을 수 있었던 고급지고 맛났던 음식은 전 찌개였다. 이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맛이라 설명이 불가하다. 아마도 전 찌개를 맛본 사람들은 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건 명절이 끝난 다음날 맛을 볼 수 있는데 생선을 비롯해 각종 전들이 콜라보를 이루는 것이다. 고소하고 짭짤한 그 감칠맛이 지금도 생각하니 먹고 싶어 진다. 지금 해서 먹으면 아마도 그때 그 맛은 절대 흉내 내지 못할 것이다.


명절 아침부터 한 3일간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뵈러 오는 친척분들, 사촌분들의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 할아버지 사촌들을 비롯해 자식분들, 할머니 친정 식구들이 차례대로 오고 그다음 날은 고모네 식구들과 사촌들이 온다. 줄줄이 사탕이었다.


정말 이 많은 사람들을 치러 내느라 등골이 휠 지경이었다. 정말로 엄마는 등골이 휘었지만 말이다.


명절아침 할아버지 사촌들과 그 식구들을 대접하고 치울 때쯤 되면 할머니 동생들과 그 식구들이 왔다. 그때는 정말 명절 음식 차리고 치우고 하는 것도 참 전투적으로 했다. 다행히 우리는 형제가 많으니 서로 도와가며 잘했던 것 같다.


밥, 국, 나물, 전, 닭조림, 산적 등을 그릇에 담고 밥 먹을 사람 체크해 밥과 국을 담고 과일을 내가고. 참 지금 생각해도 생생하기 그지없다. 그때는 그 많은 일들을 어떻게 했을까 말이다. 그땐 음식을 싸주고 싸가기도 했으니 그건 덤이었다.


어느 날에는 나 홀로 버스 타고 경주로 도망간 적도 있었다. 어리고 철없던 마음에 명절만 되면 사람들이 오는 게 정말 싫었다. 아침에 모두 모여 명절 의식을 치르고 둘러앉아 밥을 먹은 다음부터는 전쟁이었으니까.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노할머니, 아버지, 엄마 모두가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명절 때마다 우리 집을 찾았던 친척분들 사촌분들도 거의 다 돌아가시고 몇 분 안 남은 걸로 안다. 아, 또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안 좋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는 이분들의 모습도 잘 못 뵀던 것 같다.


우리 집은 특이하게도 남자보다 여자(아내분)들이 거의 다 먼저 돌아가셨다. 우리 엄마 케이스도 그렇지만 우리 할아버지를 제외하고는 할아버지 사촌분들 보면 할머니들이 두 분 다 먼저 가셨다. 할아버지 두 분 중 한 분은 살아계신 걸로 알고 한 분은 돌아가신 걸로 안다.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아재 한 분이 하는 말씀이 이 집안에 시집오면 여자들이 다 먼저 간다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남자들이 고집이 세고 말을 안 들어 여자들(아내)이 스트레스로 먼저 돌아가신다는 논리였다. 듣고 보니 그런 거도 같았다. 이상하게 껴 맞춰지는 그런 게 있었다. 조금 소름 돋았다.


그러고 보면 엄마도 큰집에 시집와 정말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케이스가 되어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그렇지만 항상 내가 생각하는 결론은 엄마는 엄마의 소신을 다해 살았고 최선의 삶을 살다 가셨다는 것이다. 대식구들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던 영원한 천사 같은 우리 엄마일 뿐이다. "엄마가 계신 그곳은 고통도 눈물도 아픔도 없지요? 잘 계시죠?" 훌쩍.


89세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알지 못했던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고초를 내가 겪어봄으로써 세 분의 노인을 모시느라 참으로 힘드셨겠구나... 살면서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엄마 혼자서 가슴앓이도 많이 하셨겠구나 하고. 그때의 엄마는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흩어졌던 퍼즐조각들이 맞춰진다.


우리 부모님이 살아 나오면서 몸 고생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그래도 살만하다 싶으실 때 두 분 다 돌아가게 되셨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참 사람 생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운명이란 게 정해져 있는 것만 같아서 말이다. 다행히도 두 분 다 믿음의 길을 가신 분들이라 아빠 아버지(하나님) 품에 안겨 계실 것이다.


여하튼 엄마 아버지, 참 감사해요. 두 분의 고생스러움 덕분에 또 사랑 덕분에 우리들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하늘나라에서 다시 볼 때까지 평안하게 잘 계십시오. 사랑합니다.


명절을 앞두고 우리 집 명절 때 이야기를 꺼내보면서 이런저런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땐 대식구가 함께 살아가서 좋은 일, 궂은일, 기쁜 일들이 끊이지 않았고 그 시간들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정말 잠시였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된다. 모두 나에게 소중했던 사람들 한 분 한 분 떠올려보며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노할머니, 아버지, 엄마 너무도 그립습니다. 제 가슴속에는 늘 존재하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 받은 사랑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의 노고를 늘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할게요. 우리 가족 다시 한번 모두 사랑합니다. 당신들이 주신 사랑을 나도 지금 있는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나중에 다 함께 다시 만나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해야 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은 주변 사람들 챙기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베풀며 살아가는 것,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 그런 게 아닐까...

명절 글을 써 내려오며 나도 이렇게 전개될진 몰랐는데 명절을 앞두고 특별히 함께했던 우리 가족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라고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지난날의 명절 풍경들을 떠올리며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리워진다. 가족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진다. 선선한 가을밤에 너무 센티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낮엔 그렇게 후덥하고 덥더니 밤이 되니 춥다. 요상한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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