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법

day3(24). Ponferrada

by 황사공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열댓 명 남짓이 함께 쓴 이 넓은 방은 고요하고 편안했다. 은은한 아로마 향기와 편안하고 낮은 매트리스가 숙면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몹시 개운한 아침이다.


방이 아직 어둡다. 몇 시나 됐나 싶어 시계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7시 30분! 맙소사.


이 방에는 암막커튼이 쳐져 있어서 어두웠던 것이었고 실제로는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혼자였다면 늦지 않은 시간이지만 아틸라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서둘러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콜린과 마르셀, 폴 등은 이미 출발하고 없었다. 부지런한 사람들! 알베르게에서 주는 간단한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 하나를 포장했다. 나는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직전 마을에서 출발한 순례자들이 하나 둘 커피를 마시러 알베르게로 들어왔다. 내가 늦긴 늦은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 아틸라는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가방을 메고 아틸라가 있는 알베르게로 올라갔다.


어라, 그런데 아틸라의 침대가 비어있다. 설마 먼저 출발한 건가? 혼자 당황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 호스피탈 레로 가 나에게 친구는 테라스에 있다고 말해준다.



"고맙습니다! (그라시아스~)"



그는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 중턱에 있는 알베르게의 탁 트인 전망은 정말 훌륭했다. 갓 피어오른 아침 안개로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좋은 아침! (부에노스 디아스)"



그가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그에게 다가가 가볍게 볼인사를 한다. 해가 조금 있으면 떠오를 것 같다. 저 구름 너머가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일출이다.



"우리 일출 장면 보고 갈까? 괜찮아? "


"당연하지! "



우리는 어제저녁에 앉았던 소파에 다시 나란히 앉았다. 어젯밤 돌아가는 길에 만난 소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화제를 먹은 일도 이야기했다. 그는 내가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니라고, 잘라 낸 게 더 많다고 말했지만 어쩐지 민망했다. 음.. 내숭을 좀 떨었어야 했나? 아무튼 그와 함께 있는 아침도 기분이 좋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이길!



120FA7404FC050A7186BBC 폰세바돈의 아름다운 일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얼굴에, 그리고 나의 얼굴에 아침 햇살의 보드라운 주황빛이 묻는다. 내 생애 최고의 일출이었다. 그에게도 그러했던 것 같다.


우리는 바보처럼 입 벌리고 서서 느리게 올라오는 해를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해가 전해준 에너지는 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까지 들어가 박혔다. 또다시 내 마음이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레온에서 하루 더 머물고 친구들을 먼저 보내길 너무 잘한 것 같다. 그전까지 느낄 수 없었던 이 엄청난 환희들을 벌써 두 번이나 느꼈으니 말이다.



해가 떠 오르고, 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일출이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밖으로 나갔다. 아까 나에게 아틸라가 테라스에 있다는 걸 알려준 아주머니가 우릴 보고 웃어준다.



207E0D404FC050C02BCBA7 해가 떠오른 뒤 시작한 오늘의 걷기


저 앞에는 달이 떠 있다. 아침 공기도, 하늘도, 그리고 그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몹시 상쾌하다.


둘이서 신나게 걷다 보니 그 유명한 아이언 십자가가 나왔다. 기대했던 것보다 몹시 허름한 모양이다. 그리고 듣던 대로 십자가 아래는 순례자들이 놓고 간 돌들과 짐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분명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어떤 것들이었겠지만, 그것들이 모여있는 그곳은 마치 쓰레기장 같았다.



150176404FC050D82B9BBB 산 정상의 아이언 크로스 혹은 죄의 무덤



자신의 집에서부터 가져온 안 좋은 물건을 내려놓는 곳, 자신의 죄를 내려놓는 곳. 어쩐지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듯 해 십자가까지 올라가 보진 않았다. 수십만, 아니 수천만의 죄들이 이 곳에 내려져 있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독일인 할아버지 게하트가 생각이 났다.


집에서부터 이 곳에 돌을 내려놓기 위해 몇천 키로를 걷고 있는 그는 이 곳에 그 돌을 내려놓았을까? 돌을 내려놓은 다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을까?


