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배 가기 전
제주의 유배 역사를 보면 조선의 역사가 보인다. 유배인의 일면을 보면 조선 중기 이후 피비린내 나는 당쟁의 역사도 확연하게 볼 수 있다. 붕당과 당쟁이 조선의 역사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때 제주로 유배를 온 700여 명 중에 여러 사화와 환국과 옥사 등에 얽힌 정치범이 243명이었다. 그 정치범들은 대게 유학에 정통한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 지식인이기도 해서 제주에 그들의 지식과 유교 문화를 전수할 수 있었다. 정약용 정약전 형제의 경우처럼 남도의 벽지와 섬에 많은 유배인들이 적거생활을 하면서 유배문화가 형성되었지만 제주에는 이보다 더 오래전부터 그와 같은 문화가 뿌리 깊게 조성되었다. 제주는 유형의 땅에서도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가장 먼 고립된 섬이었기 때문에 유배문화가 보다 집중적으로 형성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제주 유배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추사 김정희이다. 그는 9년 가까이 적거 하면서 제주에 확고한 발자취를 남겼다. 제주는 추사체와 세한도와 그리고 많은 서화를 창작한 예술적 상상력을 제공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많은 시문과 편지를 남겼고 그를 찾아오는 제주 유생들에게 예술과 학문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가 쓴 35편의 편지는 당시 제주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위리안치임에도 불구하고 제주목사의 허락으로 대정현에서 제주목까지 여행도 하며 시문을 썼다. 또한 그를 만나러 온 많은 친지와 지인들도 제주에 문화적 흔적을 남겼다.
대정읍 인성리에 가면 제주추사관이 있다. 건물 대부분이 땅 아래에 묻혀있는 독특한 형태의 기념관과 추사가 살았던 적거터가 잘 정비되어 있다. 기년관에는 추사가 제주에서 완성한 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건물 뒤에는 유허비와 그가 적거 했다고 하는 강도순의 집이 복원되어 있다. 모거리에는 초의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밀랍모형이 놓여 있고, 밖거리에는 학동을 가르치는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당시 모습으로 추정되는 안거리와 돗통시와 말방에 등도 재현해 놓았다. 그 전시관 주변에도 추사와 관련된 장소를 따라 추사유배길이 조성되어 있다.
김정희가 제주에 위리안치된 결정적인 이유는 윤상도의 옥사 때문이었다. 1840년에 일어났던 사건을 알기 위해서는 10년 전 1830년 상황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정조 사후 복잡한 정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드디어 영안부원군의 자격으로 순조의 섭정자로서 권력의 정점에 오른 김조순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막후에서 경주 김 씨가 주축인 노론 벽파 세력을 숙청하고 그 자리에 안동김 씨 일가를 등용하였다. 이런 안동김 씨의 득세가 20년 이상 지속되자 왕권이 무력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안동김 씨의 세도에 회의를 느낀 순조는 효명세자를 전면에 내세워 대리청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즉 두 왕이 통치하는 것이었다. 왕권회복을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처음엔 계획대로 효명세자가 강단 있게 개혁을 단행하여 안동김 씨를 배척하고 경주김 씨를 발탁하는 등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였고, 궁중 의례와 경연을 자주 열어 유교의 가치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당시 정계에 등장한 경주김 씨 중에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도 있었다.
하지만 1830년 원인이 불분명한 사인으로 효명세자는 22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세자 훙서 한 달 후 6월에 접어들었을 때 세자의 사망 원인이 의원 오진과 상약의 잘못된 처방으로 인한 것이며 그것은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문이 빛발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 상소는 11월에 끝나는데, 이 시기를 두고 ‘탄핵 상소의 계절’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내의원을 총괄하는 제조(提調) 홍기섭이 불순한 의도가 있어 국청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올라오고 삼정승까지 주청을 하자 이에 순조가 마지못해 직접 국청을 하고 혐의가 없다고 판결하였다. 순조는 이 건이 더 이상 비화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안동김 씨 세력은 물러서지 않고 당시 지돈녕부사였던 김노가 효명세자 죽음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순조는 무고한 상소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계속 거부하였지만 이제는 합동상소까지 올리는 상황까지 발전하였다. 이에 순조는 홍기섭을 삭직하고, 의관 이명운을 추자도로 위리안치하고, 나머지 의관들도 유형을 내려 이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그럼에도 안동김씨 세력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김노를 비롯한 홍기섭, 이인부, 김노경 등의 탄핵을 극악하게 요구하였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경주김 씨 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상소라는 것을 짐작하고 남는 데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집요하게 상소문을 썼다.
