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가치는 액자 속 구호일 뿐이다?

by 최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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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 연수원에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은 적이 있다. 후세인 정권 붕괴 후 IT를 통한 성장을 꿈꾸는 쿠르드 자치정부의 요청으로 이라크, 터키, 시리아의 대학생 120여 명을 선발하고, 두 차수에 걸쳐 한국으로 초빙해 총 4개월간 개발자로 양성하는 미션이었다.


교육 첫 주, 교육장이 술렁였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학생들이 하나둘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이유는 그들이 정해진 시각에 메카 방향으로 기도를 해야 했던 것이다.


많은 고민 끝에 빈 강의실 하나를 예약해서 요가 수업용 파란색 고무 매트를 빌려와 깔고, 날짜별 일출과 일몰 시각을 출력해서 벽에 부착하고 메카 방향을 표기해 주었다. 그리고, 기도 시간을 고려해 교육 시간표를 재편성했다.

라마단 기간은 더 큰 도전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그들을 위해 교육 방식을 바꿨다. 오전에는 이론 중심의 가벼운 학습을, 일몰 후에는 실습 위주의 집중 교육을 진행했다.


음식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축된 고기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연수원의 조리사가 이태원의 할랄 음식점에서 요리를 배우고 고기를 구입했다. 돼지고기는 물론, 돼지고기를 다룬 도구도 철저히 분리했다. 식당 한쪽에 할랄 전용 조리 공간을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이 쌓이자 그들은 점차 마음을 열고 안정감을 찾았다. 결과적으로 모든 학생이 수료했다. 교수진은 수료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와 문화를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생 대표도 덧붙였다. "브라더, 교육 내용이 기대 이상이었고, 음식도 잘 맞았습니다. "


돌이켜보면, 우리가 한 일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 것뿐이었다. 그것이 120명의 학생을 한 방향으로 정렬시킨 힘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쿠르드 자치정부 내 한국 전자제품 점유율이 80%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종교가 집단을 한 방향으로 묶는 초월적 힘인 것처럼, 기업에서는 기업문화와 핵심 가치가 그 역할을 한다.


삼성핵심가치, 현대 Way, LG Way, NC Value, SKMS(SK Management System), Lotte Way, Toss Core value와 같은 기업의 가치 체계가 액자 속 구호처럼 무용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일관되게 강조하면, 조직을 하나로 묶는 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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