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9(30). San Xulian
악몽을 꾸었다.
카미노를 걸은 이후로 이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꿈도.
오한이 들었다. 꿈 때문인지 제법 추워진 날씨 탓인지 모르겠다.
아틸라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나도 침대 밖으로 나간다.
"굿모닝. 아틸라. 근데 나 좀 안아줄래? "
"당연하지"
왜냐고 묻지도 않은 채 그는 나를 꼭 안아준다. 그의 커다란 품에 안기니 조금 위안이 된다.
"정말 나쁜 꿈을 꿨어. 친구가 나왔는데 너무 이상했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정말? 나도 악몽을 꿨어. 우리 형이 나왔는데, 후.. "
그는 꿈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악몽을 꿨다니, 이 또한 놀라운 일이다.
"아무래도 내가 어제 기도하는 걸 깜빡하고 자서 우리 둘 다 악몽을 꾼 것 같아."
"응? 기도?"
"응. 너 만나고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우리 둘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잤는데, 어제는 깜빡했거든. "
그가 기도를 깜빡한 탓인가? 알 수 없지만, 그와 내가 동시에 나쁜 꿈을 꿨다는 건 사실이었다.
"아. 그래서 그랬나 보네.. 근데 매일 기도를 했다니, 고마워. "
악몽으로 괴로운 마음이 나를 위해 매일 밤 기도를 했다는 그의 이야기에 금세 좋아졌다. 꿈은 꿈이고 그는 현실이니까. 현실은 꿈처럼 나쁘지 않은 게 분명하니까.
씻고 주방으로 가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어제 만났던 한국인 오빠는 벌써 출발했는지 보이지 않는다. 짐을 챙기러 자리로 돌아와 보니 내 자리에 웬 엽서 한 장이 남겨져 있었다.
*
죄송해요. 먼저 가요.
일정도 그렇고 한나절 이야기해서는 오해만 많아질 것 같아서.
여행 잘 마무리하시고 혹 서울에서 시간 나시면 연락 주세요.
*
또박또박 쓰인 글씨, 무엇인가 사연이 많은 듯했던 그 오빠는 연락처와 이름을 내 침대에 올려두었다. 조금 전에 없던 엽서가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오빠는 근처에 있는 듯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 길을 막 나서려던 한국인 오빠를 잡았다.
"엽서 남겨주셔서 고마워요. 이건 제 연락처예요. 한국에서 시간 되면 꼭 봐요. "
그리고 그 오빠를 먼저 보냈다.
한국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그와 나도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 길에서 만났으리.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그는 아마 나에게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꽤나 복잡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무사히 이 길을 끝낼 것이라는 것은 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와 다른 것을 얻어 돌아가게 되겠지. 부엔 카미노 그리고 아디오스!
역시 오늘도 엄청나게 늘어난 순례자들의 숫자에 놀라울 따름이다. 길은 훨씬 시끄러워졌고 지저분해졌다. 사람들의 이기심이 그저 한스러울 뿐이다.
안개 낀 아침은 촉촉했다. 습하고 추운 스페인의 겨울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습함과 서늘함이다. 건조하고 뜨거운 여름, 습하고 추운 겨울. 낯설지만 나쁘지 않다.
아틸라가 내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준다. 아마 악몽을 꾸고 난 아침이라 함께 있어 주려는 것 같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손을 꼭 잡은 채 길을 걸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갑자기 그가 왜 내 꿈에 나온 걸까? "
"글쎄. 원래 세상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긴 하지만, 분명 그런 꿈을 꿀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넌 지금 그 이유를 모르지만 말이야."
"네가 기도를 안 해서 그런 거겠지. 근데 정말 신기하다. 우리 둘 다 악몽을 꾸다니 말이야."
그리고 우리의 대화는 기도의 힘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에 대해서 이어졌다. 그런 신비스러운 것들을 믿고 공부를 했던 아틸라의 이야기들은 몹시 흥미로웠다. 그의 마스터가 내 준 숙제들을 해결 한 이야기, 예를 들자면 과거의 모습을 찾아내는 이야기 등을 해 줬다.
보통 사람들은 7개 정도의 과거가 현재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 과거의 모습을 레이어라고 표현을 하는데, (영어로 적당한 단어를 몰라서 레이어라 했을 수도 있다.) 그 레이어들을 잘 찾아내면 과거의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자면,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사람은 과거에 피아노와 연관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그 피아노를 잘 치던 레이어가 지금도 남아 있어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다.
