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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엔나에서 3일:#10 Jazz Land

by 새로나무

1972년 재즈랜드는 문을 열었다. 처음부터 세계적인 스타와 고유의 재즈 인재들을 함께 무대에 세운다는 방침을 고수해 왔으며, 재즈가 비엔나 문화생활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루프레히츠 교회(Ruprechtskirche) 지하에서 오스트리아 뮤지션들은 물론, 300명이 넘는 미국의 스타들이 무대를 빛냈다. 블루스 전설인 루스벨트 “허니드리퍼” 사이크스, 멤피스 슬림, 빅 조 윌리엄스, 리틀 브라더 몽고메리부터, 클래식 재즈의 거장 와일드 빌 데이비슨, 버드 프리먼, 맥스 카민스키, 지미 맥팔랜드, 스윙 시대의 거성 테디 윌슨, 클라크 테리, 해리 “스위츠” 에디슨, 베니 카터, 모던 재즈의 대표주자 아트 파머, 에디 “롭죠” 데이비스, 레이 브라운, 허브 엘리스, 그리고 심지어 아방가르드 선구자인 데이브 리브만, 리 코니츠, 폴 모티 안, 밥 브룩마이어까지, 그야말로 모든 스펙트럼의 재즈가 연주되었다. 재즈랜드의 소망은 정확히 구조화된 엄격한 형식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표현까지, 재즈의 전 스펙트럼을 선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약간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좁은 마당을 거쳐 약간의 설렘을 안고 입장한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그동안 공연했던 프로그램들로 빼곡하다. 5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연주가와 관객들이 만들어냈을 에너지가 응축된 공간, 티켓을 받는 분과 음식 주문을 받는 분들 모두 음악이 친구인 사람들처럼 보인다. 공연장에서 제대로 영업을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지 않았다. 내려오는 깊이가 지하 1.5층 정도 되어 보여서 카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입장권은 큰 딸이 사두었기에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사는 방식을 물어보니나 "Only Cash"라고 해서 얼른 밖으로 다시 나왔다.


ATM기계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00유로와 150유로를 저울질하다가 200유로를 뽑아 다시 입장했다. 다시 입장하면서 보니 이 공간의 모양이 벙커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지트 같은 느낌도 들어서 좀 전 보다 훨씬 아늑했다. 공연자들을 마주 보는 홀에는 자리가 없고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뮤지션들이 준비를 하기 위해 일어서는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운이 좋았다. 화장실과 인접한 안쪽은 음악소리도 약간 멀고 무대에서 더 멀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자기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을 하는 연세 지긋한 여가수님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셀카를 찍었다가 큰 딸에게 면박을 들었다. 그런데 내 시선은 면박이 아니라, 벽에 걸린 사진으로 향했다. 젊은 시절의 음색을 여전히 간직한 채, 시간의 흐름만 빼면 그대로 일 것 같은 해맑은 모습의 방금 여가수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오버랩되면서 같은 인물일 거라는 추측. 한참 젊은 시절 아름다운 여인이 마이크 앞에서 눈을 감고 심취해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저 사진은 아마도 오랫동안 찍었던 수많은 사진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랐으리라. 우아하고 눈부신 젊은 날의 자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세월이 흘러 외모는 많이 변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젊은 시절 못지않을 것 같은 포스를 느꼈다. 연세 지긋한 서빙하시는 분께 같은 사람인지 물어보니 맞다고 대답해 주신다.

연주가 시작되기 전 Ottakringa 맥주를 주문했다. 맑고 투명한 라거의 맛처럼 시원한 재즈 연주가 시작되었다.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지 않는 경계선 어딘가에서 즉흥성과 유연성이 묻어있는 연주를 감상한다. 이해가 안 된다고 실망할 필요 없이 지금 이 순간 흐르는 선율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것으로 끝이다. 이들이 전달하려는 에너지가 내 몸 구석구석 도달하는 느낌에 맡기는 것.....으로 충분하다.


젊은 사람들 위주의 클럽 분위기가 보편화된 대한민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연세 드신 분들과 젊은 사람들이 서로 편하게 어울려 있어서 놀랬다. 나이가 든다고 음악에 대한 감성이 무뎌지는 것은 아니며, 노화가 삶의 열정을 식게 만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축적된 경험과 기억 속에서 더욱 음악에 몰입하고 즐길 수 있는 역량은 올라간다. 몸이 마음처럼 잘 움직이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꾸준히 운동하고 좋은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활동을 통해 몸의 균형과 뇌의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흥겨워하고 자연스럽게 음악에 몸을 맡기는 일은 살면서 해볼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멋진 일이 아닌가? 그렇게 나도 자연스럽게 일어서게 되고 드럼의 비트와 기타와 피아노의 선율에 따라 흔들흔들 거린다.



오타크링거(Ottakringer) 맥주는 빈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대규모 독립 양조장 중 하나로, 1837년 설립되었다. 비엔나의 16번째 구역인 '오타크링(Ottakring)'에 위치해 있어서 현지에서는 '16er-Blech' (16번 구역 깡통) 또는 '16er-Hüs'n' (16번 구역 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통적인 오스트리아 맥주 스타일을 고수하면서도 현대적인 크래프트 맥주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헬레스(Helles)는 부드럽고 상쾌한 맛이 특징인 라거인데 그 빛깔이 아름답다. 빈 오리지널은 전통적 비엔나 라거 스타일을 재현한 맥주로 구릿빛을 띠며 고소한 몰트 풍미와 부드러운 홉 향이 조화를 이룬다. 이밖에 츠비켈(Zwickl)은 필터링을 거치지 않아 효모와 단백질이 남아 있어 탁한 색을 띠는 맥주로 부드러운 질감과 풍부한 풍미가 특징이라고 한다. 브라우베르크(BrauWerk)는 오타크링거 양조장 내에 있는 크래프트 맥주 브랜드로, IPA, 스타우트 등 다양한 현대적인 맥주 스타일을 실험하고 생산하며 맥주 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2019년 비엔나 출장 일정을 마치고 공항에서 주문했던 바로 그 맥주를 만났다. 추운 겨울 비엔나의 음식점, 사람들, 미술관과 궁전과 거리의 풍경들이 버무려진 맥주를 마시며 아쉬워했던 추억들이 다시 음악과 함께 맥주잔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음식을 먹는 것은 추억을 먹는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을 먹는 것이다. 먹고 난 뒤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할 때 이 음식과 사라져 버린 선율과 사람들의 인상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프랑스 남편과 스페인 부인은 결혼한 지 40년 되었다고 한다. 나라를 넘나드는 사랑이 유럽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겠구나. 남편은 예전에 가수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두 분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갖고 있어서 금방 친해졌다. 잠시 쉬는 시간에 스페인 남편과 프랑스 부인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결혼한 지 40년 되었다는 부부는 흥이 아주 많다. 스페인 부인, 음악에 몸을 맡기면서 예전의 우아했던 그리고 날렵함의 흔적이 남아있는 춤을 추고 남편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본다. 두 사람이 삶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이 그 한 장면만으로도 멋진 인생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2주간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곳, 재즈 랜드는 우리에게 큰 선물을 줬다. 아쉬움도 설렘도 다 녹이고 편히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고 가시라고. 이번 여행 비엔나에서의 마지막 밤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것 같다. 가슴이 시린 추억이 아니라, 즐겁고 흥겨웠던 추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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