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4(25). Villafranca del Bierzo
'아.. 시끄러워. '
우리 옆 침대를 쓰던 자전거를 타는 스페니쉬 순례자들의 말소리가 몹시 시끄럽다. 코 고는 소리도 시끄러워 밤에도 꽤나 곤욕을 치렀는데, 아침에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그들을 보니 그저 어이가 없다. 어차피 푹 자기는 힘든 환경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배려 없는 모습들은 정말 싫다.
아틸라는 아직 침대에 있는 것 같다. 큰 덩치와 맞지 않게 밤새 전혀 미동이 없었다. 행여나 나의 움직임이 그를 깨울까 봐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스트레칭을 한다. 그러자 침대가 조금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아틸라가 아래로 내려와 나에게 아침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부에노스 디아스) "
아침에 보는 그도 반갑다. 어쩐지 마음이 조금 설레는 것 같다.
씻고 짐을 챙겨 주방으로 올라갔다. 아틸라가 이미 이것저것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젯밤엔 너무 피곤해서 다시 나갈 수가 없었노라고, 말하지 않고 먼저 들어가 미안하다 말했다. 괜찮다 말하던 그가 갑자기 손을 내민다. 거기엔 살짝 베인 자국이 있었다. 어제 내가 마시던 샹그리아 컵이 조금 깨져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씻다가 베였다고 한다. 아 미안해라...
"네가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내가 다쳤어. 너 때문이야."
"미안해. 근데 니 덩치에 비해 너무 작은 상처 같은데, 그렇지 않아? "
"물론 ~ 이 정돈 아무것도 아니지."
하여튼 나는 참 말을 이쁘게 하지 않는 스타일이라니까.. 그냥 미안하다고 괜찮냐고 하면 될 걸 꼭 이런 식으로 말하고 만다. 못살아 내가.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의 삐뚤어진 애정표현이겠지.
어제 산 재료로 아틸라가 샌드위치를 만든다. 바게트에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넣고 토마토를 썰어서 올린다. 그리고 핫소스를 적당히 뿌리니 그럴듯한 샌드위치가 완성됐다. 두 개는 점심을 위해 포장을 해 놓고 남은 샌드위치를 올리브와 함께 먹는다. 엄청 맛있다. 내가 좋아하는 깔끔한 맛이다. 거기에 살짝 맵기까지!
왜 진작에 이렇게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을 못했던 걸까? 햄치즈 샌드위치에 질려가고 있었는데, 이건 정말 새로운 발견이었다. 모차렐라 치즈와 토마토, 그리고 핫소스가 가져다준 획기적인 맛 이었다. 감동이다.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아틸라는 담배를 한대 피고 가겠다고 얘기했다.
기다려야 할까?
순간 그를 기다려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그의 옆에 폴란드 친구들이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먼저 가겠노라 말했다. 오늘은 같이 걷자고 말한 것도 아니었고.. 뭔가 기다려야 할 만한 이유가 없는 듯했다. 오늘도 함께 걷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으니까.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았다.
천천히 가고 있을 테니 조금 있다 보자고 말하고 알베르게를 나섰다. 발가락이 아직도 아프다.
오늘 아침에도 달이 떠 있다. 달을 보고 시작하고 해를 보고 끝나는 하루하루이다. 이른 아침의 선선한 공기에 기분이 상쾌해진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가며 천천히 길을 걷는다.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있는 큰 성당에서 히데오상을 만났다. 그는 일행 한 명과 같이 있었다. 오늘도 히데오상은 아침 일찍 출발을 해 7km를 걸어온 상태였다. 나는 이제 출발하는 길인데 말이다. 정말 부지런한 순례자이다. 교회에 들려야 한다는 그에게 나중에 보자 인사를 하고 다시 길을 걷는다.
성당을 홍보하는 한 할머니를 만났고, 괜스레 이런저런 말을 거는 미국에서 온 순례자도 만났다. 적당히 대답을 해 가며 혼자임을 유지했다. 아틸라가 곧 나를 따라잡을 테니까.
한 시간쯤 걸었을까? 아틸라가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 다른 친구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느린 나를 따라잡지 못할 리가 없을 테니.
뒤를 돌아봤다가 아틸라가 뒤를 돌아보는 나를 보게 될까 싶어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어쩐지 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싫었고, 그에게 알리기도 싫었다.