이런 극악한 상소는 결국 순조의 분노를 사 상소의 선봉에 섰던 김우명에게 부당한 상소를 올렸다는 이유로 경종을 알리기 위해 그의 직을 삭탈하였다. 김우명의 상소문을 보면 악의로 가득 찬 김노경의 탄핵 죄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그중에 그의 아들 추사가 요사스럽다는 문장도 들어 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상소는 무도한 짓이었고 결국 국왕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주요 요직엔 대부분 안동김 씨 세력이 점거한 상황에서 외롭게 그들과 대치하고 있던 순조는 8월 효명세자의 장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상소의 덧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이번에는 부사과(副司果) 윤상도가 박종훈, 신위, 유상량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내용을 보면 누가 보더러도 그들은 모두 악마이고 대역죄인이었다. 그들은 모두 김노경 부자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들의 부정부패 비리를 고발하는 상소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최소한 격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조가 보기에 윤상도의 상소문은 노골적인 인신공격으로 점철되어 있어 모함으로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이 음험하여 참담하다고 느낀 순조는 운상도의 배후 세력이 존재할 것이라고 합리적 의심을 하고 심지어 역모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순조는 이미 윤상도의 정치색을 순조는 잘 알고 있던 터였다. 그렇다고 더 이상 그의 뒷조사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순조는 신하와 왕을 이간질하는 이적행위라고 밝히고 그를 추자도로 정배 하였다. 그러고 정치적인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김노를 남해로 정배하고 이인부는 전리방귀(직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보냄)하였다. 상징적인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이 과정에서도 의금부에서는 김노의 처벌이 가볍다고 저항을 하였고 순조는 의금부 판사를 교체라는 상황까지 겪어야만 했다. 당시 사헌부에서 윤상도를 불러 국청을 해야 한다고 순조에게 청했는데 사헌부의 수장 대사헌은 김양순이었다. 10년 후 밝혀지지만 사실 이 상소문의 배후는 김양순이었다.
순조는 이후 세자의 훙서와 관련된 논쟁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던 윤상도 사건은 한 달도 채 안 되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김양순을 비롯한 10여 명의 대신들이 집단으로 김노경의 국청을 간청하였고 삼부 대신들도 주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척결 의지는 사냥개처럼 집요했다. 그들 중에는 김우명도 있었는데, 그는 몇 년 전 충청도 비인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암행어사였던 추사의 감사로 봉고파직을 당한 적이 있어 개인적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악연과 더해지면서 김노경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선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윤상도와 김노경을 엮기 위해 억지 논리를 만들어 사악한 모해를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척점에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윤상도는 경주 김 씨 세력의 탄핵 주체였고, 김노경은 탄핵 대상인데 그럼에도 김노경이 배후라는 인과관계를 억지로 엮으며 호도하고 선동한 것이다. 이런 극열한 논쟁에 지친 순조는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김노경을 고금도로 위리안치하였다. 이로서 ‘익종의 사간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의금부와 사헌부는 형량이 약하다며 계속 저항하였고, 김노경을 다시 국청하라는 상소가 이어졌고 심지어 397명의 성균관 생원들도 서명을 하였으며, 영의정과 우의정도 주청 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김노경의 탄핵은 극열한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안동김 씨 세력은 비록 김노경을 사형에 까지 몰고 가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었다. 효명세자 대리청정 시 잠시 정치 전면에 나섰던 일파들을 숙청하고 다시 권력의 핵심이 되었던 것이다. 윤상도를 내세워 결정타를 날리려고 했지만 오히려 순조의 격노를 사 불경죄로 몰리는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윤상도를 탄핵 제거하고 동시에 김노경과 엮는 묘수를 씀으로써 다시 전세를 역전시켰던 것이다.