그에게는 분명 이 곳이 나와는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가 돌을 이 곳에 내려놓고 집에서부터 가져온 마음의 짐도 함께 내려놓길 기도했다. 너무 허무하게 모든 것이 끝나버려 그가 더 상심하지 않길 기도했다.




엊그제 치료한 물집에 붙어있던 반창고가 너덜너덜 해 져 있었다. 아틸라에게 나는 수선을 요청했고,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발가락을 다시 정비했다. 고통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프다. 오늘은 올라온 산을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플립플랍을 신을 수 없었고, 아프고 뜨거운 발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한다. 괴롭고 힘들겠지만 늘 그랬듯이 나는 갈 수 있을 것이다. 파이팅!






아이언 십자가에서 능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가 내리막이 시작되려는 시점쯤에는 수도사들이 만들어 놓은 작은 알베르게가 있었다. 이곳은 파라다이스처럼 전기도 없고 불도 없는, 산 정상에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개조해 놓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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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까지 222km, 와우! 벌써 600 여 킬로미터를 걸어왔다니! 금세 흘러간 듯한 시간인데, 600 킬로미터를 걸어왔다 생각하니 뭔가 엄청나게 느껴진다. 알베르게에서 기부로 제공하는 쿠키와 커피, 그리고 약간의 과일을 먹으며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어깨를 풀어주고 있는데, 옆에 있던 아틸라가 어깨가 아프냐고 묻는다.


"약간, 늘 그렇지 뭐. "


"마사지 좀 해줄까?"


"좋지! 고마워!"



이 곳에서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호의를 거절하지 않는 법 이었다. 거절하는 것이 예의였던 우리나라와 가장 다른 것 중 하나, 거절은 일종의 모독이라 받아들이는 이 곳 사람들에게 이유 없는 거절은 피해야 할 행동 1순위였다. 마음에 없으면 권하지 않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늘 예의상 물어보고, 예의상 대답한다. 그놈의 예의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곳 사람들은 늘 진심으로 물어보고 진심으로 대답했다. 늘 진심으로 대하는 그들에게 예의로 답하는 우리는 낯선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


마사지 자격증까지 보유하고 있는 그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부드럽고 시원하게 풀어준다. 기분이 다시 좋아지는 것 같다. 그때 누가 나의 이름을 부른다.


"지니! "


히데오상 이었다.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 서로를 끌어안고 인사했다.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다시 만날 줄 알았노라 얘기했다. 그를 다시 보다니! 정말 너무너무 반가웠다. 레온에서 받은 그의 쪽지의 답장으로 써 둔 편지를 전해줬다. 레온에서 인사를 못하고 헤어지게 되어 이렇게 편지를 써 두었노라고,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노라 말했다.



히데오상은 아직도 다리가 많이 아팠다. 그는 물집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근육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종아리 앞의 뼈 쪽이 아프다고 하는데, 너무 아파서 걷기도 힘들 정도라고 했다. 이야기를 들은 아틸라가 그건 너무 빨리 걸으려고 하는 마음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마음을 편히 먹고 천천히 걸어야 한다 말했다. 그리고 그에게 도움이 될 거라며 어떤 약 하나를 전해줬다. 알약으로 된 근육통 약인 것 같다.



서로가 서로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에는 그 사람이 누구고 어떤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믿음, 그것으로 충분했다.



180A9F404FC05112216155 히데오와 나



다시 만난 것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물론 또다시 만나게 되겠지만 말이다.


아틸라와 함께 걷는 것은 좋았지만 곤란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바로 화장실! 혼자 다니면 모든 곳이 나의 화장실이지만 함께 다니면 그게 좀 곤란했다. 가능하면 지나가다 들리는 곳에서 화장실을 들렀다 가야겠다 생각했고, 호스피탈레로에게 화장실을 물어보니 어딘가를 가리킨다. 화장실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은 저 숲 속 어딘가를 말이다. 일단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설마 저게 화장실인가?



197D8F404FC0512F315258 숲 속의 화장실의 바깥



무슨 창고나 헛간인 줄 알았지만 화장실이었다. 들어서는 순간 웃음이 나 혼자 낄낄대고 웃고 말았다. 뭔가 뚫려 있는 듯한 화장실, 뒷 벽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그런지 냄새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있을 건 다 있다. 이런 산속에 이런 화장실을 지어놓았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재치 있어 보였다. 뚫린 뒷벽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산을 바라보며 볼일을 보는 것도 꽤나 새롭고 유쾌하다.