이건 뭐 하자는 감정일까? 당혹스럽다.
다음 마을을 조금 앞둔 지점에서 마침내 그는 나를 따라잡고 말았다.
"Hola ~"
그를 기다리긴 했나 보다. 그의 등장이 몹시 반가운 것을 보니 말이다.
서로의 컨디션을 묻고서는, 다음 마을에서 커피를 먹자고 얘기한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노라 말하며 아틸라가 휘파람을 불며 걷기 시작했다. 다리가 길어서 나보다 확실히 빠르다. 조금씩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걸었다. 언제 날 따라잡을까 신경 써가며 앞서 걸을 때보다 훨씬 맘이 편하다.
어랏! 근데 다음 마을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커피가 아직 먹고 싶지 않았던 나는 아틸라가 바에 들어가기 전에 그를 따라잡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는 이미 꽤 멀리 있었지만, 그를 빨리 따라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엄청 빨리 걷기 시작했다. 목표가 있을 때 사람은 놀라운 힘을 발휘하곤 한다. 나는 다음 마을에 들어서기도 전에 아틸라를 따라잡고야 말았다.
"헤이 ~ "
바로 뒤에 있는 나를 보고 아틸라가 깜짝 놀랐다.
"엇!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
"네가 안 볼 때 날아왔지. "
아직 커피가 먹고 싶지 않아 빨리 왔다고, 다음 마을에서 커피를 마시자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는 여전히 내가 엄청나게 빨리 걸어서 그를 따라잡은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함께 천천히 걸었다.
어젯밤 아틸라는 폴과 마르셀과 함께 내일 걸어갈 길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내일이면 우리는 또 하나의 산을 넘게 되는데, 그 산을 넘기 위한 길이 3가지가 있다고 한다.
쉽고 평범한 길,
약간 험하지만 숲으로 걷는 길,
그리고 드래곤 웨이라고 불리는 몹시 험하지만 대자연을 느낄 수 있는 길이 그 세 가지였다.
내 책에는 쉽고 평범한 1번 길 밖에 나와있지 않아 몰랐는데 외국책에는 드래곤 웨이에 대한 설명이 꽤나 상세히 되어있는 듯했다. 도전을 좋아하는 아틸라는 마르셀, 폴과 함께 내일 드래곤 웨이로 가기로 했고, 그 길 끝에 있는 알베르게는 아주 작은 규모라 미리 전화로 예약을 했다고 한다. 스페인어가 되는 폴이 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나에게 드래곤 웨이로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다.
음...
..
.
고민이 된다. 하지만 그냥 아틸라와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사실 나 역시 드래곤 웨이가 궁금했지만, 몹시 가파르다고 하는 그 길을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엉망이 된 발과 무거운 배낭을 메고서 말이다.
"나를 위해 그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 것 같아. 하지만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라고 대답을 했지만, 내 머리는 아틸라와 이제 그만 걸어야 하나보다..라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우습다. 오늘은 그를 만난 지 고작 사흘째다. 그런데 그와 정말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듯한 기분이다. 한 사람과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떨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예전의 친구들에게서 느꼈던 이제 그만 헤어져야겠다는 기분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다. 그가 더 좋아질 것 같아서, 그와 더 가까워질 것 같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자 얘기하고 그냥 길을 걸었다.
"같이 걸으니까 훨씬 좋다! "
"응 나도. "
..
다음 마을에 있는 바로 들어갔다. 나는 카페 솔로 라르고(아메리카노), 아틸라는 카페 콘 레체(라테).
바의 바깥에 있는 의자에 앉아 커피와 쿠키를 먹는다. 아직 아침 11시도 안된 시간이지만 햇살이 제법 뜨겁다. 히데오상이 우리를 지나갔다. 그는 새로운 일행을 만났다. 그와 비슷한 또래를 만나서 즐거워 보인다.
아마 다시 만나게 되리라!
말 한 마리가 풀밭에 누워 있다. 처음에는 말이 죽은 줄 알고 완전 깜짝 놀랐었다. 하지만 말은 그저 낮잠을 자고 있을 뿐이었다. 늘 다리를 곱게 접고 앉아있던 소의 모습만 봤던 터라 누워있는 말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고 신기하다.
