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11(32). Pedronzo
내 집에서 자고 일어난 듯이 편안하고 개운한 아침이다. 딱딱하고 좁은 이층 침대가 아닌 집에서 쓸법한 폭신한 침대와 얇은 침낭이 아닌 포근한 면이불. 조용하고 아늑한 방과 그 방을 가득 채운 따뜻한 에너지까지.
부스럭 거리는 다른 순례자들도, 빨리 나가라 재촉하는 듯한 호스피탈레로도 없는 아침은 여느 때보다 여유롭고 편안했다. 그렇게 아침이 되었다.
아틸라는 벌써 일어나서 씻으러 나갔다. 꿈결 같은 어젯밤은 정말 현실이었을까? 아니면 꿈이었을까?
어젯밤 우리는 큰 더블베드에 나란히, 그리고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어두웠고, 고요했다.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짝 돌아눕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져 살짝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마주쳐버렸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반짝이던 두 쌍의 눈은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장이 점점 빨리 뛴다. 그의 심장도 나의 심장도 쿵쿵거리고 있는 것 같다.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몸이 자꾸만 뜨거워진다. 그가 나의 뺨을 살짝 쓰다듬는다. 가만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어?"
..
...
"응."
괜찮았다. 안 괜찮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를 너무도 간절히 원했다. 그의 사랑을, 그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가만히 나에게 다가온다. 뜨거운 숨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조심스러운 움직임과 숨소리가 온 방을 메운다. 조용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바스락 거리는 이불속에서 두 개의 심장이 하나가 되어 쿵쾅거렸다. 그가 내 곁에 있는 모든 순간들이 꿈결인 것 같다.
두 개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기적, 온 우주가 힘을 합쳐 두 개의 마음을 하나로 만들어 낸 듯한 밤이었다.
그렇게 밤이 끝나고 아침이 왔다. 어제의 그 어둠과 그 뜨거움은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진짜였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기지개를 켠다. 침대 위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다 보니 갑자기 내가 순례자가 아닌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이한 그냥 평범한 아침 같다 생각하고 있을 때 아틸라가 들어왔다.
"굿모닝."
"굿모닝. 헉 벌써 아홉 시야! 나도 얼른 씻고 올게."
후다닥 화장실로 대피했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개진 것 같다.
욕실에 있는 커다란 욕조가 날 유혹했지만, 그러고 있을 여유는 없을 듯 해 미련을 접고 후다닥 씻었다. 방으로 돌아갔더니 이미 방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내 짐을 챙겨 아래층의 주방으로 내려갔다.
"부에노스 디아스"
"부에노스 디아스, 부엔 카미노!"
어제 함께 2층을 사용한 두 아주머니 순례자들이 길을 나설 채비를 하고 있었다.
"커피? 우유? 아니면 주스? "
아틸라는 이미 이리저리 뒤져 주방에 있는 음식들을 꺼내놓고 있었다.
"핫초코, 뽀르빠보르(부탁합니다.) "
"네! "
식탁에 앉아 이리저리 차를 끓이고 버터를 꺼내고 하는 아틸라를 바라본다. 손님을 맞이한 집주인 같다.
우리는 그렇게 식탁에 나란히 앉아 어제저녁 레스토랑에서 숨겨온 빵과 주방에 있던 크로와상, 비스킷을 먹었다. 초코잼, 땅콩잼, 딸기잼, 그리고 버터를 듬뿍 바른 빵과, 진한 핫 초콜릿 그리고 뜨거운 홍차로 마무리했다.
"담배 한대 피우고 올게."
"응, 내가 여기 정리하고 있을게."
함께 먹은 그릇을 세면대로 옮기는 내게 아틸라가 다가오더니 뒤에서 가만히 껴안아준다.
"고마워. 너무 행복한 아침이다. "
그리고 그는 내 머리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선 밖으로 나갔다.
"나도."
나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대답한다. 다정한 연인이 함께 맞는 행복한 아침인 것만 같다. 오늘 아침은 너무 완벽하게 행복하다.
주방 옆에 있던 방문 하나가 열리더니 세명의 여자 순례자들이 나왔다.