20037D404FC0514F2B1CAE 숲 속의 화장실의 안쪽



휴식을 끝내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가겠노라며 먼저 성큼성큼 가고 있었고, 나는 히데오상과 함께 천천히 길을 걸었다. 혼자 걸은 시간들과 모든 것이 달라져버린 지금의 카미노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으로 충만하던 파라다이스와 멋들어진 오늘 아침의 일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아스팔트 길이 얼마나 힘든지를 이야기했고, 어젯밤 성당 알베르게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이야기를 했다. 그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이 늘 그러하듯 소소한 일상들을 나눴다. 우리가 친구가 됨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1579BA404FC0516A340566 히데오상의 뒷모습



다리가 아픈 히데오상이 오늘 가야 할 급경사 내리막길을 잘 걸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를 지켜보며 함께 걸어야겠다 생각하며 천천히 그를 뒤따라 갔다. 이제 급경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찔한 내리막길이다. 아틸라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히데오상에게 천천히 조심히 오라고 하고 우리도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무거운 배낭과 마른땅, 굴러다니는 돌과 급경사 내리막. 그 길은 나에게도 너무 어려웠다. 한 발짝 한 발짝 떼는 것이 몹시 조심스러웠고, 길과 발에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발가락이 다시 아파온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참고 걸어야지.



한 시간여를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왔다. 신경을 많이 써서 그런지 평소보다 더 힘든 것 같다. 밑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오렌지주스를 하나 사서 샌드위치와 함께 먹었다.


하지만 내리막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다음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또 내리막길을 걸어야 한다. 그래도 가장 가파른 코스는 끝이 났다. 조금 다행이다.



함께 음식을 먹고 쉬고 있는데 슬로베니아에서 온 부부를 다시 만났다. 하두 자주 마주쳐서 낯은 익었지만 이름을 물을 수가 없었다. 진작에 물었어야 했을 이름, 아니면 내가 물어봤었는데 까먹었을 확률도 높다. 아무튼 그렇게 또 이름을 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틸라가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한다.


슬로베니아와 헝가리, 난 몰랐는데 예전에는 한 나라였다고 한다. 와우!

그래서 그들은 몹시 친했다. 다행이다. 아틸라에게 살짝 저들의 이름을 물어본다.



1607AA404FC05186256D83 슬로베니아 부부 - 나다와 아녜스



나다와 야네스, 늘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 부부였다. 느긋했고 여유가 있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였다. 나도 나중에 나이가 들어 남편과 함께 이 길을 오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보기 좋은 커플이다.


히데오상은 마을에 있는 교회에 들리고, 아틸라와 나는 길을 다시 나섰다. 평소에 빨리 걷는다 얘기했던 그는 오늘 전혀 빨리 걷지 않았다. 나의 속도와 너무 잘 맞는 것이 그의 작은 배려였다는 것을 그땐 미처 몰랐었다.



157742404FC0519F0D3CAB 마을 입구의 다리



내리막이 끝나니 동화 속에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다. 아름다운 마을... 도 좋지만 긴 내리막길로 인해 불덩이가 되어버린 내 다리는 휴식이 절실했다. 다리 아래로 내려가 양말을 벗고 개울에 발을 담가 버렸다. 새빨갛게 달궈져 있던 내 발가락들이 이제야 조금 살겠노라 한숨을 쉬는 듯하다.


다리에 테러를 당한 나를 대신해 아틸라가 콜라를 사 왔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콜라를 마시며 히데오상을 기다렸다. 나다와 야네스가 나타났다. 쉬어가는 곳에서는 언제든 만날 수 있다. 여유로운 순례자 부부니까. 히데오상을 봤냐는 물음에 아까 함께 본 이후로 못 봤다고 얘기한다. 시간상으로는 분명 다 내려와야 하는 시간인데 아직까지 오지 않는 그가 걱정이다.


삼십 분여를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걱정되었지만 우리는 6km를 더 걸어야 했기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곳에서 머물 예정이라는 나다와 야네스에게 행여 히데 오상을 보게 되면 안부를 전해달라 말하고 출발한다.



