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온도 99도 고수의 품격, 덕분에 따뜻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당근마켓에서 좌식자전거 한 번 알아봐라."
형에게서 카톡이 왔다.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가 추운 겨울 집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 좌식자전거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무더위도 지나가고 어느새 바람이 매섭다. 이왕 사려고 마음먹은 거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새 물건을 사면 클릭 몇 번이면 끝이 나겠지만 중고거래 특성상 여러 물건을 비교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뭐든 대충 하는 나와는 달리 꼼꼼한 형의 오더는 무척 디테일하고 까다로웠다.
- 좌식 실내자전거일 것
- 깔끔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을 것
- 가격은 10만 원 이하일 것
- 비용은 본인이 낼 테니, 구매랑 배달은 내가 할 것
- 물건을 구매하기 전 직접 가서 상태를 확인할 것
아니 내가 무슨 백수도 아니고, 깨어 있는 내내 일 하는 사람한테 이런 요청이라니. 번거롭다 못해 살짝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열심히 운동을 해서 건강해질 모습을 상상하며 마음을 차분히 한 채 자전거를 하나 둘 클릭했다.
'좌식 자전거'로 검색을 하니 6개가 나왔다. 형이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딱 보니 상태도 괜찮았다. 판매 옵션에 '직배송'옵션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판매자의 매너온도는 무려 99도였다! 그런데 볼 것도 없이 구매를 하면 될 거라 생각한 나와는 달리 형은 좀처럼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직접 확인해 봤나?"
확실히 해서 나쁠 건 없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물건을 보러 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름 직거래만 하는 당근러로서 나는 내 감을 믿었다. 상태도 좋아 보이고 직접 배송까지 해준다는데, 이 정도 조건이면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본가는 아파트가 아닌 작은 주택이라 현관문과 방문 폭이 좁았던 것. 좌식자전거가 혹시나 생각보다 넓다면 직접 배송까지 와서 집 안으로 들이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에게 현관과 방문 너비를 재어달라 했다. 약 75cm라 했다. 사이즈를 확인 후 판매자에게 자전거의 가로 세로 길이를 물어보며 혹시나 못 넣지는 않을지 우려가 되어 물어본다고 톡을 남겼다. 잠시 후 75cm 정도의 너비라면 충분히 자전거를 넣고도 남는다는 답장이 왔다.
대화를 하다 보니 판매자가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치열한 대한민국 땅에서 본인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사업자등록증을 걸고 장사를 하는 분이라면 적어도 물건 하나 가지고 장난을 치거나 남을 속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직접 가서 보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자전거라는 특성상 배송을 오더라도 같이 들고 집 안까지 날라야 할 것이었다. 판매자는 금요일은 불가하고 토요일 영업 이후 7시 반쯤 물건을 배송해 준다고 했다. 다른 때보다 신경이 많이 쓰이는 당근거래였지만 일정을 잡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물건만 수령하면 될 것이었다.
<매너온도 99도 고수의 품격>
거래 당일 저녁 본가에서 일찌감치 대기 중이었다. 혹시나 몰라 핸드폰 연락처도 남겨드렸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판매자가 약속을 잊었나? 아니면 사기를 당한 건가? 그게 아니면 오다가 사고라도 난 것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더해져 갔다
40분쯤 지났을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집이 어디에 있어요? 아니, 4바퀴째 돌고 있는데 도저히 못 찾겠네!"
본가는 아파트가 아닌 단독 주택이다. 대로변이 아닌 좁은 골목길에 위치해 있어 네비를 찍고 오더라도 찾기가 힘든 곳이다. 혹시나 해서 폰번호를 남겨 드렸는데 아니다 다를까, 판매자는 집 주위를 수차례 헤매는 중이었다. 그분은 핸드폰 네비를 보고 운전을 하느라 내가 남긴 톡을 미처 보지 못했다. 계속 집을 찾다가 도저히 안 되어 전화를 한 것이었다.
판매자는 70대 정도로 아버지와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부부가 함께 오셨는데, 자전거가 무거우니 나르는 것을 좀 도와달라 하셨다. 다행히 자전거의 폭이 넓지 않아 대문과 현관문을 지나 아버지 방 안까지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자전거 상태를 확인한 뒤 계산을 하려는데 판매자 분이 갑자기 아버지를 향해 의자에 얼른 앉아보라고 하는 거였다. 당황한 아버지는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방으로 와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다음 순서는 어머니였다. 알고 보니 부모님 모두 자전거를 탔을 때 불편하지는 않은지 직접 확인하며 의자 위치를 세팅하는 과정이었다.
"처음에는 (강도를) 1로 해서 타세요.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5분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세요. 계속하다 보면 다리에 근력이 조금씩 생길 겁니다."
의자 세팅에 이어 사용 방법과 주의사항까지 자세히 알려준 다음, 그분은 주머니에서 뭔가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장판이 상하면 안 되니까 이건 서비스!"
그분은 자전거 바닥이 장판에 바로 닿지 않도록 직접 깔개를 만들어 오셨다. 자전거를 살짝 들어 장판과 자전거 사이에 깔개까지 야무지게 놓고 난 다음, 판매자는 그제야 일을 다 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당근 중고거래를 처음 경험하는 어머니가 본래 이렇게 친절하게 잘해주는 거냐고, 참 감사한 분이라고 뿌듯해하셨다. 나 또한 여러 번의 직거래를 했지만 이 정도 클라스는 처음이었다. 역시 매너온도 99도는 아무나 얻을 수 없는 것일까.
판매자는 단순히 매너온도만 높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척 따뜻한 분이셨다. 모처럼 효자분을 뵙게 되어 정말 좋았다며 항상 건강하길 바라며 좋은 일만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후기를 남겨 주셨다. 집을 나서며 아버지를 향해 열심히 운동하시라고, 건강하라는 인사말도 잊지 않으셨다.
또한 연세가 많아 보였지만 꽤나 건강해 보였다. 직접 물건을 배송해 가며 자주 당근 거래를 하는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니 뒷좌석에 자전거가 하나 보였다. 본가 근처에서 추가 거래가 있다고 하시며 얼른 가야 한다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을 달라고 했다.
단 한 번의 거래로 이 정도의 신뢰를 주는 분이라니, 필요 없던 물건도 갑자기 튀어나올 정도로 믿음이 가는 순간이었다. 평소 당근 거래보다 조금 더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좋은 물건을 저렴히 구매할 수 있었고, 부모님 또한 만족해하시니 참 감사했다.덕분에 갑작스러운 한파에도 마음만은 따뜻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