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지금도 다양한 목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예전보다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제주는 매력적인 곳이다. 아마도 한달살이와 일년살이의 시초는 제주일 것이다. 유명 연예인의 영향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제주에는 이전부터 육지 사람들이 와서 정착하였다. 환상을 가지고 왔다가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눌러앉은 사람도 많다.
어떤 사람은 10년 전 남자 친구와 함께 로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제주에 와서 한동안 살다가 결국 남자친구는 육지로 떠났고 이후 홀로 남아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서 부동산중개업을 오픈하였다. 어떤 지인은 은퇴 후 일년살이를 해보고 아예 주소지를 옮기고 복지 혜택도 받으며 2년째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 서울에 와보았자 특별한 것은 없으니 계속 살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제주에 와서 원주민과 섞여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구축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낯선 제주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그들도 현대판 유배인인지 모른다.
제주에 '육지 것'들이 와서 산 것은 매우 오래전부터이다. 고려시대 때부터 제주엔 육지에서 보낸 많은 유형자들이 유입되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원주민과 섞이기도 하면서 유배문화라는 독특한 향토문화를 창출하였다. 특히 그중엔 지식인이나 관리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천형의 땅에서 제주민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었고, 고립된 그곳에서 달리 할 일이 없었던 그들은 제주민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기도 하고 시문을 집필하기고 하였다. 사실 정치적인 힘을 상실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공익을 위한 소임이 아닌 일종의 소일거리로 한 행위였지만 그럼에도 결과적으론 그들은 제주의 문화적 토양의 밑거름이 되었고, 역사적 텍스트로 삼을 수 있는 많은 저술도 남겼다. 그들은 단순한 유배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주에는 입도조라는 단어가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중 시기에 정치적 탄압으로 바다를 건너 온 유배인이 제주에 뿌리를 내리고 가계의 시조가 된 것을 뜻한다. 입도조의 주요 인물은, 가시리의 청주 한 씨 한천, 곽지리의 김해 김 씨 김만희, 외도동의 경주 이 씨 이미, 함덕리의 신천 강 씨 강영, 종달리의 양천 허 씨 허손, 노형동의 원주 변 씨 변세청, 신도리의 고부 이 씨 이세번 등이 있다. 그들 가문의 족보에는 조상이 유배인이라고 당당하게 적혀 있다고 한다. 제주의 삼성혈 신화에 등장하는 3개의 성씨(고씨, 부 씨, 양 씨) 이외의 다른 성은 다양한 형태의 입도조의 경우이고 그중에 유배인의 서사를 가지고 있는 시조도 많다.
조선시대의 법전인 경국대전엔 오형이라 하여 경중에 따라 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유형이 사형의 바로 아래 단계인 것을 보면 무거운 형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유형에는 경중에 따라 본향안치, 중도부처, 주군안치, 위리안치, 절도안치 등 다섯 종류로 나누어진다. 유형지 선정에서도 서울을 중심으로 거리에 따라 형벌의 경중을 구분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가장 먼 절해고도 제주는 중죄인의 유배지였던 것이다. 제주에서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구분되는데, 그중에서 대정현은 유배지 중에서도 유배지였다.
2020년 제주학연구센터에서 <유배문화 자원조사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그 보고서는 제주특별자치도에서 기획한 것으로서 그동안 있었던 다양한 형태의 선행 연구 자료들을 참조하였고, 그 밖에도 제주와 관련된 방대한 역사 자료를 전수 조사 분석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고려사 등의 정사와 기타 역사지리서 등 총 16종의 조선시대 서적들이 망라되어 있다고 한다.
내용으로 한 발짝 들어서 보겠다. 1274년 제주에서 삼별초의 반란을 진압한 원나라가 탐라총관부를 설치한 후 자국의 도적 100여 명을 제주에 유형을 보낸 것이 유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제주도를 멀리 있는 섬이라 하여 원악도라고 불렀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살아서 돌아올 수 없는 '악마의 섬'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그 후에도 원나라의 정치범 76명을 제주로 유형을 보냈고, 그런 형벌 방법은 명나라에도 전해져 건국 초기 원나라의 달달친왕을 비롯한 왕족과 귀족 200여 명을 원악도로 유형 보냈다고 한다. 제주도가 원나라의 직할령이어서 명나라도 제주를 자신의 영토로 여겼던 것이다. 이밖에도 멸망한 원나라의 귀족들이 제주로 망명 오기도 하였다. 제주는 그들에겐 원악도이기도 했지만 목마장을 운영하던 목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전혀 낯선 곳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돌아가지 못하고 제주에 정착하면서 많은 입도조의 일파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그와는 별개로 고려 말 유배인은 송길유, 조익형, 학선, 조득구, 김용, 임군보, 권항 등 7명에 불과했다. 이 숫자에 이견이 있지만 정확하게 기록에 남아 있는 유배인은 이들이라고 한다.