시계는 이미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들도 어지간히 피곤했나 보다. 그녀들에게 주방에 있는 물품들에 대해 간략히 알려주고 마지막 떠날 채비를 했다. 아틸라도 옆에서 짐을 마저 정리하고 있다.
"갈까?"
"응. 아 지니, 너 오늘 나에게 정말 훌륭한 아침을 선물해줬어. 정말 고마워."
"나도. 정말 고마워. "
기분 좋은 말이었다. 나 역시 뭔가 너무 행복하고 좋은 아침이었음이 확실한데, 왜 그에게 먼저 고맙다 말하지 못했을까? 늘 모든 것에 감사해하고 그 마음을 표현할 줄 아는 이 남자가 정말 멋있어 보인다.
열 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길을 나설 수 있었다. 다시 걷기 시작하자 발의 고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마 산티아고까지는 이틀만 더 걸으면 될 것이다. 벌써 이만큼이나 많이 걸어왔다는 것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천천히 함께 걸었다. 그리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의 떠나기 직전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아마 돈 이야기를 하다 그렇게 된 것 같다. 나라로부터 돈이 들어온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시작된 것 같다.
그의 부모님은 인쇄소를 운영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인쇄소에 프린터를 납품하고 관리하는 프린터기 회사에서 근무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서 해고를 통보해 왔고, 그는 직장을 잃게 되었다.
그 고통이 가시기도 전에, 그 당시 만나던 여자 친구가 헤어지자 말을 했다고 했다. 그렇게 그는 직장도, 사랑도 잃었고, 그 일들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
3주짜리 합기도 캠프에 참석하여 몸을 학대하기도 하고, 2주짜리 요가 캠프에 참석해 보기도 했지만 그 고통은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요가 캠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친구가 그에게 자신의 어머니가 오늘 산티아고에서 돌아오는 날이라 이야기했고, 그 얘기를 듣고서 그는 바로 산티아고를 가야겠다 마음먹고 비행기표를 샀다고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어떤 길인지도 전혀 모르고 떠나온 이 길 위에서 그는 이길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고통을 잊었고, 더 큰 감동을 받았으며, 이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정말 열심히 살 수 있으리라 이야기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의 과거를 알고 싶었지만 막상 알게 되고 나니 썩 유쾌하진 않았다. 프린터 셀러라는 그의 최종 직업(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도 했고, 주방장도 했었다.) 역시 어쩐지 생소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그 얘기를 처음 들은 내 머릿속에는 '에게.. 고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내용을 알고 나서 본 아틸라는 어쩐지 조금 달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정말 충격을 받아 버렸다.
내가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갖고 살고 있는지, 그 편견이 사람을 바라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스스로 깨닫고 나니 나 자신이 어쩐지 한심해졌고, 조금 슬퍼졌다. 그리고 그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이래서 나는 지금껏 제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너무 높은 기준과 너무 많은 편견으로 너무 예리하게 상대방을 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너무도 좋기만 하던 한 사람을, 그 존재 자체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도 무의식 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마는 나 자신을 스스로가 깨닫고 났을 때의 그 기분은 정말... 비참했다. 글로 표현하기엔 내 글솜씨가 너무 부족하다.
슬펐고 미안했고 혼자 있고 싶었다.
아틸라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는 혼자 길을 걷기로 했다. 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릿속이 너무 야단스럽다.
길 가에 있는 나무에 쪽지들이 걸려있었다. 유독 한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싶어 자세히 보니 Luis 였다. 루이스, 어쩐지 갑자기 나타나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 루이스는 야단스러운 내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루이스라면 이럴 때 내게 뭐라 말을 해 주었을까?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생각난다. 아틸라의 묵직한 눈빛도 생각난다.
카미노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두 개의 보물, 루이스와 아틸라.
왼편으로 옥수수밭이 펼쳐졌다. 싱그러운 잎들이 푸른 하늘과 너무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내 마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순례자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점점 더 강렬해지는 태양과 발의 고통 앞에 나의 머리는 또다시 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
생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각을 할 틈이 없어진다. 뜨거운 태양과 발의 고통은 그 두 가지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못하도록 내 뇌를 조종하는 듯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는 것을 인지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이 문제지만 말이다.