병은 없는데 늘 손목이 아픈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는 과거에 손목을 크게 다치거나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의 과거의 레이어가 지금의 그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유독 춤을 잘 추는 사람, 언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 등등 모든 사람들은 자신만의 레이어를 여러 개 갖고 있지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타고난 재능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나의 레이어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을 잘 하지?
유독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많은 레이어를 갖고 있다고 한다. 그 많은 레이어들끼리 알 수 없는 충돌이 일어나 늘 혼자 고민하고 번뇌한다고 한다.
"그래서, 넌 다른 사람들의 레이어를 볼 수 있어? "
"음..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약간은 볼 수 있어. 그 사람의 에너지도 느낄 수 있고."
"와우 정말? 그럼 난 어때? 난 몇 개의 레이어를 갖고 있어? "
"음.. 21개. "
"응?? 21개? 너무 많잖아. 어떻게 알 수 있지 그런 걸?"
"그냥 그렇게 보여. 널 보면 21개라는 숫자가 보여."
"와 신기하다. 그걸 어떻게 알 수가 있지?"
"그건 네가 스스로 해내야 할 몫이야. 어떤 레이어를 갖고 있는지 타인이 알려줄 순 없어. 그리고 넌, 내가 지금껏 만난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영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 "
"정말? 듣기 좋은 말이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진짜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
"믿든지 말든지 그건 네 마음이야. "
어떻게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를 믿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이스도 늘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이 길 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의 영혼과 나의 레이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대체 어떤 존재지? '
정말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길 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는 나도 이상한 것이니. 하지만 나는 그 신비로운 레이어의 존재에 대해 믿기 시작했다.
"아마 전생의 우리 레이어들 중 하나가 서로를 아는 사이였을 거야.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이 길 위에서 만나게 된 거지. 그리고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순간 나는 사실 어떤 강렬한 느낌을 받았어. 일종의 운명이라는 느낌 말이야. "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순간의 만남, 나 역시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었다. 그는 내게 오렌지를 건넨 순간에 운명을 느꼈다고 했다. 아무튼 우린 만나야만 했던 인연인 것 같다.
어떤 인연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길 위에서 만날 운명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우린 만났고 함께였다. 이 함께 있는 시간이 오래 지속되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음 마을의 바에서 프레야를 만났다. 프레야는 미국에서 온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인상 좋게 생긴 흑인 아저씨였다. 바에서 자리를 잡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쿠키와 커피를 먹었다. 너무 복잡한 바에 오래 앉아있을 수가 없어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많은 카미노는 조금 별로인 듯하다.
마을을 지나 도로를 건너니 노란 해바라기 밭들이 펼쳐져 있다. 아름답다.
조그만 마을을 지나 길 중간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렀다. 그리고 야외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결정했다. 프레야가 합류했다.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어 있었다.
맥주와 샐러드, 그리고 파스타를 시켰다. 다른 관광객 순례자들처럼 우리도 점심의 여유를 만끽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다. 신발과 양말은 벗어서 나무에 걸어뒀다.
발이 습한 상태로 오래 있으면 물집이 생긴다. 그렇기 때문에 틈이 나는 대로 자주 말려줘야 했다. 하지만 물집과는 별개로 내 발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발의 뼈 마디마디가 따로 노는 느낌. 그래도 괜찮았다. 이 길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는 고통이니 말이다.
"나 뱀 모양 문신을 하고 싶어! 이렇게 조그맣고 까만 뱀이 새끼손가락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거야. 여기 손목 정도 까지. 정말 판타스틱할 것 같지 않아? "
프레야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을 한다.
뱀 모양 문신이라니.. 별로 내 스타일은 아니다. 점심시간의 대화 주제는 문신이었다. 서로가 봐 온 특이한 문신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
프레야와 아틸라의 대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비록 나는 그 대화에 참여할 순 없었지만, 늘 내가 모르는 낯선 것들에 대해 낱낱이 그리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그들의 어른 대화는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어느 때보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점심을 즐긴 다음, 세 순례자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래서 너희들 키스는 했니? "
나와 둘이 걷고 있던 프레야가 갑작스레 묻는다.
"응?? 아니?? 무슨!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당황했다. 이런 직설적인 질문이라니.. 그녀니까,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같이 다니면서 손도 안 잡아? 그가 마사지도 안 해줘?"