제주가 본격적으로 유배지로 사용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1392년 김만희와 김경흥을 시작으로 1911년 이승훈까지 도합 702명이 유배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 인원을 신분별로 보면 관리직 227명, 반란 역모의 가족과 인척 164명, 여성 30명, 왕족과 종실 외척 29명, 내관·중인·천민·종교인 등 102명, 신분미상 150명으로 구분된다. 유배 사유별로는, 각종 사화와 역모와 상소 등 정치범 243명, 행정 관리직의 학정 및 부정부패 등이 37명, 정치범의 연좌 죄인 183명, 일반 범죄자 72명, 일제침략 시 8명, 기타 35명, 미상 124명 등으로 구분된다. 유배 지역별로는, 제주목 293명, 정의현 125명, 대정현 192명, 추자도 92명 등이라고 한다.
조선의 제주 유배를 시간 순으로 분석을 하면, 전기라고 할 수 있는 태조에서 선조까지는 36명이 유배되었고, 광해군 이후 순조까지는 666명이 유배되었다. 전기 중 많은 부분은 연산군 재위 시에 발생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같은 연산군의 폭정이 원인이었고, 후기는 영조 재위 시기에 절반이 넘는 360명을 차지해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조선 후기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피비린내 나는 당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영조는 52년 동안 재위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유배인을 양산하였던 것이다.
702명의 유배인 중에서 최연소는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1647년 유배)이고, 최고령은 신임옥사 당시 소론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던 신명규의 이들 신임이다. 경안군은 당시 4살이었고, 신임(1722년 유배)은 84세였다. 유배기간이 밝혀진 335명 중 1년 미만은 141명, 1년에서 10년 사이는 168명, 10년 이상은 26명이고 그중에 20년 이상이 13명이다. 이 기간은 순수하게 제주에서의 유배 만 해당되고, 유배지를 옮기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개인에 따라 전체 기간이 아닐 수 있다.
최장기 유배인은 정난주로서 1801년에서 1838년까지 정확하게 36년 2개월이다. 그녀는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딸로서 1801년 신유박해 당시 백서사건을 일으킨 황사영의 처였다. 이 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녀도 모진 고문 끝에 유형을 선고 받고 대정현으로 정배 하여 평생 동안 관노비로 살았다. 천주교 박해의 피해자였던 그녀는 순교자적 삶을 살았다고 하여 현재 백색 순교자로 불리고 대정성지의 기원이 되었다.
유배인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마도 광해군일 것이다. 17세기 조선은 격동의 시절이었다. 그 중심에는 문제적 인물 광해군(1637년 유배)이 있었다. 선조에 이어 정인홍과 이이첨 등의 대북파의 주도로 왕위를 계승한 그는 중립외교 정책과 불분명한 옥사에 대한 집착 등으로 정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다가 결국 계모 인목대비의 8살 아들 영창대군을 익사시키고, 5년 후에는 인목대비의 칭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상황까지 몰고 갔다. 그런 폐륜적인 폭정은 결국 파국을 맞게 되었다. 참다못한 서인 세력이 주도하여 인조반정이 일으켰고 그는 폐위를 당한 후 15년 동안 강화도와 교동도 등의 적소에 유배되어 있다가 1637년 그의 나이 63세 때 제주목의 적소로 이송되었다. 그의 제주 입도는 조선의 권력이 그를 완전히 버렸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위리안치에 처한 광해군은 적거 밖을 나갈 수 없었고, 30여 명의 유진군이 번갈아 가며 그를 감시하였다. 한때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며 왜에 맞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광해군의 말년은 비참했다. 깊은 회한에 빠져 살던 광해군은 4년 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제주목사였던 이시방은 정치적으로 대척점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때 자신의 군주였던 광해군의 마지막 길을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디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행동과 의지가 현실의 복잡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것을 항상 역사는 상기시킨다.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유형을 보낸 광해군이 제주로 유배를 오기 전에 이미 자신이 보낸 14명의 정치범들이 제주 곳곳의 적소에서 형벌을 받았었다. 정온(1614년 유배)과 이익(1618년 유배) 송상인(1612년 유배) 등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대부분 인조반정 후 해배되어 상경하였다. 아마도 광해군은 자신이 위리안치했던 인물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미묘한 감정을 추적해 보는 것도 역사의 행간을 채워간다는 뜻에서 적어도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