1840년, 10년 전의 윤상도 사건은 이제 모든 이에게 잊혀가고 있었다. 외척의 수장인 김조순도 세상과 하직하고, 1834년 순조도 붕어하고 그의 손자 헌종이 즉위하였고, 1837년에는 윤상도 사건으로 고금도로 유배를 갔던 김노경도 노환으로 사망하는 등 세상은 다시 변해 있었던 것이다. 7살에 헌종이 즉위하자 순원황후가 수렵청정을 하고 1840년 친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순조 이후 계속되어 왕들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는 상황이 되자 필연적으로 모계와 관계된 외척들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헌종 시기에도 신정왕후 일가인 풍양 조 씨 가문이 정가에 떠올랐고, 기득권 세력이었던 안동 김 씨 세력과 대립 혹은 전략적 협력을 하는 양상을 띠었다. 조모계와 모계 가문의 대립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헌종의 친정체제가 들어가자 신정왕후의 오빠인 조만영, 조인영 등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당시 14살에 불과했던 헌종의 나이를 볼 때 왕위 보존이 창창하게 남아 있었고 그에 따라 풍양 조 씨 가문의 권력 또한 쉽게 넘볼 수 없는 현실적 장벽이었다. 이에 권력의 깊은 맛을 알고 있었던 안동 김 씨 세력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미 권력에 중독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무언가 국면을 일신하는 변화를 꽤 해야만 했다. 그래서 김홍근이 전면에 나섰다. 김조순의 아들인 권력의 화신 김좌근이 두 눈을 부릅뜨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역시 김홍근의 형 김흥근도 권력의 핵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근자 돌림에서 알 수 있듯이 동년배의 인척들이었다.
그해 7월, 김홍근이 김노경과 윤상도가 역모를 꾸민 정황이 포착되었으니 이에 대해 국청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서 윤상도의 옥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김노경은 이미 사망하였지만 아직 살아 있는 윤상도와 역모 협의를 엮었던 것이다. 이후 한 달 만에 추자도에 유배 중이던 윤상도를 송환하여 국청을 하였고, 결국 효명세자를 죽음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내고 그를 대역부도 죄목으로 능지처참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러했지만 과정은 막장을 방불케 했다. 국청은 국왕이 직접 심문하는 것이지만 나이 어린 헌종이 이런 사건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김홍근을 비롯한 안동김 씨 세력이 사건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 윤상도가 사실을 인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조악한 심증을 들이대며 역모로 몰아간 것이다. 이런 무리수는 결국엔 국문 도중 상소 사건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허성이며, 그 허성을 사주한 사람은 김양순이라는 사실을 윤상도가 실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전혀 뜻밖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에 나이 어린 국왕은 김양순을 조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은 예상치 않는 방향으로 튀었다. 김양순은 국문을 받다가 사망하였고 허성도 사실을 실토하고 사사되었다. 결국은 김양순도 권력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권력의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건의 방향은 추사에게로 번졌다. 김양순이 국문을 받을 때 윤상도의 상소문을 자신에게 전달한 사람이 추사라고 진술을 했는데 나중에는 이화년이라고도 하는 등 횡설수설하였던 것이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것이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추사를 끌어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심증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고, 사건의 정황상 사실 관계에 연루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등의 추정이 나돌았지만 결국 추사는 그 사건의 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역모사건은 대역죄인만큼 윤상도의 옥사에서 이름이 거론된 그 자체만으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에 우의정 조인영이 헌종에게 적극적으로 변론하여 추사에게 유배 처분을 유도해 내었다. 당시 풍양조 씨 가문의 핵심으로 조정의 실세였던 조인영은 과거 젊었을 때 추사와 금속학을 함께 연구한 절친이었고, 추사를 판의금부사에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아무튼 추사를 가능한 멀리 보내는 것이 그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840년 9월 4일 추사는 6차례의 모진 형문과 36대의 신장을 맞고 제주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로 정배 되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그럼에도 사헌부가 중심이 된 삼사는 이에 불복하고 추사에 대한 국청 요구 상소문을 올렸다. ‘윤상도의 훙소를 유도한 추사는 천성이 사납고 독하여 한결같이 저뢰하며, 스스로 한 짓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김정희는 역와이고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추사를 평하며 반드시 국청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하지만 헌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풍양조 씨 일가인 조인영이 뒤에서 받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론의 후예인 추사 가문은 이미 오래전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한직을 전전하는 처지였고 거의 사멸화된 상태였다. 추사도 여러 참판과 암행어사와 마지막에는 판의금부사까지 봉직을 하였지만 권력의 중심과는 거리가 먼 관직이었다. 그는 노론의 후예였지만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관직에 충실하면서 오히려 덕후처럼 금석학과 고증학을 연구하고 서예와 서화 같은 예술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 키드를 자처한 북학파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권력의 핵심과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풍양조 씨와 안동김 씨의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는 이 거대한 세력과 맞서 싸울 수는 없었다. 그는 몸을 낮게 낮추고 원악도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윤상도의 옥사는 안동김 씨의 자작극이라는 사실이 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윤상도는 물론이고 자파 인사도 사사되는 등 권위가 실추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권력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들은 족보상으로 전 국왕의 삼촌벌인 철종을 찾아 국왕으로 옹립하는 악수를 두면서까지 조선의 권력을 독점하였다.
