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노력하면 할수록 망가지는 팀
신임팀장 교육, ‘90일 안에 장악하라’
처음 팀장이 되었을 때, 외부 교육 하나를 추천받았다. 제목은 ‘90일 안에 장악하라’였다. 90일은 딱 3개월. 신임 팀장이 3개월 안에 팀을 완전히 파악하고 장악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교육 내용은 체계적이었고 강사는 삼성전자 임원 출신에 말솜씨까지 좋았다. 첫 30일은 관찰과 진단, 다음 30일은 전략 수립과 신뢰 구축, 마지막 30일은 초기 성과 창출. 논리적으로는 완벽해 보였다. 나는 이 프레임워크를 충실히 따르려 했다. 매일 팀원들과 면담을 잡고, 업무 프로세스를 분석하고, 개선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현실은 교육과는 달랐다. 팀원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고, 나는 시간에 쫓겨 충분한 소통 없이 일을 진행해야 했다. 3개월이 지났을 때, 단기적인 성과는 나왔지만 팀의 피로도는 극에 달했다. 일부 팀원은 “왜 이렇게 급하게 모든 걸 바꾸려 하느냐”라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나중에 깨달았다. ‘90일 장악’은 안정된 산업,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나 가능한 접근법이었다. 매일 시장이 변하고 고객의 요구가 바뀌는 현실에서 3개월 계획은 출발점부터 빗나가기 쉬웠다. 무엇보다 ‘장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잘못된 프레임이었다. 팀은 장악하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가는 동료이며, 지지를 통해 자율성을 부여해야 하는 공동체였다.
LG전자: 거대한 항공모함
LG전자에서의 12년은 체계와 규모의 힘을 실감하며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TV 연구소에서는 1년 이상의 제품 개발 로드맵이 무리 없이 작동했다. “독일산 신규 칩(Chip)을 적용하여 연내 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 신모델 출시”같은 목표는 명확했고, 달성 여부의 측정도 어렵지 않았다. 연수원에서는 “전사 임원 및 팀장 교육 개발 및 수료율 95%”같은 연간 목표가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생산기술원, CTO HR팀, 소프트웨어센터 등 어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연간 KPI가 효과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조직과 직무의 미션이 명확히 고정되어 있고, 시장분석, 구매, 개발, 유통 채널이 잘 구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거대 조직이면서도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소프트웨어센터에서는 애자일 전문가 집단을 통해 전사 차원의 애자일 개발을 확산시켰다. 정통성과 변화가 공존하는 환경이었다. 연간 계획이라는 큰 틀 안에서도 다양한 실험과 도전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나는 전통적인 사고에 갇혀 방향을 신속히 변화를 만들지 못했다. 전사 소프트웨어 개발자 육성을 담당하면서 제도와 프로그램을 대규모로 확산시키는 것에만 급급했고, 시장의 변화를 읽어내어 변화에 맞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빠르게 기획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모바일 사업본부와 연구소는 시장 트렌드의 급변과 구글 안드로이드 버전의 빠른 업데이트에 기민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변화에 따라 전략을 수립하고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며 개발 방식을 전환해 나갔다. 반면 전사 인재육성 담당자였던 나는 연수원에 앉아서 기술과 시장의 변화를 체감하지 못한 채 연 단위 목표만을 바라보며 달렸다. 연초에 수립된 목표는 유관 부서의 목표 및 외부 업체와의 계약과도 연결되어 있어 잦은 변화는 협업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변화를 거부하며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수원에서 제공하는 전사 교육은 현장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소프트웨어 아키텍트 같은 제도는 탁상 행정이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부정적 피드백이 들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 즈음이다.
엔씨소프트: 민첩한 요트
엔씨소프트로 이직한 후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KPI에 기반한 연간 목표 설정 절차가 없었다. “업무 목표는 언제 정하나요?”라고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담담했다.
“올해는 안 하는 것 같아요.”
처음 3개월은 혼란 그 자체였다. 목표 없이 어떻게 속도를 낼 수 있지? 진척도는 뭘로 측정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다. KPI라는 직선 트랙이 없어지자, 유연하게 업무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다.
게임 회사의 본질은 유저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니즈를 분석하고, 새로운 콘텐츠를 추가하고, 버그가 발견되면 바로 수정한다. 연간 목표라는 족쇄가 없으니 “이건 내년 계획이니까”라는 변명도 없었다. 목표가 없어도 할 일은 끊임없이 생겼고, 오히려 더 빠르게 대응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목표가 없는 게 아니라, 게임 론칭과 같은 합의된 거시적 목표 하에 기술과 환경 변화에 따라 수시로 작은 목표를 수임받는 구조였다.