너무 더워 더 이상은 못 걷겠다.. 하고 있을 때, 황량하고 메마른 흙 길의 저편으로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레스토랑이 나왔나 보다. 목적지가 눈 앞에 보이면 조금 힘이 난다. 서둘러 건물로 향했다.
아틸라는 이미 그곳에 자리를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보니 그저 반갑고 좋았다. 그의 옆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어 버리고 다리를 뻗었다.
레스토랑으로 추정되는 이 건물은 오늘 문을 열지 않았다. 좌절이었다. 늘 비상식량으로 넣어 다니는 비스킷들을 꺼내 아틸라와 나눠 먹었다. 그나마 식량이 조금 있어서 다행이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아틸라는 옆 테이블의 순례자들과 친해져 있었다.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레스토랑이 문을 닫았다는 슬픈 소식을 전해주며,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함께 유쾌하게 웃었다. 나처럼 그들도 이 레스토랑만 바라보며 힘내서 걸어왔을 것이다. 순례자들에게 문이 닫힌 바나 레스토랑은 좌절 그 자체였다. 하지만 닫혀있는 걸 어쩌겠는가?
옆 테이블에 있던 한 순례자가 아틸라와 나에게 배를 하나씩 주었다. 감사의 뜻으로 우리도 우리의 쿠키를 나눠 주었다.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다음 마을에서 보자고 인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다시 아틸라와 함께 걷는다. 그래도 여전히 그가 많이 좋다. 싫어진 건 나 자신뿐이었다.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는 늘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있을 뿐이다.
"유칼립투스 나무네!"
아틸라가 길 가에 있던 나무의 잎 하나를 떼서 내게 내민다.
"향기 맡아봐. 유칼립투스야."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향신료로, 혹은 허브 오일로 종종 쓰이는 향기였다.
"아! 이게 유칼립투스구나. 유칼립투스 나무 처음 본다. 우리나라에는 없거든."
동그랗고 신기하게 생겼다. 코알라가 매달려 있기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이 나무만 작은 것이겠지? 유칼립투스 잎을 하나 따다가 향을 계속 맡으면서 걸었다. 그 특유의 향기가 청량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이 나왔다. 그리고 마을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우리는 바로 직행을 했다. 아까 문 닫힌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아버지와 딸 순례자들이 우리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며 우리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콜라 두 개를 사 들고 바깥 테라스에 앉았다. 성격 좋은 레스토랑 주인은 자기네 가게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문어요리가 있다며, 맛을 보라고 문어를 조금 썰어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다. 맛은 멜리데에서 먹은 문어요리보다 못했다. 하지만 공짜로 먹는 맛이라 나쁘지 않았다.
콜라에 그려진 플립플랍이 순례자들을 겨냥한 것이라며, 스페인에만 있는 이 플립플랍 콜라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먹던 콜라보다 이 곳에서 먹는 콜라가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잘 먹지도 않던 콜라를 일주일에 서너 번씩 들이키다 보니 콜라가 얼마나 위대한 음료인지 실감이 난다. 전 세계를 평정한 이 까맣고 톡 쏘는 음료수, 정말 찬사를 받을 만한 획기적인 발명품이 아닐 수 없다.
콜라를 먹고 기운 내서 다시 걷는 우리에게 산티아고까지 27km가 남았다는 돌비석이 나타났다.
27km... 벌써 우리는 770여 km를 걸어온 것이다. 산티아고가 27km 앞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아마 산티아고를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하루면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믿을 수 없다.
길은 오늘도 뜨거웠다. 옆으로는 싱그러운 초록빛 잎들이 넘실대고 있었지만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다.
전나무들이 곧게 일자로 심어져 있는 길이 나왔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는 아주 인위적인 나무 밭이었지만, 그 나무 사이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몹시 상쾌했다.
거울의 방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아틸라와 나는 그 나무 숲 사이에 앉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이런 신비로운 공간이라니! 경탄의 순간이다. 이 순간에는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온 마음을 가득 채운다. 숨이 끝도 없이 내려가고 온 몸은 두둥실 뜨는 듯한 기분. 시간도 멈춘 그 신비로운 곳에서 우리는 그저 그 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니, 어제 불러줬던 노래 한번 다시 불러줄 수 있어?"