2. 대정현 유배 시기
지천명이 넘은 나이에 억울하게 대정현에 유배를 온 추사는 한동안 자신의 처지와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깊은 회한에 잠겼다. 노론이 철저하게 붕괴되는 것을 목도하고 권력을 지향하지 않기로 맹세했었다. 그래서 금석학과 북학 연구에 몰두하였고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34살 때까지 그랬다. 당시 사귀었던 조인영, 추사의 영원한 친우 권돈인, 김조순의 장남 김유근, 정조의 사위 홍현주 등은 그와 예술과 학문을 함께 하며 금란지교를 맺고 있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아들인 정학연과 정학유와 교류하면서 친분을 쌓았고 그들 형제의 소개로 1815년 초의선사를 소개받았다. 뒤에 보다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갑장인 초의선사와 추사의 우정은 매우 돈독하여 많은 일화를 남겼다. 하지만 도반들이 각자 관직에 진출하자 추사도 1819년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을 보고 급제한 후 본격적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런 선택이 결국 그를 정치사회적으로 몰락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마도 당시 추사는 비바람 몰아치는 대정현 적거에서 이렇게 복잡한 심정을 달래고 있었는지 모른다.
추사는 처음 제주로 갈 때 자신의 노비 몇 명을 데리고 가서 수발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만스러운 것은 음식이었다. 제주 음식이 비리고 매우 짜서 그의 입에 맞지 않았다. 그는 이런 사실을 아내인 예안 이 씨에게 편지로 고하면서 음식 투정을 하였다. 그리고 민어, 어란, 호도, 곶감, 산포(소고기 육포), 된장, 진장(오래된 간장), 젓무(무 짠지무침). 조기젓, 새우젓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런 음식들은 제주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고급 음식이었다. 또한 초의에게는 차를 보내줄 것을 여러차례 부탁하였는데 제날짜에 오지 않자 투정을 부리면서 독촉하였다. 정치범으로 제주에 유배 오는 사람들은 대게 그렇지만 유복했던 추사에게도 무엇보다 불편한 음식을 해결하는 게 중요했다.
그는 결코 절해고도에서 절대고독과 싸우며 와신상담 같은 인고의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다. 척박한 대정현에서도 그는 평균적인 삶 이상을 유지하였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지인에게 수많은 편지를 썼는데, 편지의 면면을 보면 학자와 예술가로서 고고할 것 같은 성품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세속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 글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면 정신적으로 힘들고 외로울 때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런 경우에는 속마음이 가감 없이 배설하듯이 쏟아낸다. 이런 편지로 인해 위대한 작가들이 훗날 신비로움이 벗겨지기도 한다.
환경 탓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매사에 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특히 그 불만은 타인의 작품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평소에도 비판의식이 강해 작품 비평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유배지에서도 여전히 편지를 이용해 예리한 칼날을 휘둘렀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정평 있는 독설가였는데 제주에서는 강도가 더 심해졌다. 신위와 조광진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서예가를 비판하였다.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조윤형과 유한지와 이광사에게도 폄훼와 혹평을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명필의 대명사로 불리는 이광사에게는 문자기(책을 많이 읽지 못해 글씨에 깊이가 없다는 의미)라고 표하며 평가절하를 하였다. 때로는 너무 과도하여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청나라의 대학자이자 고관인 옹방정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그의 아들 옹수곤과도 깊이 있게 친교를 맺었던 그는 엘리트 의식이 누구보다 강하였다. 그런 지적 우월의식은 평소에도 여과없이 표현되기도 했다. 그는 여러 편지에서 제주민을 학식이 낮고 아둔하고 무지하다며 마치 미개인 취급을 하기도 하였다. 겉으로는 일정한 경지에 오른 것처럼 고고한 척했지만 속마음엔 남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대정현에서 자신과 교학 했던 제자 박혜백, 이시형, 홍석호 등에게도 궁벽한 시골 서생들이라고 표현하며 모욕을 하였다. 계급적 신분주의와 지적 우월감이 충만하였는지 모른다.
