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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호용 Jun 18. 2020

두려워하지 마라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몇 해 전, 철원 금학산을 넘어 고대산으로 가는 주능선 안부 헬기장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금학산의 벌크 업된 우람한 근육질을 감상하고 있을 때 조금 전까지 뒤를 쫓아오던 한 무리의 산악회 산꾼들이 씩씩거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열 명 남짓한 그들은 말하는 것으로 보아 충주에서 올라온 열혈 산꾼들이었다. 나야 서울 근교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청주에서 도립공원도 안 되는 이 먼 곳까지 올라온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었다.     


옆에서 잠시 숨을 고르면서 한바탕 수다를 떨던 그들이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고, 후미를 맡은 듯한 구릿빛 건장한 사내가 뒤따라 자리를 뜨려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혼자 다니세요?”

“네.”

“나도 한 때 혼자 다녔었는데... 한번 두려움을 경험한 후로 혼자 못 다니겠더라구요”

“아 네...”

“그럼 즐건 산행되세요”

그는 이렇게 경의를 표하고 선행자 꽁무니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니까 그가 말하고자 했던 뜻은 자신도 한때 단독산행을 열심히 했었는데 어느 날 찾아온 두려움으로 인해 단독산행을 접었다는 것이다. 자신도 누구보다 등산에는 자신 있다고 자부하지만, 단독산행을 못하는 반쪽짜리 산꾼에 불과하며 자유롭게 홀로 산행하는 당신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다는 다소 자조 섞인 표정을 내게 보여주었다.      

일동 무리울에서 오뚜기령으로 가는 임도

청계산(포천 일동)에서 가평 상판리 방향으로 하산하는 능선길이 있는데,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아서 등산로가 험하고 불분명했다. 어느 여름날, 처음 그 코스를 갔을 때였다. 거친 능선을 거쳐 경사면에 접어들었을 때부터 길을 잃고 알바를 수차례 하면서 겨우 수풀을 헤치고 임도로 떨어졌다. 말이 임도지 폐허가 된 채 사람 키 만 한 풀들로 뒤덮여 있었다. 더구나 북동향에다가 움푹 들어간 굴곡진 능선부여서 분위기가 어둡고 음습했다. 마지막 부분에서 가시덤불을 헤집다시피 해서 내려오느라 몸과 정신이 혼미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 고립된 폐쇄적 분위기에 나는 압도를 당했고,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어떤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빨리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수풀로 덮인 산길을 따라 무작정 황급히 움직였다. 누군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산이 나를 잡아 채 입속으로 쳐 넣을 것 같았다. 가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나는 몸부림치고 있었다. 물론 통신은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낙엽이 지던 어느 가을날 나는 똑같은 코스로 복습 산행을 갔다.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그 장소를 맨 정신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펀치볼처럼 좀 움푹 들어간 공간이었고 동북향이어서 햇볕이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처음 갔던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100여 미터 정도 가본 결과 그곳은 음습하지 않았다. 임도 모양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3거리가 나왔다. 당시에는 공간과 시각의 불일치로 인해 인지 능력에 대혼란이 일어났을도 모른다. 여하튼 두려움은 냉정함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산과의 관계를 경색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단독 산행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가 있다. 두려움은 등반할 때 닥치는 고소에 대한 공포증이 아니라 산속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변화를 말한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어떤 질병으로 인해 쓰러진다면 구출될 수 없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닥쳐올 때, 아주 깊은 정적과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산의 기운을 느낄 때, 이 산속에서 영원히 나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어떤 일시적인 공황장애 같은 것을 경험할 때 그 두려움은 악귀처럼 자신을 지배한다. 그리고 여러 해 전 겨울,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아들 녀석을 데리고 명지산 사향봉 능선을 간 적이 있었는데, 며칠 전 폭설이 내린 후라 인적 하나 없는 험한 능선을 거의 러셀을 하면서 전진 했고, 몇 시간이 지나도 거리는 정상과 좁혀지는 기색이 없었으며, 그렇게 몸이 지쳐갈 무렵 잠시 휴식을 취하며 아들 녀석의 천진난만한 표정을 보고 있을 때 순간 '오늘 집으로 가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박혔으며, 그리고 곧바로 물 속에 빠친 것처럼 두려움이 나를 질식하게 만들었다.             


흔히 사람들은 산속에 들어가면 무섭다고 한다. 그 막연한 무서움이 바로 옆에서 자신을 가위처럼 짓누르는 심리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런 두려움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꽤 오래 지속되어 무엇에 쫒기 듯 발걸음이 빨라지기도 한다. 그럴 경우 새들이 스치는 나뭇가지 소리와 바람소리 등도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뒤에서 누군가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하여튼, 이유야 어찌 되었든 공포심이 들고 그 회수가 습관적으로 자주 나타난다면 결단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일동과 가평 북면을 잇는 오뚜기령 / 왼쪽은 국망봉 백운봉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귀목봉 명지산 연인산으로 이어진다 / 경기도에서 가장 긴 능선 코스  

그 두려움은 등산 경력과 체력과 정신력과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또한 흔희 말하는 담이 약해 무서움을 잘 탄다든가 혹은 사람 개개인의 기질적인 맨탈의 문제가 원인이라고 보지 않는다. 산에서의 두려움은 그것들과 연관성이 없다.      


문제는 산에 동화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차이이다. 산속에서 접하는 적막함이 혹여 거북하다면 산과 나와의 결합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고 당연히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산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오감을 포용하면 두려움으로부터의 감염을 차단할 수 있다. 산은 밖에서 보면 아름답고 평온하게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시각적인 감각 외에 다른 감각들이 활발하게 작동되기 때문에 심리상태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까 산에서 보이는 모든 오감이 긍정적으로 반응해야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두려움은 싸워서 물리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강한 맨탈 소유자라 하더라도 깊은 내면에서 흔들리는 두려움을 억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고도의 정신 수행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도 방법이나 가치적인 측면에서 볼 때 타당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산은 거기 존재하고 있을 뿐 변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그런 나를 산이 받아주지 않는 것이므로 산을 대하는 내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겸손이다.      

오뚜기령 넘어 강씨봉휴양림, 논남기로 가는 숲길 / 강씨 성을 가진 화전민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한 두려움이 없다면 홀로 깊은 산길을 걸을 때 담담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발길에 스치는 수풀 소리와 때론 거친 숨소리와 그리고 산속에서 들려오는 여러 소리 등이 이 숲에서의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힐링이니 평화니 자유니 하는 단어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부족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걷는 나를 보게 된다. 수행을 위한 걸음도 아니고 체력적인 보강을 위한 걸음도 아니고 자신을 찾아가는 철학적 사유도 배제된 그저 담담함만이 나를 지배한다. 좀 속되게 표현하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는 것이다.     


만약 약한 두려움이라도 무의식에서 발원할 때가 있다면 산행 도반과 함께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화되기 마련이기 때문에 어떤 사유로 마음이 불안해지면 모든 인식적 요소들이 불안정해지므로 그럴 경우는 한두 명 마음에 맞는 사람과 동행하면 한결 평온해진다. 물론 그 동행자가 산과 친숙하고 임도 산행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다면 하루 종일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니까 말이다.     


언젠가 까칠한 숲의 정령이 나를 노려보고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고대산 능선 안부에서 마주친 그 산꾼처럼 홀로 산행을 못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그날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오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세로 문을 열고 산길로 들어선다. 숨을 한번 깊게 들어마신다. 숲의 주인인 타피오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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