"그럼. 근데 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했지 않아? "
"응. 근데 그 멜로디가 좋아. "
"잘 못해도 뭐라고 하지 마 "
그리고 나는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정말 내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다. 밤하늘의 별이 되어 그를 내려다보고 싶은 마음. 곧 다가올 우리의 이별의 날이 떠올라 노래 가사처럼 마음이 슬퍼진다.
"이렇게 그댈 사랑하는데, 그저 내 맘이 이럴 뿐인 거죠.."
민망하다. 한껏 진심을 담아 불렀지만, 마무리가 어쩐지 민망했다.
"아틸라, 너도 노래 하나 해줘!"
"음 그럴까?"
그의 낮은 음성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뭔 노랜지, 뭔 멜로딘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그저 진지하게 노래를 불러주는 그가 귀여웠다.
뭐야, 아틸라도 내가 노래 부를 때 이런 기분이었던 거 아냐???!@#$
이런 모든 상황들이 우습다.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즐겁다.
흙길은 금세 아스팔트 길로 이어졌고, 뜨거운 아스팔트 길 위에서 우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길을 걸었다.
다음번 나온 마을에서 아이스커피와 비스킷을 먹고, 우리가 오늘 얼마나 더 가야 하는가를 가늠해 보았다. 너무 늦게 출발한 날은 쉽게 지쳐버린다. 조금이라도 더 선선한 아침에 더 많이 가는 것이 한결 수월하기에 그 많은 순례자들이 새벽같이 길을 나서는 것이다. 너무 늦게 나선 걸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이미 늦은걸.
다음 마을 알베르게까지만 가기로 결정하고 다시 뜨거운 길을 나섰다. 마을은 금세 나왔지만 하나 있는 예쁜 알베르게는 이미 만원이었다. 2km 밖에 있는 다른 알베르게를 향해 걸었다. 아스팔트 길을 따라 이어진 길 위에 덩그러니 지어져 있는 시립 알베르게는 여분의 자리가 있었다.
야호! 계산을 하고 들어가서 보니 근처에는 레스토랑도, 슈퍼마켓도 없었고, 알베르게 역시 식사를 제공하지 않았다. 가까운 슈퍼마켓은 3km 뒤에 있는 다음 마을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취소는 안된다는 호스피탈레로에게 빌고 사정하고 우기기도 하여 결국 침대를 취소했다. 알베르게를 돌아 나오는데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은 꼭 슈퍼마켓에 들러야 하는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었어. 슈퍼마켓을 가려고 6km를 왕복하느니 3km 더 가서 슈퍼마켓 있는 마을에서 쉬어야지."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에게 변명을 해 가며, 국제 민폐의 민망함을 애써 부인하며 길을 걸었다. 알베르게를 돌아 나오던 우리와 지나치며 알베르게로 들어간 보이스카웃으로 보이는 순례자들을 동정해가며, (막상 그들은 우리를 기억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둘이서 그래도 낄낄대며 즐겁게 길을 걸었다. 30분만 더 걸으면 되니까!
Vamos! Animo!
곧고 길게 솟아있는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따스하게 퍼지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다. 나무도 햇살도 바람도, 매 순간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다섯 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다음 마을인 페드 론조에 도착했다. 꽤나 큰 마을이었다. 이 곳에는 대여섯 개의 알베르게가 있는 것으로 책에 나와 있었다. 어느 알베르게를 먼저 가야 할지 찾느라 잠깐 길에 멈추어 섰는데, 누군가가 우리를 부른다.
"Hey ~ Attila , Jiney! "
폴이다. 오래간만에 만난 그가 몹시 반갑다. 폴과 콜린은 시립 알베르게에 묵고 있는데 그곳은 이미 남은 침대가 없다고 했다. 사리아 이후의 침대 전쟁은 게으른 순례자들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두 번째 알베르게도 역시 풀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또 누군가가 우리를 부른다.
야네스와 나다, 슬로베니아 부부가 저 멀리서 우리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매일 마주치던 이들도 어쩐지 오래간만에 만나는 듯한 느낌이다.
"아틸라, 지니, 잘 있었어? 우리 조금 전에 너희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만날 줄 알았어. 근데 진짜 만나다니 너무 반갑다."
우리 역시 늘 마주치던 그들을 이제 마주칠 때가 됐는데, 싶던 터라 야네스의 그 말에 크게 동의를 했다.