유배 오기 전 과거에도 그의 제자인 조희룡의 작품도 폄하하였다. 조희룡은 추사가 가장 아끼는 제자라고 하지만 3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서클 후배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다. 추사는 한때 그에게 난초 치는 방법을 전수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주위에서 제자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아무튼 추사는 그 후에도 조희룡의 작품을 보고 문자향 서권기(문자에서 나는 향기, 책에서 풍기는 기운)가 없다면서 디스 하였다. 현재도 매화 그림의 대가로 추앙받는 조희룡도 당대에는 추사의 꼬장한 비평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신분은 중인이었다. 추사는 절재미를 추구했다면 조희룡은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고, 추사가 지적이었다면 조희룡은 감성적이었다. 두 사람의 작품 세계가 다르지만 추사는 그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다름을 참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뒷담화로 표현하였다. 그럼에도 조희룡은 마지막까지 추사의 사람으로 불리며 그를 떠나지 않았다.
악마의 섬에서도 가장 외진 대정현에서 적거생활을 하던 추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지 않았다. 유배 온 후 2년이 되었을 때 부인 예안이 씨를 잃고 잠시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하였다. 그의 편지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첫 번째로 그를 찾아온 사람은 허련이었다. 그는 진도의 몰락한 가문의 후예로서 대원사 주지였던 초의선사의 주선으로 서울로 가서 추사의 제자가 되었다. 추사가 유배 가기 1년 전이었다. 처음엔 제자 받기를 거부하였지만 삼고초려에 당하지 못한 추사는 그를 문하에 두었고 그의 호를 소치라고 지어주었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던 그는 문인화에 적격이었다. 그의 문인화에 대해 깐깐한 추사도 별다른 비평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추사는 허련에게 자신의 많은 지인을 소개해 주었고, 추사가 죽기 전까지 서울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남겼다. 허련은 추사를 존경하여 진정한 스승으로 모셨다. 추사가 해배되어 서울에 왔을 때 그린 추사의 초상화 두 점이 지금도 전해진다. 이런 허련이 1841년, 1843년, 1847년 세 번에 거쳐 방문하여 총 17개월 동안 스승과 고락을 함께 하였다. 한번 대정현에 오면 5개월 이상 거주하였던 것이다.
추사는 불교에도 관심이 많아 묵란도의 일종인 <불이선란도>와 명선이라고 쓴 서예 작품과 봉은사 경판의 현판 서예 작품을 남겼고, 반야심경첩을 사경하기도 하였다. 그와 불교와의 관계는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승려인 초의선사의 친분에서 분명하기 드러난다. 설에 의하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정학연을 통해서였다. 정약용이 강진에 적거생활을 하고 있을 때 백련사 주지 아암선사와 교류를 하였는데 그의 제자였던 초의를 정약용에게 소개해주었다. 초의의 학문적 깊이와 열의를 높이 산 정약용은 남양주에 있던 그의 아들 정학연에게 보내 더 많은 학문을 익히도록 주선하였다. 서울로 유학을 간 것이다. 15세 때 남평 운흥사에서 출가하여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그는 유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그런 학구열을 발판으로 1815년 정약용의 문하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있을 때 정학연과 함께 서울을 오가며 많은 젊은 사대부들과 어울렸다. 그들의 일면을 보면, 정약용의 두 아들과 정조의 사위 홍현주, 훗날 호남 칠고붕으로 불리는 김각, 공조판서를 지낸 무신 신헌, 우의정을 지낸 문신 한계원, 남종화의 대가 허련 소치, 추사를 마지막까지 보호해주었던 권돈인 등이 있었고 그중에 한 사람이 추사였다. 두 사람은 동갑이고 학문과 예술이 통하여 금방 친해져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두 사람의 진한 우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특히 초의가 다도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추사도 중국에서 배운 다도에 관심이 많아 그것을 매개로 더욱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의는 다도의 이론을 체계화한 <동다송>을 지었고 다산일미라 하여 차가 곧 선이다라고 설파하여 조선의 차문화에 일조하였다. 동다송은 현재까지도 전해져 다도의 교과서로 읽히고 있다.
추사는 대정현 적거생활을 하면서 가장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은 초의였다. 처음 유배 가던 도중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해남 대흥사를 방문하여 초의와 만났었다. 당시 추사는 이광사가 썼다는 대흥사 현판을 떼어내고 자신이 써주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여기선 사실유무가 불확실하여 여기선 자세하게 얘기하지 않겠다.
