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의 공백으로 꿈에 그리던 정시퇴근이 이뤄졌다.
퇴근이 뭐예요? 붙박이장처럼 자릴 지키는 이도 없고
회식은 너의 운명♪ 강요하는 이도 없으니-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나기 전의
거리가 이토록 멀끔할 줄이야
넘쳐나는 시간을 주체 못 하고
집에서 두 정거장 거리의 그녀에게 전화를 건다.
이미 발걸음은 집 근처 마트로-
그녀가 무얼 좋아하더라? 머릿속이 바빠진다.
일 년에 두어 번 올까 말까 한 한가로운 저녁
소울이 담긴 베이컨 김치볶음밥으로 점수를 두둑이 따고
지난달 장만한 플레이어에 그녀의 인생영화 러브 액츄얼리 DVD를 재생시킨다.
커피를 내리던 그녀가 쪼르르 달려와 감동의 눈빛을 발사-
씰룩 올라가는 입꼬릴 감출 수 없다.
열다섯 번 이상 본 영화인지라 오프닝과 동시에 지루함이 몰려들지만
몸을 옹송그리고 마치 처음 보는 장면 인양 잔뜩 힘을 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배시시 웃음이 난다.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녀가 설레면 나도 설레고
아아- 그녀가 탄식하면
내 입에서도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마치 쌍둥이처럼
오늘도 역시나 같은 장면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
오랫동안 마음에 둔 칼을 뒤로하고 아픈 오빠에게로 달려간 사라에게 절망한다.
아아- 왜 그랬어.
전화 한번 받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아, 이 바보 같은 여자야.
매번 같은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사랑스러워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한다.
영화 속 세상에서 저 둘은 분명 이루어졌을 거야.
저렇게 착해 빠진 여자를 신이 내버려둘 리 없잖아.
잠깐 사이 어둠이 밀려들고 반쯤 몸을 기댄 그녀가 잠이 든다.
새근새근 숨소리와 살짝 닿은 온기만으로 설레는 이 밤.
가끔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의 마음이 행복으로 물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