"엇! 우리도 오늘은 만나지 않을까 얘기했었어요. 진짜 신기하다~ "
그리고 그들은 그네들이 묵고 있는 숙소 역시 만원이라고 하며, 숙소를 같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을 알려주었다.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서 숙소를 문의하니, 이미 자기네가 운영하는 곳은 마감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오픈한 마을 끝에 있는 숙소가 있는데 괜찮으면 전화를 해 주겠다고 말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곳에 빈 방이 있음을 확인하고 우리는 길을 따라 마을 끝으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나온 두 군데의 알베르게를 더 들렸지만 모두 만원이었다.
세상에, 순례자가 대체 얼마나 많이 있는 거지?
결국은 마을 끝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요금도 다른 마을에 비해 비쌌다. 2층 침대와 1층 침대가 있었는데, 우리는 그래도 좀 편하게 쉬고자 20유로짜리 1층 침대를 선택했다.
새로 지은 건물답게 방은 깨끗했고, 침대도 편안했다. 욕실도 아직 새것처럼 반짝였다. 마을 끝이면 뭐 어떤가! 우리는 짐을 풀 수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해했다. 까딱 잘못했다간 오늘 산티아고까지 갈 뻔했으니 말이다.
짐을 풀고, 씻고선 잠시 누워서 건너편 침대에서 자고 있는 아틸라를 바라보다가 나도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그리고 꿈에서 나는 아틸라를 다시 만났는데, 그는 한 마리의 호랑이가 되어 크게 포효했다. 커다랗고 하얀 호랑이, 백호였다. 나는 뭔가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는데, 그 기분 그대로 잠에서 깨고 말았다.
이상하게 어리둥절한 기분이 든다. 뭐지, 이 태몽 돋는 백호의 꿈은. 옆을 보았더니 분명 저 건너 침대에 있던 아틸라가 어느새 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다. 기척 없이 내 옆에 온 것처럼 잠자는 것도 정말 조용하다. 숨소리도 잘 안 들리는 것 같다. 아주 씨끄럽게 코를 골 것만 같은 이 거대한 남자의 반전이다.
그렇게 짧은 씨에스타를 갖고서, 어두워질 무렵 우리는 출출한 배를 달래주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슈퍼마켓에 들러 내일 먹을 식량들을 준비하고, 마을 중앙에 있는 피제리아에 들어가서 피자와 샐러드, 그리고 맥주를 시켰다. 페레그리노 메뉴(순례자 메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얘기해가며 우리는 수북이 나온 샐러드와 맛있는 피자를 먹었다.
오래간만에 먹는 신선한 샐러드와 정말 맛있는 피자에 우리는 금세 행복해졌다. 갓 먹기 시작했을 때 콜린이 나타났다. 그리고 폴을 잃어버린 콜린은 우리와 합석을 했다. 늘 한결같은 신기한 영국인 아저씨, 그의 슬픈 눈빛의 사연을 우리는 아직도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묻진 않는다. 억지로 알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니 말이다.
식사를 하고 기념품점에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을 하고, 하드웨어 스토어에 들러 비오킬을 한통 새로 구입했다. 3.5 유로, 너무도 정직하고 착할 것 같았던 리처드가 가격을 두배나 뻥튀기해서 우리에게 비오킬을 팔았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괘씸하긴 했지만, 베드 버그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기에 그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내일이면 우리는 산티아고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든다. 하루만 더 걸으면 산티아고라니,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서서히 그와의 이별이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피에네스떼레까지 함께 간다고 해도 그의 출국까지는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
왜 하필 이 곳에서 이 사람을 만나게 된 걸까?
왜 이 사람을 만나게 한 걸까? 어차피 헤어져야만 하는 운명인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내가 여기에 온 것도,
그가 여기에 온 것도,
우리가 만난 것도, 함께 길을 걸은 것도,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도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라.
누구의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이 모든 일이 일어나게 해 주심에 감사한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 자체도 엄청나 행운일 테니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런 감정. 이런 나 자신이 나도 너무 낯설다.
산티아고가 가까이 있는 것이 느껴진다. 그곳에 가면 어쩐지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내일이면 만나게 되겠지. 산티아고, 이제 하루 남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