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하는 법을 잊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알면서 어깨 위 짐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내 한 몸 버티기도 힘에 겨워
주윌 돌아볼 여력조차 없었습니다.
나에게 있어 삶이란 넘고 또 넘어야 할 고난과 같은 것.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도미노 앞에서 한없이 절망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하루에도 몇 번씩 곱씹어보는 질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선택하여 살 수는 없겠지요.
조금이라도 비상코자 한평생 버둥대며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인가 봐요.
이쯤 되면 사그라질 만도 하건만
헛된 욕심은 발목을 부여잡고 외칩니다.
여기가 아니야!
얼마만큼 더 가야 하는 걸까요?
꿈 한 자락 얹을 수 없는 세상은 삭막함 자체입니다.
모른 척 달아나 버릴까.
가끔씩 일상 밖으로의 도피를 꿈꾸기도 하지요.
나를 위해 살고 싶어. 나만 생각할 거야!
사춘기 소녀처럼 반항심만 부풀어져 온갖 것에 화풀이해대는 그런 날도 있습니다.
허나 아버지,
당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에 철없는 행동은 사그라지고 맙니다.
생이 아무리 고되다 한들 당신이 걸어온 그 길에 비할 수는 없겠지요.
언니는 아빠에게 아픈 손가락이야.
언젠가 동생이 제게 건넨 말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하지만
그중 유난히 맘에 밟히는 손가락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전 당신께 그런 존재일 테지요.
머릴 박박 깎이고 눈을 뜨던 날
머리맡의 당신을 기억합니다.
밤새워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깼구나 웃으며 반겨 주셨어요.
까슬해진 머리를 쓰다듬으며 밤송이 같다 놀리셨지만
그 눈에 어린 슬픔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해줄 수 있는 일보다 해줄 수 없는 일이 더 많아 미안하다고 하셨죠.
언제나 꼿꼿한 당신이지만 술에 취한 밤이면 거실 한가운데 드러누워
주저리 넋두릴 늘어놓곤 하셨습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못해준 게 너무 많아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이것밖에 줄 수 없어 미안하다.
미안함으로 따지자면 당신보다는 내가 먼저입니다.
아버지란 이유로 당신의 등에 내 짐을 전가시켜 버리고 멀찍이 물러서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당신의 책임인양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서.
내가 그린 삶을 당신 탓이라 했습니다.
나의 못남을 탓하기 보단 환경으로 책임을 돌리는 쪽이 마음 편했으니까요.
당신 등에 숨어 세상을 피하는 난 아직도 어린아이입니다.
삶이란 그러한 거겠지요.
마음속에 그린 삶과 동일한 길 걷고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반짝이던 꿈들도 일상 속에 무뎌지고 다만 현실을 위해 매일을 반복할 뿐.
이따금 감춰두었던 욕망이 솟구쳐 올라 가슴을 두드립니다.
제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난 언제쯤이나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 딸은 모질지 못하여 눈물 보이는 날 많겠지만 아파하지는 말아주세요.
아무리 힘든 길이라도 언젠가 끝은 보이는 법
상처의 빈도만큼이나 굳건해진 마음으로 당신의 지친 어깨를 감싸 안고 싶습니다.
훗날 시간이 말해주겠죠. 우리의 삶이 헛되지 않았음을.
당신이 그래 왔듯 나 또한 당신을 지켜 드리고 싶습니다.
늘 입 밖으로 내어놓지 못하는 한마디
당신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