조금 더 걷다가 나온 캠핑장에서 우리는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이미 몇몇 순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순례자들을 피해 잔디밭 끝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아침에 싸온 샌드위치를 다시 감탄하며 먹고서는, 잔디밭에 드러누워 버렸다.
어쩐지 으스스한 마른 나뭇가지가 내 눈앞에 있다.
아틸라는 벤치에 누워서 잔디밭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씩 웃는다.
내일이면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어쩐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살짝의 죄책감을 갖고 있던 나는, 다시 혼자가 되리라 마음을 먹는 중이었다.
만약 그와 어떤 운명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아무런 기약이 없어도 그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
"나 부탁이 있어."
"뭔데?"
"네 가방에 달려있는 헝가리안 리본 나에게 조금 줄 수 있어? "
내일이면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조금이라도 더 기억할 수 있게 해 줄 뭔가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가방에 달려있던 헝가리 국기와 같은 색깔의 리본을 조금만 달라고 그에게 얘기했다.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널 오래 기억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는 내 속마음을 그에게 말하진 못했다. 그냥 리본이 예뻐서, 또 헝가리안 친구가 있음을 자랑하고 싶어 그러노라 말했다. 그는 그 사실에 몹시 기뻐하는 듯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헝가리안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런 토종 헝가리인인 아틸라에게 '헝가리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그를 몹시 기쁘게 해 주는 일이었다.
그는 흔쾌히 리본의 끝자락을 나에게 줬고, 나는 내 조개껍데기에 달 수 있을 만큼 조금을 잘라냈다.
빨강 하양 초록의 가로줄, 유럽의 배꼽 헝가리. 그리고 나는 헝가리를 좋아하는 한국인이다!
(빨강 하양 초록의 세로줄은 이탈리아의 국기다. 헝가리안과 이탈리안 모두에게 실수하지 않으려면 체크해둬야 한다!)
아주 조금을 잘라내놓고 저렇게 리본을 만들어 내는 나를 아틸라가 몹시 기특해한다. 너무 예쁘다고 칭찬해주는 아틸라 덕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 마음에도 쏙 든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내 배낭에 달린 헝가리 국기로 여러 가지 상황극을 만들어가며 둘이서 재밌게 길을 걸었다. 상황극 속에서 나는 아주 잘생기고 착하고 성격 좋은 헝가리안 친구에 대해 그에게 설명을 해 줬고, 그는 조그맣고 예쁘고 강인한 한국인 친구에 대해 나에게 설명했다.
누가 먼저 하잔것도 아닌데 우린 그러고 놀고 있었다. 정말 잘 맞는 한쌍의 순례자들이다.
다음 마을에서 아틸라는 담배를 샀다. 이 곳에서는 주로 곽에 들어있는 담배보다는 말아서 피는 담배를 많이 피운다. 담배를 안 피우는 나는 그 맛의 차이 따위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이 곳의 골드 버지니아라는 잎담배가 정말 깔끔하고 훌륭한 맛이라며 조금 비싸도 그 담배를 찾아 피고 있었다. 아틸라 역시 골드 버지니아를 찾아 타바코 샵을 돌아다니다 결국 득템 했다.
페이퍼에 돌돌 말아 침을 묻혀 종이의 끝부분을 붙이고, (아마 우표처럼 풀이 붙어있는 것 같다.) 담배를 피울 때 그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여유로움과 행복감이 가득한 얼굴이란!
나는 그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좋았다. 세상 모든 근심을 내려놓은 듯 행복해 보이던 그 모습이 정말 맘에 든다.
그 마을에서 우리는 콜린을 다시 만났다. 어쩐지 그는 운 듯한 얼굴이었다. 콜린은 자주 길 위에서 운다며 사람들이 얘기를 했었다. 방금 교회에서 나온듯한 콜린은 오늘도 울고야 말았나 보다.
남자의 눈물. 무뚝뚝한 중년의 영국 신사는 무엇이 그리도 슬픈 것일까.
아틸라와 콜린이 이야기를 하며 함께 걷는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걷는다. 레온에서 헤어진 그들의 다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문득 루이스가 생각난다. 까뜨린도 생각난다.
케샤, 굴리, 안토넬로... 그 친구들은 지금쯤 어딜 걷고 있을까?
