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山东) 지역연구 1일차
신혼여행을 일본으로 다녀왔다. 휴양지에 크게 관심이 없기도 했고, 일본 문화에 관심은 많은데 정작 일본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를 배려해 남편이 제안한 목적지였다. 교토, 나라, 오사카, 아타미를 거쳐 도쿄에 이르는 일정 중에 '에비스 브루어리 도쿄', 에비스 120주년을 기념하여 지어졌다는 에비스 맥주박물관을 간 적이 있다. 이 맥주박물관에서 먹은 에비스 생맥주를 잊지 못해 한국에 와서 한동안 에비스 맥주만 찾아다녔는데, 당시엔 에비스 캔맥주도 찾아보기가 어려워서 한참 찾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만큼 강렬했던 추억이다.
운남 다음 목적지는 산동 지역으로 정했다. 곡부(曲阜)에 있는 공묘(孔庙)가 가고 싶어서 계획한 산동 지역연구였지만, 산동에 칭다오가 있고, 칭다오에 맥주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계획을 짜는 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문제는, 내가 산동 칭다오를 가기로 한 날짜가 8월 2일이라는 데 있었다. 2019년에는 7월 26일부터 8월 18일까지 칭다오 맥주축제(青岛啤酒节)가 열렸고, 내가 칭다오에 가는 8월 2일은 딱 그 한가운데였다. 지역 축제를 찾아다니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피할 수 있으면 최대한 피해서 다니려는 사람인데 칭다오는 피하질 못했다. 축제 기간이라 시중심은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시중심에서 차로 40분 넘게 가야 하는 곳에 숙소를 잡게 되었다. 이게 칭다오 지역연구의 아주 큰 패착이자 한편으론 칭다오라는 지역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각설하고, 아침 9시 칭다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상하이와의 잠깐의 데이트를 마치고 홍교공항으로 향한다. 이제 새벽부터 짐 싸고 택시 불러 공항으로 향하는 일이 아주 익숙하다.
비싼 숙박비로 울며 겨자 먹기로 잡은 숙소는 오히려 공항에선 가깝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그런데 택시에서 이상한 쪽지를 받았다. 이름하야 '택시 서비스 감독 카드'. 공항에서 택시를 탈 때 기사에게 영수증 등을 요구할 수 있는데, 이를 어기는 기사를 만나면 신고하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지금까지 그 어떤 도시에서도 이런 쪽지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 쪽지를 받으니 오히려 '어, 칭다오,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대놓고 '문제 있으면 신고하라'는 쪽지를 준다는 건, 그런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라서. 이게 당시 맥주 축제 기간이어서 이렇게 엄격하게 관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비스 감독 카드 덕분인지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산동에 온 목적 중 하나인 맥주박물관으로 향했다.
칭다오 맥주박물관(青岛啤酒博物馆)은 1903년 칭다오 맥주공장이 설립된 후 10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여 2003년에 세워졌다. 칭다오 맥주의 역사를 보여주는 테마 전시관과 더불어, 기존 맥주공장을 개조하여 맥주 양조 공정을 볼 수 있는 전시관과 꽤나 트렌디한 기념품점도 있어 볼거리가 꽤 많다.
