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관계의 거울, 그리고 내가 빚어낸 새로운 나

by 한끗

삶을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관계의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빛이 나를 비추면 나는 그 시선 속에서 나의 모양을 그렸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내 마음에 닿을 때 나는 그 울림으로 나의 깊이를 가늠했으며, 그렇게 수많은 관계의 파편들 속에서 나는 매번 조금씩 부서지고, 또 새로이 빚어지며 지금의 나로 다듬어져 왔다.
그 과정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사랑은 나를 녹였고, 상처는 나를 깎았으며, 이해받지 못한 날들의 고요한 밤은 내 안의 단단한 부분을 조금씩 갈아내며 새로운 결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관계란 언제나 나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가족의 기대는 내 안의 책임감을 자라게 했고, 친구의 따뜻한 배려는 나에게 신뢰의 언어를 가르쳤으며, 연인의 이별은 나로 하여금 사랑이란 소유가 아니라 이해임을 알게 했다.
직장에서의 갈등은 나의 미성숙함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타인의 불완전함을 포용하는 법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그렇게, 관계가 나를 흔들 때마다 그 흔들림 속에서 나의 중심을 조금씩 배워갔다.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는 결국 나라는 존재를 다듬는 조각칼이었고, 그 칼날이 내 마음을 베어내는 순간마다 나는 또 다른 나를 새로이 만들어냈다.

관계의 거울은 잔인할 만큼 정직하다.
그 속에는 내가 숨기고 싶었던 나의 모습이 낱낱이 비춰진다.
질투와 불안, 비교와 두려움, 그리고 이해받고 싶으면서도 솔직히 마음을 내보이지 못하는 나의 모순된 얼굴들까지도.
나는 오랫동안 그 거울을 외면하며 살았다.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세상의 냉정함을 탓하며, 그 거울이 비춘 내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언젠가 그 거울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그 모든 관계의 충돌과 균열은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과의 대화였다는 사실을.
나는 늘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고, 다만 그 목소리가 타인의 입을 빌려 돌아오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깨달음 이후, 나는 조금씩 나를 다르게 사랑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인정이 아니더라도 내 존재는 충분히 의미 있었고, 사랑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었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이해라는 것은 타인의 몫이 아니라,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에게 건네야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관계는 나를 흔드는 폭풍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조형하는 바람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관계 속에서 길을 잃지 않았다.
그 대신 그 관계를 통해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았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다치지만, 또한 관계 속에서 치유된다.
타인의 말이 상처가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타인의 따뜻한 눈빛이 그 상처를 덮어주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며 남는 것은, 오롯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와 용서뿐이다.
관계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라, 나는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빚어낸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조각가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다.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 표면을 다듬을 것이고, 또 다른 이별이 내 결을 새로이 만들겠지만, 그 모든 흔적이 쌓여서 결국 ‘나’라는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간다.
그 형상은 어쩌면 불균질하고, 매끄럽지 않으며, 때로는 흠집이 많겠지만, 그 흠집마다 관계의 온기가 스며 있고, 그 온기 덕분에 나는 차갑지 않은 사람으로 남는다.
완벽함은 없지만, 진심은 있다.
그 진심이 내 존재의 형태를 지탱하고, 그 진심이 또 다른 관계 속으로 흘러가 새로운 나를 빚어낼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거울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미숙하지만 꾸밈없는 내가 있고, 수많은 관계의 잔상 속에서 단단해진 내가 있다.
그 거울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다짐한다.
흔들리더라도 괜찮다고, 부서지더라도 괜찮다고, 중요한 건 다시 자신을 빚어낼 용기 하나면 충분하다고.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간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또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며,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 또 한 번의 나를 만든다.
그리고 언젠가, 모든 흔들림이 멎은 어느 고요한 날에, 나는 그 모든 관계가 만들어준 나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며 미소 지을 것이다.
그 얼굴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는 분명 내가 살아온 모든 사랑과 이해, 고독과 회복의 빛이 담겨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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