송시열(1689년 유배)은 주자학의 대가였다. 그는 서인의 주류로서 조선에 주자학의 도그마를 강고하게 구축하기 위해 매진하였는데, 그로 인해 그의 제자이기도 한 윤증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는 노론의 정신적 지주이자 영수였고 절대적인 사상적 배경이었다. 17세기 조선의 정치와 학문에서 그는 핵심적인 존재였다. 정치적으론 당쟁의 빌미를 제공한 원흉이기는 했지만 학문적으론 송자라고 불림만큼 그 깊이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천하의 송시열도 정권을 잡은 남인과 숙종이 결탁하자 83세의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숙청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외형적인 이유는, 후궁 출신인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에 책봉되자 초야에 묻혀 살던 송시열은 이를 참지 못하고 반대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에 숙종이 격노하면서부터 사건이 촉발되었다고 한다. 당시 송시열은 권력다툼의 중심에 있지 않았지만 서인의 수괴라는 이유가 컸다. 남인 입장에서는 송시열은 마지막 남은 반대세력의 우두머리였다. 숙명적으로 그는 당쟁에서 비켜갈 수 없는 핵심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서인 중에서도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살벌한 정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상소문을 이유로 1689년, 생의 막바지에 제주로 유배되는 수모를 당하였다.
그럼에도 남인은 계속해서 상소를 올리며 그를 제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종국엔 제주 유배 100일 만에 송시열은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다. 마지막 운명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압송 도중 정읍에 이르렀을 때 숙종은 그에게 사약을 전하였다. 매우 이례적이었다. 역적이 아니면 사형에 처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더구나 여생이 멀지 않은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남인의 집요한 상소에 숙종도 결국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송시열의 제주 유배는 제주 유생들에겐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의 제주 유배도 그에 못지않은 충격을 주었다. 추사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1840년 9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유배를 온 김정희는 8년 3개월 동안 머물면서 30여 명의 제자를 배출하였고, 많은 예술작품도 생산하였다. 억울한 유배였지만 그는 인간적으로 다시 태어났다. 특히 세한도와 추사체 확립은 조선 후기 예술에 한 획을 긋는 주요한 작품이었다. 그와 함께 초의선사와 차를 매개체로 우정과 해학이 넘치는 일화를 만들어냈고, 또한 제자인 허련, 이상적, 강위 등과의 끈끈한 사제지간의 장이 펼쳐졌고, 관포지교 관계인 권돈인, 조인영 등 친구들과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들도 제주의 문화적 토양을 기름지게 했다.
제주는 조선의 중심에서 가장 먼 절해고도의 유형지였다. 정치범에게는 '악마의 섬'이었지만 제주민에게는 대대로 모진 삶을 살아온 척박한 땅이었다. 이 두 유형의 삶의 궤적은 너무나 달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는 유배인을 배척하지 않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유배인은 활동이 제한적이었지만 적소의 주민들과 접촉하며 인간적인 우애와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는데 마다하지 않았다. 지식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유배인들은 각각의 적소에서 많은 유생들을 배출하였고 그들로 인해 제주의 문화는 풍성해질 수 있었다. 사사한 제자들은 육지로 유학을 하여 과거에 합격하는 경우도 많았고 다시 돌아와 향토 문화 발전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이런 유배인의 서사와 관련된 제주의 역사는 지구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제주민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1682년 귤림서원 현판을 사액(賜額) 받아 서원을 세웠다. 1695년 송시열을 추가 배향하면서 기존의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과 함께 다섯 현인을 모시게 되었다. 이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이 발령되었을 때 철거되었다. 이후 1892년 제주 유생 김희정에 의해 다섯 현인들의 이름이 세긴 조두석을 세우고 제단을 만들었는데 그 이름이 현재의 오현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