최고인사임원에게 보고하던 날을 특히 잊을 수 없다. 팀장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무언가를 증명하고 싶은 조급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려한 자료를 준비했고, 10분 안에 모든 것을 쏟아내려 했다. 말의 속도까지 빨라졌다. 성과를 빨리 보여주고, 신속하게 승인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보고내용을 듣고 있던 최고인사임원이 조용히 손을 잡으면서 나지막하게 물었다.
“잠깐만요.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할까요?”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How’와 ‘What’은 완벽했지만, ‘Why’는 준비되지 않았다. 그 후 일주일 동안 ‘Why’만 고민했다. 왜 이 프로그램이 필요한가? 왜 지금인가? 왜 우리가 해야 하는가? 본질적 질문에 답을 찾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하지만 실행도 일주일 만에 끝났다. 방향을 이해하니 억지로 속도를 올리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빨리 달린 셈이 되었다.
SK: 크루즈선
LG가 거대한 항공모함이고, 엔씨가 민첩한 요트였다면, SK는 크루즈선이다. 목적지는 분명하지만 항로는 유연하게 조정하며, 승객의 편안함을 놓쳐선 안 되는 선박이다. SK에서 나는 두 극단 사이의 절묘한 균형점을 발견했다. 연초에 ‘AI 역량 인증 플랫폼 구축과 사업화’같이 목표는 설정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실행 계획은 분기별, 때로는 월별로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물론 모든 팀이 이런 자율성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권한이 제한적이고 상급자의 세세한 관리를 받는 환경에서 일하는 팀장이라면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이런 상황에서는 먼저 작은 영역에서 신뢰를 쌓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주간 보고서의 형식을 개선하거나, 팀 내 회의 방식을 효율화하는 것처럼 상급자에게 승인받지 않아도 되는 소소한 부분에서 성과를 만들어야 한다. 작은 성공들이 쌓이면 점진적으로 더 큰 자율성을 얻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제약을 한탄하기보다는 주어진 경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제약이 많은 환경에서 성과를 낼 때 진짜 리더십 역량이 증명된다.
우리 교육사업팀의 연초 목표는 매출 10억이었다. 하지만 시장 반응이 좋으면 20억, 30억, 40억까지 상향 조정했고, 어려우면 하향 조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목표 미달성이 죄악시되지도 않았다. 대신 “왜 안 됐는지, 무엇을 배웠는지, 다음엔 어떻게 할 것인지”에 집중했다.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목표를 선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이것이 진정한 애자일이었다. 최선의 방향과 거리를 수시로 재계산하며 나아가는 것.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도 놓치지 않는 것. LG의 안정성과 엔씨의 유연성 사이의 적정 지점이다.
이 세 회사의 경험이 가르쳐준 교훈은 조직의 성숙도, 시장의 변동성, 업의 특성에 따라 최적점이 다를 뿐, 중요한 건 우리 조직에 맞는 보폭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반보만 앞서 걸어라.
일의 속도와 함께 팀원을 이끄는 속도도 중요하다. “리더십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맞는 말이지만 여전히 불충분하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리더십은 팀과 보폭을 맞추며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신임 팀장들이 가장 자주 하는 실수는 두세 걸음 앞서 달리며 “빨리 따라와!”를 외치는 것이다. 특히, 스스로 팀원보다 경험이 부족하거나 스스로 멘털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팀장은 의식적으로 속도를 높이고 팀원을 가혹하게 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팀원들은 지치고, 팀장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해 고독한 위치에 서있게 된다. 진정한 팀장은 반보만 앞선다. 충분히 앞을 내다보되, 팀원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이 반보 리더십의 핵심이다. 너무 앞서가면 팀을 잃고, 너무 뒤처지면 리더십을 잃는다. 그 미묘한 균형점이 바로 ‘반보’다.
신임 팀장은 첫 해에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속도를 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1년 이내에 팀장 자리는 내려놓게 되는 경우는 드물다. 최소 2년 정도는 자리가 보전된다. 따라서, 과도한 조급함을 버리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팀의 성과에 도움이 된다. 팀의 초기 1개월은 관찰에, 다음 1개월은 작은 실험에, 그다음은 팀의 리듬을 만드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성과는 건강한 리듬이 만들어진 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빠른 변화를 추구하거나 위계가 명확한 조직에서 팀 단독으로 속도 조절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성공할 수만 있다면 팀장의 ‘반보 리더십’은 더욱 전략적 의미를 갖는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무작정 전달하는 메신저가 아니라, 팀의 현실에 맞게 번역하고 조율해야 한다. 경영층이 요구하는 속도와 팀원이 소화할 수 있는 속도 사이에서 ‘반보’의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경영층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조직 전체의 지속가능한 성과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곡선에서는 천천히 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천천히 서두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