"손은 잡아봤어. 가벼운 뽀뽀 정도야 인사할 때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왜? 나는 아틸라 같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매일 마사지해달라고 할 거야. 그가 마사지 자격증이 있다는 건 알지? 왜 해달라고 안 하니. 기분이 훨씬 좋아질 텐데 말이야. "
".."
어쩐지 뜨끔한 기분이 든다. 내가 그를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녀에게 들켜버린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에 솔직해지는 법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프레야 같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좋지만 좋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좋아하고 있다는 그 마음을 스스로 부정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솔직하게 표현하고 지금의 마음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당연한 것이었고 모두들 그렇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아틸라는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고 내 마음 또한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젠 어떻게 해야 하지?
프레야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몇 마디 말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으니 말이다. 그리고 정말 정확하게 핵심을 찔러낸다. 그녀 역시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다소 성적인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재능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그 능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눈빛과 오묘한 말투, 온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보이는, 큐피드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녀 앞에서는 그 누구도 진실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길에서 그녀를 만난 것 또한 어떤 일종의 운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 역시 내 삶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확신과 함께 말이다.
재미있는 조형물이었다. 개미처럼 우리도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마치 내가 한 마리의 개미와 같은 느낌이다. 이 거대한 세상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
앞서가던 아틸라가 풀밭에 누워 담배를 피우고 있다. 나를 본 아틸라가 환하게 웃는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다. 그리고 깊게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행복하고 여유로워 보일 수 있을까? 저렇게 담배를 피우는 그를 보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도 한번 펴 볼래! 하고 그의 담배에 살짝 입을 대본적이 있었다. 역시나 나에겐 별로였다. 나에게 담배는 그저 연기일 뿐, 그것은 그의 행복이었지 나의 행복이 아니었다.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닌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보는 것, 아니 그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행복 이리라. 그가 그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도록 먼저 길을 나선다.
마을이 나왔다. 입구에 앉아 아틸라를 기다린다. 아틸라와 프레야가 함께 나타났다. 둘은 무슨 얘길 했을까? 프레야가 나에게 했던 질문과 같은 것들을 물어보았을까 봐 조금 신경 쓰인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뭐라고 답했을까?
담배가 떨어진 두 어른 순례자들은 타바코 샵에 들러 담배를 샀다. 그리고 나는 숙소를 찾아다녔다. 우리 셋을 위한 공간은 이 마을에는 없었다.
다음 마을까지는 6km, 새로 생긴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큰 마을에서 머무르고 싶었지만 침대가 없으니 별 수 없다. 한 시간 더 걷는 수밖에.
발이 너무 아팠다. 왼쪽 발에 다시 물집이 생겨 날 고통스럽게 하고 있었다. 더 걷지 못할 것 같았지만 아틸라와 프레야를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플립플랍으로 갈아 신었지만 길이 산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다시 운동화로 갈아 신어야 했다. 원래 발보다 1센티는 더 큰 운동화를 샀어야 했는데, 0.5센티 큰 운동화를 산 것이 화근이었다. 이렇게 많이 걷지 않아봐서 미처 몰랐다. 내 발보다 큰 이 신발이 내 발을 이렇게 바짝 쪼아올 줄을 말이다.
자꾸 뒤쳐지는 나를 아틸라가 계속 돌아본다. 옆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프레야와 보폭을 맞춰 걸으면서 말이다.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28km나 걸을 계획이 없었던 우리는 예상보다 길어진 걷기에 다들 지쳐있었다.
뜨거운 햇살에 다 녹아 흘러내리는 쿠키와 초콜릿을 나눠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얼른 마을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다음 마을은 그러고 얼마 후에 나타났다.
"오 마이 갓! 저기 봐!!"
마을 입구에서 프레야가 소리친다. 그곳에서 20센티쯤 되어 보이는 까맣고 작은 실뱀이 있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타난 닭이 그 뱀을 쪼아 대더니 한입에 집어넣어 버렸다.
"와우, 우리 아까 뱀 이야기한 거 기억나지? 딱 내가 하고 싶은 타투의 그 뱀이 바로 저런 거였어! 정말 신기하다. 어떻게 그 뱀이 내 눈앞에 나타난 걸까?"
프레야는 몹시 신기해했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오전에 말했던 많은 것들이 오후에 이루어진다. 생각해보면 그런 일들이 꽤나 있었던 것 같다. 무지개도 그랬고, 누굴 만나는 것도 그랬다.