아무튼, 초의는 처음엔 추사의 요구로 자신이 만든 차를 보내주다가 아예 차를 가지고 와서 함께 마시자고 추사가 생떼를 부리자 이에 못 이겨 그는 바다를 건넜다. 추사는 ‘산속에서 바쁜 일도 없을 텐데, 이젠 지쳐서 스님도 보고 싶지도 않고 편지도 필요 없으며, 그 대신 덕산(중국의 선승)의 몽둥이를 받게 될 것이오’라고 투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실 지난겨울 상처하여 상심하고 있던 추사를 위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1843년 봄 대정현에 온 초의는 6개월 동안 추사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이순이 가까운 나이에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가장 먼 천형의 땅에서 마주 앉은 그들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초의가 다려준 차를 마시는 추사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추사는 초의가 다려주는 차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며 유학과 불교 그리고 예술에 대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초의가 논하는 다선일미에 심취하였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한 우정도 주고받았다. 초의가 떠난 뒤에도 추사는 그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현재 남아있는 편수가 전체 70편이라고 한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 사람에게 쓴 편지 중에게 가장 많은 편수이다. 초의는 10년 후 먼저 세상을 떠난 세속 도반에게 쓴 제문에서 ‘도에 대해 담론 할 때는 그대는 마치 폭우나 우레처럼 당당했고, 정담을 나눌 때면 그대는 실로 봄바람과 같고 따뜻한 햇살과 같았다’라고 그를 애도하였다.
유배 당시 추사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은 이상적이었다. 그는 추사에게 금석학과 고증학을 배웠고 북학파의 맥을 잊는 실학자이기도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전형적인 외교관이었던 그는 사신단과 함께 수시로 청나라를 왕래하였다. 그는 제주에 두 번이나 찾아와 스승의 안위를 걱정하며 위로해 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북경에 갈 때마다 그곳 학자들이 추사의 안부를 묻는 등 관심을 보이는 것을 접하고 새삼 추사의 명성과 위상을 인지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그때마다 추사가 좋아할 만한 <만학집>, <대운산방집>을 1843년 중국에서 인편으로 직접 부쳤고, 그 후에도 <우경문편>, 정정조의 <역설>, 저수량의 법첩 <이궐불감비> 등 고가의 서책을 구입하여 대정현으로 보내주었다. 모두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더구나 청나라의 광범위한 분야의 실용적인 지식과 사상을 집대성한 방대한 분량(120권 79책)의 <황조경새문편>을 구입하여 무상으로 추사에게 선물했다. 당시 서책값이 지금보다 훨씬 비싼 고가였던 것을 감안하면 그것도 북경에서 많은 서책을 구입하여 자신에게 대가 없이 준 이상적에게 감화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가의 문방사우도 무상으로 보내주었다. 유배 전보다 유배 시에 보다 각별하게 대하는 이상적이었기에 고마움은 배가되었다. 추사는 이런 이상적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보답은 작품을 만들어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세한도가 탄생했다. 세한도의 발문을 보면 그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장무상망이란 네 글자를 세긴 낙관을 오른쪽 아래에 찍었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라는 뜻이다. 장무상망은 한나라 때 출토된 와당에서 발견된 문구라고 한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다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중국의 많은 문인들에게 자랑을 하였다. 그리고 16명의 명망가들로부터 감상문을 받았고 추후 그 시문을 세화도 옆에 길게 붙여서 한 편의 작품 서사를 창출하였다. 이후 세한도는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추사의 말을 어기고 주인이 10명이 넘는 곡절을 겪은 끝에 지금은 국립박물관 품에 있다고 한다. 이상적, 그의 제자 김병선, 김학준, 민영휘, 민규식, 후지츠카 치카시, 손재영, 이후 7명의 소장자를 거쳐, 1970년에 손세기, 손창근 등의 손에 들어갔다.
역시 추사의 제자 강위는 1846년부터 해배 마지막까지 스승을 보필하였다. 당시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였던 강위는 말단 관료 출신 집안의 자제로서 과거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뒤에는 중인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학문과 시문에만 매진하였다. 그는 추사에게서 금석학과 고증학을 사사하고 북학파의 맥이 이었으며 서예와 시문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수학하였다. 그는 추사의 심전 제자를 자처하며 제주 유배는 물론이고 훗날 추사가 북청 유배 시에도 그를 따르며 스승을 지척에서 모셨다. 그는 추사 사망 후에도 조선 개화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홍집, 어윤중, 유길준 등이 그에게 글을 배웠다. 언론기관인 박문국을 설치하고 한성순보의 발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조선말 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조인영과 함께 소싯적 진흥왕순수비에 대한 금석학 연구에 매진했던 도반 중에 권돈인도 있었다. 비봉에 있던 거대한 비석이 무학대사의 비라고만 알고 있던 당시 추사가 직접 답사하고 고증학적으로 연구하여 진흥왕순수비라 밝힐 때도 조인영과 권돈인이 함께 했었다. 안동권 씨 가문 출신으로 자기 관리를 잘하고 처세술이 좋았던 그는 안동김 씨와 풍양조 씨의 득세에도 고위 관직을 유지하였다. 여러 친우들 중에서도 추사는 그와 초의 다음으로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였다. 권돈인도 인삼과 각종 약재를 그에게 보내며 우애를 잊지 않았다. 그에 대한 평판은 나쁘지 않아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말년에는 철종과 그에 따른 복잡한 예송 문제에 개입하여 열띤 논쟁을 벌이다가 결국 안동김 씨에 의해 유형을 따나기도 하였다. 당시 세상이 추사와의 친분관계를 다 아는 가운데, 권돈인의 유형으로 인해 예송 논쟁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친하다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어 추사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모진 삶을 살지 않았던 그였지만 김대건 신부의 사사에서 그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1846년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반국가 세력의 수령으로 국문을 받고 유배를 보내느냐 참형을 하느냐를 두고 설왕설래를 할 때, 당시 영의정이었던 권돈인이 헌종에게 참형을 강력하게 주청 하여 결국 김대건 신부는 새남터에서 효수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프랑스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구명론도 대두되었지만 권돈인을 비롯한 척사파들은 천주교는 사교로 규정하여 피비린내 나는 박해의 원흉이 되었던 것이다.