입장권의 종류가 다양한데, 내 기억엔 기본 입장권만 사도 박물관에서 제공하는 칭다오 생맥주와 땅콩 한 포는 먹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에비스 박물관의 즐거웠던 기억을 곱씹던 나는 맥주 플래터가 제공되는 입장권으로 구매했다. 혹시 기본 입장권을 샀다고 해도 괜찮다. 박물관 관람을 하고 나오면 바로 앞에 '맥주 거리(啤酒节)'도 있어 혹여나 남아있을 미련을 털어버릴 수도 있기는 하다. (물론 관광지 물가는 고려해야 한다)
칭다오 맥주 역사 테마관은 시기별 칭다오 맥주 브랜드 디자인이나 광고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주 초창기 칭다오 맥주의 광고가 삼국지의 도원결의를 주제로 만들어진 게 재미있었다. 왜 Qingdao가 아니라 Tsingtao인지 궁금해하실 독자분도 계실 텐데, 그건 이 칭다오 맥주가 만들어진 게 1903년이라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세기 후반 중국 정부가 한어병음이라는 표기 체계를 만들어내기 전까지, 중국어의 발음을 로마자로 표기하는 것을 여러 학자들이 시도해 왔다. 그중 19세기 중반 한 영국 외교관이 고안해 낸 웨이드-자일스 표기, 일명 웨이드식 로마자라는 표기방식이 서양인들 사이에서는 가장 통용되는 표기법이었고, 독일인과 영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칭다오 맥주는 이 표기방식을 따라 그 이름이 붙게 되었다. 비슷한 예로 북경-Peking, 칭화대-Tsinghua University를 찾아볼 수 있다.
칭다오 맥주의 역사를 알아본 테마관에서 넘어가면 실제 사용되던 양조장을 전시관 형태로 만든 곳에 가볼 수 있다. 맥아, 발효, 숙성, 병입에 이르는 맥주 제조 과정을 따라가며 사용되는 설비들과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이 테마관이 볼만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테마관의 관람 경로 중간에 입장권에 포함되어 있는 맥주 플래터를 마실 수 있는 곳이 나온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리를 볶는 과정들과 그 숙성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화살표가 하나 보이는데, 거길 따라가면 플래터 마시는 곳이 나온다. 일반 입장권보다 조금 더 비싼 입장권이라 그런지 플래터 마시는 곳은 일반 맥주 시음 구역과는 별도로 운영되고 있었다.
좌측부터 흑맥주, IPA, 위엔쟝(原浆, 원액 맥주), 순생(纯生, 라거)이다. 박물관에 오기 전까지 칭다오 맥주 종류가 이렇게 많은지 몰랐는데, 그저 '양꼬치엔 칭다오(요 칭다오는 순생이다)'만 알고 살았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세 번째 잔인 위엔쟝, 일명 원장 맥주. 그 어떤 가공도 하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맥주다. 이걸 온갖 가공을 다 한 맥주가 바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순생, 네 번째 잔이다.
그럼 원장을 팔아야지 왜 순생을 파냐고? 원장은 가공이 되지 않아 유통기한이 짧으면 24시간, 길어봤자 6일이다. 유통과정 등을 생각하면 타지로는 팔 수조차 없고, 온도 조절 문제로 칭다오에서도 맥주공장 근처에서만 판매가 가능하다. 최근에는 물류와 보냉 기술의 발달로 중국 내 타지로 배송도 가능해졌다지만, 그래도 공장에서 바로 마시는 맥주만 하랴! 희소성이 가득한 위엔쟝, 음미하며 마셔본다.
즐겁게 플래터를 즐기고 나오면 남은 제조공정을 볼 차례다. 병 씻는 기계 등을 보고 마지막 코스를 돌면, 기념품 가게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기념품 가게가 또 중요하다. 여기 또 생맥주 시음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맥주박물관에 맥주 마시러 온 거 너무 티 난다)
맥주 등장 전 구경하는 기념품 가게다. 사실 다른 관광지처럼 으레 투박한 관광 굿즈로 도배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념품들이 괜찮은 게 많았다. 특히 외국인 방문이 잦아서 그런지 외국인들(특히 서양인들)이 사고 싶게 만들어둔 기념품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사진 중 녹색 포장지로 되어있는 컵 3개가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술과 관련된 중국어와 그와 관련된 영어 문장을 적어두었다. 영어에 해당하는 중국어 표기가 딱 들어맞진 않아서, 둘 다 읽어야 좀 더 의미가 산다. 각각 뭐라고 적혀있냐면...
- In China, there's a penalty for arriving late to drinks : down 3 beers.
: 在中国,迟到喝三杯,罚的是人情,赏的是口福。(중국에서는 늦게 오면 세 잔을 마셔야 한다. 사람들이 기다린 데 대한 벌이지만, 먹을 복을 상으로 주는 것이다.)