그리고 루이스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레온 이후의 이 완전히 새로운 나의 카미노에 대해 다음번에 꼭 루이스에게 알려줘야겠다 생각하며 길을 걸었다. 루이스도, 아틸라도, 마치 내겐 어떤 운명과도 같은 존재들 같이 느껴진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내가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아닐까?
아틸라가 앞서 걷고 콜린과 내가 뒤쳐진다. 콜린과 둘이 함께 걷게 되었다. 윽.. 영어 울렁증이 도진다. 영어권에서 온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너무 어렵다. 특히 콜린의 맨체스터식 악센트는 낯설기 그지없다. 가급적 말을 안 해야지..라고 마음먹었지만 오래가진 않는다.
"너의 카미노는 어떻니?"
조금 낯선 질문이다. 잠시 동안 생각했다. 나의 카미노는 어떤 걸까?
사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노라 말한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무엇을 얻고자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다 이 길을 오게 된 것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저 나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고, 이 곳에 와야 할 것만 같아 오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 곳은 내가 생각했던 곳과 많이 다르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이 길이 너무 좋고,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좋은 쪽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다 말한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그저 기적 같은 길이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넌 어때?라는 질문도 빼먹지 않았다.
그의 눈물의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다. 누구도 듣지 못한 이야기니 말이다. 그는 그저 이 길에서 그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다 말했다. 그리고 그 내려놓음의 순간마다 눈물이 나와 참 많이 울게 된다 말한다.
아마 내가 그의 눈물을 보았음을 의식했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참 많이 울게 된다는 남자 어른의 말. 이 길 위에서 우는 사람은 참 많다.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이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아틸라 역시 이 길 위에서 펑펑 운 적이 있다고 하니, 이 길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
정말 미친 듯이 엉엉 울고 나서 다시 태어남을 느꼈다는 수많은 순례자들, 그리고 내 주변의 사람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그들보다는 고통이 덜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언젠가 가까운 미래에 나 또한 이 길 위에서 눈물을 쏟을 날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렇게 될 것 같다.
마지막 마을로 가는 길은 또 두 가지로 갈라지고 있었다.
아스팔트로 된 조금 짧은 길과 흙으로 된 언덕길. 그리고 아틸라와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마른 언덕을 조금 넘어가니 끝없이 넓은 포도밭이 다시 나타났다. 오래간만에 만난 포도밭이다. 백포도 한송이와 적포도 한송이를 한 손에 하나씩 쥐고 따 먹으며 길을 걷는다.
이 길을 처음 걸을 때 먹었던 포도에 비해 맛이 제법 깊어졌다. 백포도의 그 달콤함이란!
포도의 당분이 약간의 에너지를 가져다주긴 했지만 타는듯한 뜨거움을 식혀주진 못했다. 금세 질려버린 포도는 입 안의 끈끈함만 남긴 채 버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끝이 없을 것만 같던 포도밭에서 우리는 어젯밤에 만났던 덴마크에서 온 금발의 프레야를 다시 만났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정말 멋졌다. 깃털처럼 가벼웠고 한 마리의 황새처럼 우아했다. 우리는 함께 포도를 따 먹으며 길을 걸었다. 덴마크에서 온 그녀에게 루이스에게서 받은 행운의 동전을 보여줬다. 덴마크라고 동전에도 떡 하니 적혀있는데 어쩐지 진짜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디서 났냐는 그녀의 질문에 루이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것은 기적의 동전이라고 말하며 말이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아틸라도 신기해했다. 아틸라와 루이스도 몇 번 마주쳤을 텐데 그는 루이스를 기억하지 못했다. 이 둘이 서로를 알았더라면 분명히 좋은 친구가 됐을 것이다.
갑자기 아틸라가 무엇인가를 나에게 준다. 헝가리안 동전이다. 10 포린트.
"그냥, 하나 가지고 있어."
내가 루이스의 동전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보다. 귀엽다.
아틸라와 프레야는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아틸라가 프레야에게 너의 에너지는 좀 강한 것 같다 말한다. 아마 그럴 거라고, 나 역시 에너지를 이용한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 말하던 프레야는 자신의 직업은 섹스 테라피스트라 얘기했다.
".."