당시 전라우수사로 재임하던 신헌도 재임 3년 동안 추사에게 각종 생필품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서울에서 가기 꺼리는 전라도 해남 우수영에 자원을 하였는데 추사와 근접거리에서 보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 역시 특이하게 무인이면서 이상적과 같은 추사의 제자로서 금석학 교육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실학자라고 불리는 최한기 박규수 김정호 등과 폭넓게 교류하였다. 그는 말년에 개혁파의 일원으로서 강화도 조약체결을 할 당시 조선의 전권대신으로 활약하였다.
그렇게 현직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사를 도와주었는데 그중에서도 제주목사들이 다수였다. 당시 조선의 권력층에는 조인영과 권돈인 같은 친구들이 계속해서 영의정에 오를 정도로 그의 정치적 배경은 상당하였다. 이와 함께 가까운 시일 내에 복권될 것이란 전망과 기대감도 컸다. 가문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지인들의 배경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연유로 제주목사로 부임하는 사람마다 추사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할 수 있었다. 추사가 제주에 있던 8년 4개월 동안 구재룡, 이원조, 이용현, 권직, 장인식 등 5명의 목사가 부임하였는데 모두 그랬다. 특히 1848년 3월 마지막에 부임한 장인식과는 추사가 해배된 그래 12월 초까지 많은 편지를 수시로 주고받으며 적극적으로 교류하였고, 보양 음식과 약종 약재를 달마다 인편으로 보내며 남다른 친분을 과시하였다. 아마도 장인식은 초사가 금방 해배될 것이란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이런 제주목사의 도움으로 추사는 제주목에 가서 송시열의 유허비를 참배하고 시를 남길 수 있었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많은 지인들이 그를 도왔지만 추사의 두 아들도 아버지를 위해 효를 다하였다. 추사에게는 서자와 양자만 있었을 뿐 두 아내와의 사이에 적자를 생산하지 못했다. 아무튼 첫째 아들 김상우는 기생 초생에게서 얻었고, 김상무는 유배시절 초 양자로 입적하였다. 두 아들은 수시로 번갈아 가며 대정현으로 내려와서 추사를 돌보았다. 그리고 추사의 비복도 그의 수발을 돌보았고, 대정현 뱃사람 양봉신도 지척에서 그의 수족이 되어 주었다.
그 밖에도 그의 적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육지에서 온 대학자를 대면하고 한 글자라도 배우기 위해 대정현은 물론이고 제주목과 정의현에서도 유생들이 수시로 찾아왔던 것이다. 추사는 그들을 마다하지 않고 단산 아래에 있는 대정향교에서 그들을 가르쳤다. 박혜백, 이시형, 홍석호, 강시공, 허숙, 강도순 등 그에게 수학한 인원이 30명에 이른다고 한다. 때로는 대정현의 아동들의 훈장으로 소일하며 적거생활을 이어갔다.