히데오상과 내가 친구가 된 사연들에 대해 얘기를 해 주며 길을 걷고 있었다. 예쁜 마을의 끄트머리에 다 달았을 때, 누군가가 또 나를 부른다.


"지니! 지니! "


오 마이 갓! 그렇게 기다렸던 히데오상이 갓 씻고 나온 말끔한 모습으로 저쪽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마을 끄트머리에 있는 알베르게였다. 그는 진작에 이 곳에 짐을 풀고 씻고 빨래를 하러 가는 참이라고 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가 하나뿐인데 어떻게 그를 놓친 걸까?


다음 마을까지 가겠다는 우리에게 그는 맥주 한잔을 권했다. 아틸라는 맥주를 마신 뒤 걷는 마지막 6km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어 맥주를 꺼려했다. 나야 물론 Sure, Why not?이다. 딱 한잔만, 그것도 클라라로 먹겠다고 얘기하며 아틸라도 앉는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틸라는 신기한 모양이었다. 한국어로 얘기하고 아틸라에게 번역해줬다. 예전에 루이스가 하던 것처럼 말이다. 잠시 루이스가 생각난다. 내가 그를 느꼈던 것처럼 아틸라도 나를 느껴주면 좋겠다.


화장실을 들렀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꼭 다시 보자며 히데오상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다음 마을까지는 두 가지의 길이 있었다. 7km짜리 밭길과 5km짜리 아스팔트 길. 우리는 둘 다 아스팔트 길을 선택했다. 이미 다섯 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 빨리 도착하는 것 만이 살 길이었다.


아틸라는 이렇게 늦게 마을에 도착해 본 적이 없노라며, 중간중간 길게 쉬는 것은 좋은데 마지막이 너무 힘들다 이야기한다. 날 더러 너무 느리다고 구박하면서 말이다.


"빨리 가면 좋을게 뭐가 있어? 할 일도 없잖아. 늦게 가면 얼마나 좋은데. 친구들이 밥도 다 해놓고 기다린다고! "


내 말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알겠어. 막 그렇게 나쁘지는 않네. 길 위에서 12시간을 보내는 게 말이야."


진심인지 뭔지 알 수 없다.




걸을 땐 정말 죽을 것 같지만, 결국은 목적지에 도착하고야 만다. 그렇게 600 km를 걸어왔지만, 아직도 그 힘든 하루하루에 익숙해지진 않았나 보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이미 6시. 꽤나 늦은 시간이다.


폰페라다는 큰 도시였고, 시립 알베르게도 큰 규모여서 아직 침대가 남아 있었다. 일찍 온 사람들은 신설된 좋은 방이었지만 늦게 온 우리는 커다란 홀에 백개가 넘는 침대가 있는 듯한 방으로 안내받았다. 침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뒤늦게 도착한 우리를 보고 마르쉘이 놀란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아이티가 나와 아틸라를 보고 마르쉘과 무어라 귓속말을 한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는 마르쉘의 물음에 아틸라가 "Because of her "이라 대답한다.

한 시간 걷고 한 시간 쉬고, 만나는 사람과 모두 이야기하고 걷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며 한숨을 쉰다.


늘 그랬던 나에겐 당연한 일이었는데 다들 놀란다. 이상한 건가..?


마르쉘과 아이티, 그리고 폴과 콜린은 이제 도시를 한 바퀴 돌러 나갈 예정이라며, 저녁 생각 있으면 7시 30분까지 어디로 오라 얘기한다. 알겠다 대답하고 짐부터 푼다. 내가 아래, 아틸라가 위다.


씻고 나오는 길에 예쁘장하게 생긴 한 여자 순례자를 만났다. 뒤늦게 씻은 두 명의 순례자였다. 남아프리카에서 온 샘이었다. 나와 동갑이었고, 그녀도 회사를 때려치우고 이 길을 걷는 중이라고 했다. 레온에서부터 시작했고, 걷기 시작한 지 10일 째라고 했다.


열흘이라고?? 남들은 사흘 만에 걷는 길을 열흘 동안 걷고 있는 그녀는 하루에 10km, 오늘은 6km를 걸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본 모든 순례자 중 가장 느긋했다. 어쩐지 그녀의 느낌이 좋다. 처음 만난 동갑 여자아이, 아프리카 사람, 그리고 행복한 미소. 그녀와 사진 한 장 못 찍은 것이 아직까지 아쉽다.