"어쩐지. 섹슈얼 에너지가 너무 강하다 했어."
당황한 건 나뿐이다. 섹스, 섹슈얼이라는 단어를 평상시에 거의 사용하지 않던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고 말았다. 당황해도 그저 가만히 있었지만 말이다. 아틸라는 담담하게 그녀와 잘도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녀가 직업을 밝히고 나면 나중에 은밀히 그녀를 찾아와 자신들의 성적인 문제에 대해 상담하는 순례자들이 많다고 했다. 그럴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길 위에서 만난 섹스 테라피스트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에 부담이 없지 싶다. 아무튼 아틸라와 프레야는 마사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탄트라 마사지니 섹슈얼 마사지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틸라가 갖고 있는 자격증은 일반 마사지 자격증이고, 프레야가 갖고 있는 자격증은 탄트라 마사지에 대한 것이었다.
탄트라 요가 강사였던 굴리 덕에 탄트라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조금 알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들의 대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흥미로운 대화는 곧 끝이 났다. 프레야가 자신은 조금 쉬다가 가겠노라 말했고, 우리는 나중에 보자 말하고 길을 걸었다. 아틸라가 조금 앞서고 난 뒤따라 걷는다. 오늘도 여전히 뜨겁고 메마른 오후다.
산을 오르기 전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인 Villafranca del Bierzo 에 도착했다. 우리는 폴과 마르셀이 묵고 있는 알베르게를 찾아야 했다. 아틸라는 내일 그들과 함께 드래곤 웨이를 찾아 떠날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알베르게로 들어가 숙박객 명단을 확인했다. 예쁜 알베르게였지만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마을을 몇 바퀴를 돌아 우리는 다리 건너편에 있는 작은 알베르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친구들의 이름은 찾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우리를 위한 침대는 없었다.
아틸라는 폴에게 왔다가 침대가 없어서 다른 숙소로 가니 휴대폰으로 연락을 달라고 메모를 남겼다. 그리고 우리는 친절한 호스피탈 레로의 안내에 따라 마을 입구에 있는 시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 알베르게에서 마을 입구에 있는 시립 알베르게까지의 거리가 2km라고 했다. 그리고 힘이 빠져 더 걷지 못할 우리에게 친절한 호스피탈 레로는 차로 태워주겠노라 말한다.
으헛.. 자동차라니! 그것도 에어컨이 나오는! 정말 너무 오랜만에 타는 자동차라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을 걸어 지나온 길을 순식간에 지나쳐 가게 되니 웃음이 나왔다. 자동차에 이렇게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긴 처음인 것 같다.
뒤늦게 찾아 간 시립 알베르게에는 프레야가 있었다. 그리고 자주 마주치던 슬로베니아 부부 나다와 야네스도 있었다. 아틸라와 나란히 2층 침대를 배정받고, 함께 짧은 낮잠을 잤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보니 아틸라가 없다. 아래로 내려가니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며 나다와 야네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던 슬로베니아인 할아버지 야네스는 나를 보고서는 치카, 치키타, 치키티타라고 말하며 사진의 손녀딸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손녀딸을 말이다.
아틸라가 치키티타라는 단어가 나랑 딱 어울린다 말한다. 그리고 나를 치키티타라 부르며 놀린다. 정말.. 난 한국에서는 그래도 보통이라고 우겨보지만 다들 신경도 안 쓰는 눈치다.-_-. 그러라지 뭐.
아틸라가 나에게 저들과 저녁을 같이 먹는 게 어떻겠냐 말한다. 그가 요리를 할 계획인데 2명분을 만드는 것보단 4명분을 만드는 게 훨씬 낫다며, 아마 함께 저녁을 먹으면 모두에게 좋을 것 같다 말한다.
"정말 좋은 생각이야! "
모두가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우리는 다 같이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마을 광장에서 히데오상을 만났다. 히데오상은 리온에서 만난 한국인 중년 부부와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국인 부부를 만나게 된 히데오상은 신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인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하며 함께 저녁을 먹지 않겠느냐 권한다. 미안하지만 친구들과 함께 저녁을 해 먹기 위해 장을 보러 나왔다 말하고 다음에 함께 저녁을 먹자 거절하고 돌아섰다.