- The chinese character for enjoyment looks a lot like it(즐거워서 대자로 누워있는 사람 옆에 맥주 8병 있는 그림).
: 一个人,大口气,干八瓶酒,就是中国人的“爽”。(한 사람이 한 번에 8병의 맥주를 마시는 것, 그것이 중국인의 "즐거움"이다.
- In China, 'cheers' means start your drink, and finish it.
: 感情深,一口闷。(감정이 깊으면, 한 입에 털어 넣는다)
기념품점에서 열심히 구경을 하고 있는데, 한 한국인 커플이 초콜릿 기념품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겉포장 안이 보이지 않는 기념품이라 안에 초콜릿이 몇 개 들어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상품 설명에 중국어로 개수가 적혀있길래, "아홉 개예요"라고 말해줬다. 그러자 여자분이 "아~ 아홉 개? 씨에씨에~"하시는 게 아닌가! 문득 '아, 내가 많이 중국인화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그때 그 여자분, 잘 지내시나요? 같이 여행 왔던 남자분과도 잘 지내고 계시는지.. 안부 여쭙습니다...
당황한 마음을 뒤로하고, 박물관의 마지막을 생맥주 한 잔과 땅콩으로 장식한다. 땅콩은 꿀 땅콩인데, 주인공이 맥주가 아니라 땅콩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눈이 번쩍 뜨이는 맛이다. 땅콩만 사는 것도 가능하다. 아무래도 위엔쟝 맥주는 사갈 수가 없으니 땅콩이라도 사가자는 마음으로 관람객들이 많이들 사가고 있었다. 땅콩 드세요, 두 번 드세요...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시중심으로 건너가서 간단히 시내 구경을 좀 하기로 했다. 처음 간 곳은 피차이위안(劈柴院). 독일 점령의 영향으로 유럽식 건축물이 많은 칭다오에서 중국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먹자골목이라 하여 찾아갔다. 본래 장작을 패고 팔던 곳이어서 피차이(劈柴, 장작을 패다)라는 이름이 붙은 듯했는데, 지금은 꼬치거리로 유명하다고 한다. 좀 어수선한 골목에 길거리 음식 점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는데, 상하이 티엔즈팡처럼 좁은 골목에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구경하기가 어려웠다. 19년 내가 다녀간 뒤로 코로나가 터지면서 상권이 완전히 죽었다가 리모델링을 통해 지금은 당시보다 좀 더 깔끔한 분위기라고 하니, 최근에 칭다오를 찾는 분들이라면 길거리 음식도 즐길 겸 가보셔도 좋겠다.
피차이위안에서 조금 걸어오면 오르막길에 천주교당 건물이 있다. 이 주변 길은 페이청루(肥城路)와 중샨루(中山路)인데, 길바닥이 유럽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돌바닥이고, 주위 건물들도 유럽풍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 역시 칭다오가 독일의 조계지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중산루는 남쪽으로 잔교(栈桥)와 이어지며 1922년 중화민국이 칭다오를 되찾으면서 산동루라는 이름이었다가 1929년 손중산 선생을 기념하기 위해 중산루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칭다오 구시가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길이라 할 수 있어 칭다오 방문 시 한 번 걸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중산루를 따라 쭉 걸어서 도착한 오늘의 마지막 랜드마크는 잔교(栈桥). 1891년 군함을 정박하는 용도로 세워진 다리라는 이곳은 1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30년도에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다리가 유명하다기보다는, 다리 끝에 있는 회란각(回澜阁)이 유명하다. 칭다오 맥주 로고에 그려진 그림이 바로 이 회란각을 그려놓은 것이기 때문. 그런데, 잔교까지 가긴 갔지만 다리 위든 해변가든 정말 엄청난 인파로 다리로 진입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회란각의 모습과 건너편 해안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고 만족해야 했던 칭다오 첫째 날이었다.
[산동 1일차 일정 (칭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