잠시 쉬다가 아틸라와 함께 주방으로 올라갔다. 자판기에서 콜라를 하나 뽑았는데 꺼내려고 보니 콜라가 두 개가 들어있었다. 럭키! 콜라 하나씩을 들고서 알베르게 마당에 있는 분수에 발을 담근 채 콜라와 쿠키를 먹었다.


이탈리아에서 온 철없는 20살짜리 가스도 만났다. 돈가스도 아니고... 이름이 웃기다. 아디다스 운동화를 신고 레온에서부터 걷고 있는 가스는, 이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이 너무 자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그는 한쪽 운동화가 밑창이 떨어져 신고 걸을 수 없는 상태인데, 이 신발로 꼭 카미노를 끝내고 말겠다 말한다.


젊은이 특유의 허풍과 오만이 가득한 시끄러운 이탈리아노다. 얼굴은 꽤 귀엽다. 귀여우니 봐준다.


어제 나에게 아틸라의 메시지를 전해준 금발의 폴란드 여자아이도 다시 만났다. 네 명이 일행이었는데, 축구 유니폼을 입은 남자아이 두 명이 몹시 잘생겼었다.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이다. 묻지 않아도 그네들이 20살도 안되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틸라와 아는 사이인 그들은 아틸라와 나를 그들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것 봐, 내가 늦게 오면 친구들이 저녁 만들어 놓는다고 했지?"


"정말이네, 와우. 무챠스 그라시아스 ~ "



어쩐지 행운이 가득한 하루였다. 자판기의 콜라도 그랬고 저녁식사도 그랬다. 폴란드 친구들이 준비한 신선한 샐러드와 파스타를 우리는 함께 먹었다. 케샤가 만들어 주던 것보다 맛있었다.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분위기, 그리고 새로운 기분.


아무래도 레온에서 부터의 카미노를 시즌 2로 불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그 전과 너무도 달랐다. 그리고 루이스로 차 있던 마음에 조금씩 아틸라가 들어오고 있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설거지는 아틸라와 내가 했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 먹을 식량을 사기 위해 슈퍼마켓엘 갔다. 내일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겠노라 말했던 아틸라는 뭔가 매운맛이 나는 것을 찾고 있었다. 헝가리안들은 매운맛을 좋아한다. 유럽에서 만나보기 힘든 식성이었지만 정말 반가웠다.


슈퍼마켓을 몇 바퀴 돌고서야 우리는 타바스코처럼 생긴 핫소스 하나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는 완벽하다며 만족했고, 빵과 모짜렐라, 토마토를 함께 구입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나눠먹으면 좋겠다며 그는 2리터짜리 샹그리아를 집어 든다. 2유로, 행복한 가격이다.



숙소로 돌아갔다. 이미 알베르게 앞 정원에는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은 폴란드 친구들이 있는 곳에 합류했다. 그곳에는 처음 보는 금발의 40대쯤 되어 보이는 여자도 앉아 있었다. 덴마크에서 온 프레야, 그녀도 레온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열명 정도가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난 그냥 조용히 앉아 샹그리아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들을 뿐이다. 한국에선 늘 분위기를 주도했던 나였으나 이 곳에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 모습이 좋았다.


프레야와 아틸라가 꽤나 길게 이야기를 나눈다.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도 에너지를 공부하고 요가를 하고 마사지 자격증이 있다고 한다. 뭔가 옐로 밤부라는 에너지의 한 종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나는 너무 피곤해 눈이 막 감기고 있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는 혼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가 누웠다. 다시 나가서 앉아있을 자신이 없다.


아틸라에게 인사를 못하고 온 게 미안해 그의 베개에 쪽지를 남겼다.


"Thanks for today, Good night! "


그러고는 금세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뭔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아틸라가 쪽지를 들고 날 보며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Good night, Thank you."


그리고 내 이마에 뽀뽀를 해 준다.


코를 골고 부스럭거리는 수십 명의 순례자가 있었지만, 그 잠깐 동안은 우리 둘만 있는 듯했다.


Good night,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피곤해 속으로 굿나잇을 말하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 날은 아마 좋은 꿈을 꾸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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