이러니 우리가 카미노의 기적을 믿지 않을 수가 있나!
다음 마을인 산 줄리앙은 마을이라기에는 너무 작은, 그냥 순례자들을 위한 알베르게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깨끗하고 분위기 좋은 그 조그만 알베르게에는 우리를 위한 침대가 있었다. 그 알베르게의 방 한 칸에는 고작 6개의 침대가 있었다. 평화로운 밤이 예상된다. 행복하다.
오늘도 아틸라가 위, 나는 아래층 침대이다. 프레야는 건너편 위 침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방에 있던 두 명의 남녀 순례자들은 프레야와 첫날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었다. 처음에 만났다가 몇 줄을 한 번도 못 본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은 엄청나다. 신기하고 반가워하는 그들을 보면서 까뜨린을 다시 만나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와 지금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일들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까뜨린, 케샤, 후미야, 안토넬로, 굴리, 몰리 등등.. 다들 지금 어디쯤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빨래를 하고 짐을 정리한 다음 알베르게에 있는 주방으로 건너갔다. 아기자기하고 이쁘게 꾸며놓았다.
저녁이 준비되는 동안 프레야와 아틸라와 자리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다녀온 프레야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와우, 저기에 에어리언같이 생긴 거미 한 마리가 있어! "
"정말? 어디야? "
"이리와 봐."
그리고 프레야가 나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그곳에는 털이 숭숭 난 주먹만 한 거미 한 마리가 벽에 붙어 있었다. 정말 크고 징그러운, 에어리언 같은 거미였다.
"와 세상에 진짜 에어리언 스파이더네.."
거미를 보고 돌아오니 아틸라도 궁금한 모양인지 자기도 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내가 아틸라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했다. 살짝 문을 열었다. 거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행여나 거미가 움직일까 봐 작은 목소리로
"진짜 징그럽지? 진짜 에어리언 같아."
라고 말하고 문을 닫았다. 돌아서서 주방으로 나가려는 나를 아틸라가 부른다.
"지니, 잠시만."
"응?"
돌아선 내 눈 앞으로 아틸라가 훅 다가오더니 이내 입술이 닿았다. 갑작스럽지만 부드러운 움직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의 키스에 머릿속이 하얘진다.
입술을 뗀 아틸라가 놀란 내게 말한다.
"프레야 때문에 널 많이 못 챙겨줘서 미안해."
"아, 괜찮아. 나 전혀 신경 안 썼어."
"그래? 그럼 정말 다행이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내 얼굴이 빨개졌을 것 같았다. 프레야가 우리를 쳐다본다. 괜히 그 눈빛을 피하게 된다. 프레야가 아틸라에게 뭔가를 말한 걸까?
우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다시 프레야와 대화를 시작했고, 나는 간간히 맞장구를 치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기쁨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다.
그의 키스, 너무 놀랬지만 너무 좋았다.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하고, 나 역시 그러한 게 확실했다. 그의 마음을 이제 확실히 알게 된 것 같다. 더불어 나의 마음도.
콩딱거리는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다.
작은 알베르게의 저녁식사는 정말 훌륭했다. 맛있는 빵과 샐러드, 그리고 스테이크의 육질도 거의 최상이었다. 기대치 않았던 훌륭한 저녁에 우리 모두는 몹시 행복해졌다.
저녁을 너무 많이 먹었다. 배가 남산만큼 불러온 것 같다.
프레야와 아틸라, 그리고 나는 알베르게 끝에 있는 평상으로 가서 드러누웠다. 조용한 마을이다. 왼쪽이 숙소, 오른쪽이 주방 그리고 이 마을에는 몇 채의 집이 더 있을 뿐이었다.
하늘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평상에 누워 하늘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바라본다. 별들도 하나 둘 모습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너무 까맣고 너무 예쁜 밤하늘이다. 마음속에 멜로디 하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 까맣고 어두운 밤이 너무 좋다. 밤하늘에 박혀있는 별들은 쏟아질 것처럼 반짝이고 있고, 그 아래 누워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경이롭다.
오늘 있었던 수많은 일들, 믿을 수 없는 경험들,
이게 진짜 세상이 맞을까? 지금의 내가 살아서 존재하는 것이 맞을까?
꿈결 같은 밤이다. 아틸라와 프레야의 대화가 배경음악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두근대는 나는 까만 밤하늘을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