슈퍼마켓에서 프레야도 만났다. 그녀도 우리의 저녁에 동참하기로 했다. 아틸라는 혼자 열심히 요리 재료를 골라 담는다. 나는 내일 먹을 식량을 준비했고, 나다와 야네스 부부는 와인을 골랐다.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길에 한 명이 지날 수 있을 만한 좁지만 빠른 길을 발견한 우리는 일렬로 주르륵 서서 걸어갔다. 같이 있는 이 모든 상황이 너무 즐겁다
칼질을 하는 아틸라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물어보니 예전에 레스토랑을 운영했었다고 한다.
레스토랑이라니.. 예전에 안 해본 일이 뭘까?
아틸라는 파스타를 만들고 나다와 프레야는 샐러드를 만든다. 나는 아틸라 옆에서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한다.
서양의 식사는 한국의 그것보다 정말 간편하다는 생각을 많이 든다. 이것저것 반찬들을 한상 가득 차려 낼 필요 없이 오늘의 메뉴 하나를 집중해서 만들고 간단한 샐러드 정도만 준비하면 된다. 요리하는 그들을 보는 게 갑자기 한국에 있는 엄마가 떠오른다. 분주하게 움직여 한 상 가득 차려내던 그 솜씨, 엄마가 차려내던 오이소박이 한 입을 아삭 베어 먹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갑자기 웬 오이 소박이람.
파스타는 정말 훌륭했다!
카미노에서 먹은, 아니 유럽 여행 중에 먹은, 아니 내가 한국에서 돈 주고 사 먹은 어떤 파스타보다 맛있었다. 뭘 넣고 어떻게 만든 건지 모르겠지만 크림 파스타를 별로 안 좋아하는 나에게도 딱 맞는,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면서 깔끔한 파스타였다. 우리 모두는 맛에 감동하고야 말았고 아틸라는 이 정도쯤이야 라고 대꾸한다.
정말 배가 너무 불러 터지기 일보 직전까지 꾸역꾸역 먹었다. 샐러드와 와인도 정말 맛있었다. 정말 편안하고 행복한 저녁이다.
주방을 치우고서 남은 와인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오려는 것 같다. 바람이 제법 세게 몰아치고 번개도 번쩍번쩍거린다. 루이스의 마지막 날 밤에도 비바람이 불었었는데.. 괜스레 이상한 생각이 든다.
폴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그는 내일 아침에 어차피 그들이 있는 알베르게를 지나가야 하니 만나게 될 거라 얘기한다. 그리고 나에게도 드래곤 웨이로 걷는 건 어떻겠냐 다시 묻는다.
"미안해, 그런데 드래곤 웨이로 걷기는 힘들 것 같아. 다리 상태가 아직 많이 안 좋아.."
"그지?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어쩐지 너를 다시 만나게 될 것만 같아. 따로 걸어도 꼭 만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겠지? 나도 어쩐지 그럴 것 같아.. 그런데 나도 드래곤 웨이로 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리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숙소를 예약해 놓았다고 하지 않았어? "
"그러게.. 숙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가 어쩐지 나와 함께 걷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도 나와 헤어질 준비가 아직 안된 걸까?
나 역시 아직 그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렇지만 갈림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그가 책을 꺼내 오더니 그들이 예약한 숙소가 있는 마을을 알려줬다. 그 마을에는 숙소가 하나밖에 없고 침대가 많지 않아 걱정이지만, 혹시 우리가 따로 걷게 되더라도 그 마을에 자신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라고 말한다. 정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웃고 말았다.
밤공기가 제법 싸늘하다. 갑자기 차가워진 공기 탓인지 온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다. 불이 하나씩 꺼지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웠다.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 누웠더니 바로 옆 침대 2층에 누워있는 아틸라와 눈이 마주쳤다. 굿 나이트!
내 머리 위로 뚫려있는 창문으로 바람이 부는 모습이 보인다. 비도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 같다.
잠이 오지 않는다. 아틸라는 잠든 것 같다.
조심스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청소 중인 호스피탈레로에게 양해를 구하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바람이 정말 많이 분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 복잡한 고민들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다.
아틸라에 대해 생각했다. 내일의 이별에 대해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알 수 없었다.
혼자이고 싶기도 했고, 아틸라와 헤어지기 싫기도 했다.
아..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