추사의 나이도 63세 되었다. 어느덧 대정에 온 지도 8년, 그는 60갑자도 지난 완전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늦가을의 삭풍이 부는 어느날 그는 대정성읍 밖으로 잠깐 나와 멀리 산방산을 보며 깊은 회안에 잠겼다. 긴 시간이었다. 지나온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8년 전 해남 관두포를 떠나 제주 화북진에 도착한 후 산록길 100여 리 길을 걸어 대정읍성에 도착했었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황량한 들녘과 빼곡한 숲을 지나는 먼 여정이었다. 무엇보다 지천에 깔린 암석으로 인해 발걸음은 더욱 무거웠다. 서울에서 한 달 만에 대정에 도착한 추사는 송계순의 집에서 2년, 강도순의 집에서 6년 이상을 살았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스스로 귤중옥이라고 불렀다. 주변에 관에서 관리하는 귤 과수원이 많았다. 온통 귤나무였던 모양이다.
처음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제주에서도 대정현은 가장 척박한 지역이었다. 대정이란 뜻은 큰 고요함이다. 200여 년 전에 먼저 온 정온은 대정을 적막한 대정이라고 했다. 권문세가의 장자로서 살아온 추사에겐 이런 환경은 감옥이었다. 혓바늘이 돋고 코가 헐고 각종 풍토병이 시달렸고 외로움은 더욱 깊어갔다. 편지를 쓸 때마다 투정을 부리고 짜증내기도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먼저 유배 왔던 이세번, 정온, 신임, 임징하, 권진 등을 생각하며 궁벽한 유배생활을 조금씩 받아주었다.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서 살았을까. 자신이 처한 환경을 거부한다면 그곳에서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그곳엔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수선화가 가득했다. 그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다스렸다. ‘한 점 겨울 마음이 송이송이 둥글게 피어나... 맑은 물에서 진정 해탈한 신선을 보는 듯하네’
멀리서 아내를 먼저 보내고 비통하였지만 친구와 제자들이 이 먼 곳까지 찾아와 자신을 위로해 주었다. 심지어 강위는 올라가라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의 옆을 지켜주웠다. 찾아오지 않는 친구들에게는 많은 편지를 썼다. 편지 쓰는 시간은 행복했다. 시간이 지나자 대정과 친해지고 그곳 사람들을 품었다. 그를 찾아와 학문을 배우려는 제주 유생들에게 진심으로 자신의 지식을 전해주고 정담을 나누었다. 처음엔 벽지의 보잘것없는 유생들이라고 폄하하였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들에서 사람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음식이 오지 않아도 대정 음식을 잘 먹었다. 그리고 그는 제주목사의 허락으로 제주목과 한라산을 여행하며 그동안 제주에 살다 간 많은 유배인들의 흔적을 밟기도 했다.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 사람의 소중함도 알았다. 자만으로 가득했던 지난 세월이 부끄러웠다.
추사는 편지에서 양봉신을 자주 언급하였다. 그는 뱃사람으로서 추사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추사의 많은 편지를 보내는 전족 역할도 하였고 원하는 물품도 구해주었다. 생면부지의 그는 바라는 것 없이 진심으로 추사를 위해 헌신하였다. 추사는 그에게 대놓고 고마움을 표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론 항상 결초보은이었다. 훗날, 북청 유배를 잠깐 다녀온 후 20년 만에 돈오와 같은 영감을 받고 난을 쳤다고 하는 <불이선란도>에 보면 이 작품을 달준에게 헌정한다는 발문을 달았는데, 달준이라는 사람은 적소 마을에서 양봉신처럼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그는 먹동이라고 불릴 만큼 자신 옆에서 먹을 갈아주고 허드렛일을 하던 시동이었다. 추사는 양봉신에게 보답하지 못한 마음의 표현을 달준에게 적극적으로 표했는지 모른다. 추사는 그런 달준을 해배 후에도 과천으로 데리고 와 옆에 두었다고 한다. 자신의 작품에 사람 이름을 적시한 것은 <불이선란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세한도>를 이상적을 위해 창작하였다는 것은 다 알지만 발문에는 이름이 적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만큼 달준이 각별했고 대정의 양봉신도 잊지 못하는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품고 초월해졌는지 모른다.
그렇게 추사는 대정을 떠났다. 대정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지표를 선사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 증표로 추사체를 보면 변화된 그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다. 자만으로 가득 찼던 그의 글씨는 묵묵히 담담하게 놓여 있는 반석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삶의 무게의 또 다른 표현인지 모른다. 유홍준의 표현처럼 기름졌던 그의 글씨는 기름기 쫙 뺀 단순하고 진중한 형태로 변하였던 것이다. 바로 그 추사체는 생의 초탈함을 응축시킨 말년의 초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판은 1856년 10월, 세상을 하직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하는 봉은사의 <판전>이다. 그 작품 앞에 있으면 그의 내면의 풍경을 엿보는 듯하다. 인생의 쓸쓸함이 진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