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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프로디테 Feb 17. 2017

"남편이 바람을 펴요"

채식주의자_한강

"남편이 바람을 펴요"

며칠 전 후배 D가 문득 던진 말이다. 담담하고 직설적인 고백을 불시에 받은 터라 적지 않이 당황했었다. 

결혼한 지 불과 6년이며 태어난 아이는 이제 5살인 그녀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말이기도 했다. 


남편의 바람은 결혼 후 1년이 지나서 부터였고 D가 알게된 것은 이미 3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당시 둘째 아이가 뱃속에 있었다던 D는 남편의 바람으로 수술을 결심했고 강인하게 버티던 5개월 짜리 생명을 끝끝내 떨쳐내며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지금도 선연해서 가끔 남몰래 울기도 한단다. 

아들 하나를 데리고 홀로 설 엄두를 못낸 그녀는 끝내 남편의 바람을 한 번의 실수라고 굳게 믿고 용서를 했다. 아니 정확히는 "기회를 한 번 더 줬죠"였다. 하지만 "남편이 바람을 펴요"라는 말을 뱉은 그때, D는 직감하고 있었다. 두 번째가 시작됐다는 것을.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힘을 줄 수 있는 응원을 하는 말 따위는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한 번의 기회'로 '남편의 바람'을 용납했던 터였다. 10살이나 많은, 이제는 50 초반이 된 동네 언니는 말했었다. "40부터 시작이라고...바람은" 그 이유를 그럴듯하게 장황히 설명했었고 적지 않은 공감해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는 40대의 커트라인을 넘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치 예언처럼 하나 둘씩 바람이 시작되고 있었다. 바람은 그 사람의 학력이나 성품과 관계없이 여기저기서 불어댔다. 아내 혹은 남편과 관계없이 또는 깊은 상관관계를 통해 불기도 했다. 그럭저럭 '외도'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감을 하고 있던 터였고, 나 역시 언제든 닥칠 일일 지 모라 단단히 마음 먹고 있는 찰라였다. 


"내 남편은 그럴 사람이 아이야" "내 와이프는 그럴 주제도 못돼" "난 그(그녀)를 믿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솝우화의 신포도와 여우가 생각난다. 그래, 그렇게 위안을 해야 정신건강이나마 좋겠지...하지만 그들은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언제 닥칠 지 모를 불행에 여실히 노출되어 있다. 


D에게 위로를 하는 대신 D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 그리고 두려움에 초조해 하는 그녀에게 나의 말 따위는 필요 없어 보였다. 다만 이 초초와 불안이 다시 안정감으로 잔잔해지길 간절히 원할테니까. 


"이미 네가 남편의 두 번째 바람을 허락한 거나 다름없어"라는 말은 꾹 눌렀다. 대신 "용서는 네가 홀로설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 할 수 있는 거야. 홀로 설 용기가 없어서 하는 것은 용서가 아니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뿐"이라는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남편이 없는 삶, 아이와 나 둘 뿐인 삶...그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과 용기가 섰을 때 비로소 이혼도 용서도 가능할 것이기에.   


사실 D의 초조는 언제 나에게도 닥칠 불안감일지 모른다. 나 역시 5살 난 아들을 키우고 있다. 살갑지는 않아도 묵묵한 남편은 바람과 멀어보이지만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이미 각오하고 있는 마음 속에서는 '모르면 된다'는 합리화를 주구장창 해 온 터다. 결혼 후 6년 동안 남편의 핸드폰에 관심을 끈 이유도, 늦은 귀가에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모르면 될 일'을 우연히 감지하게 될 지 모르는 것에 대한 외면일지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아이라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연명하고 있는 계약관계로 점차 변질되어 가고 있는 지 모르겠다. 나와 내 주위의 모든 아내와 엄마들은 그렇게 무심한 남편, 말 수 없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까칠하게 메말라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이 책의 이 문장은 그토록 선명했나보다. 


더 이상의 군말없이 통화는 끝났다.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더기 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채식주의자'는 물론 채식주의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꿈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끊은 영혜에게 채식주의자라는 성향적인 수식을 하기에 그녀는 지나치게 메말랐다. 기아...굶어 죽어가면서 자신이 나무가 되리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듯 보이는 영혜, 그녀를 둘러싼 남편으로 시작된 형부, 언니...가족들. 


인간의 상처를 이해할 수 없는 심연에서 끌어와 내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가와 달리 나는 '채식주의자'를 읽는 내내 여성에게 광폭한 세계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상 주인공이면서 끝까지 주변인인 듯한 언니에게는, 작가조차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저...영혜의 언니이고, 예술가의 아내였으며, 광폭한 아버지의 딸이었다. 지우의 엄마였으며 화장품가게 경영자로...그녀는 끝까지 이름을 불리지 못했다. 


성폭행이라 명명할 수 없는 남편의 강제, 영혼이 빠져나간 듯 허깨비가 돼 가고 있는 동생, 그 동생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구지 모든 것을 걸고 예술을 한답시고(처제와 자신의 몸에 그림을 그린 채 교합하는 영상 작업을 했다) 모든 것을 잃은 남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너질 수 없게 하는 지우(5세, 아들)라는 책임감... 세상은 엄마에게, 언니에게 그리고 아내에게 지독히도 폭력적이다. 가족이라는 계약관계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고 때로는 그 영혼이 짖밟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범죄다, 폭력이다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가족...이므로.


어려서는 살림 밑천인 맏딸로 포악한 아버지를 감당해야 했으며, 4살 터울의 동생 영혜에게는 둥지 같은 언니여야 했다. 예술가인 남편은 그녀의 꾹꾹 눌러담은 배려와 이해 그 포화된 인내 속에서 예술이라는 범주에 적을 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 하지 않음으로써, 등을 돌림으로써 영감조차 주지 못하는 아내 탓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더 이상의 군말없이 통화는 끝났다. 아이를 통해 연결된, 군더더기 없는, 일종의 동업자의 관계가 이즈음 아내와 그의 관계였다 


물론 작가 한강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가 입다물고 있는 이 동업자 관계만은 아니었을테다. 세밀한 많은 문장들 속에서 유독 이 두 문장이 선명히 남는 이유는, 후배 D의 고백만큼이나 직설적이었고 급작스러운 문장이었던 탓이다.  


채식주의자에서 길을 찾고자 함은 언니로 이름 붙여진 무명의 여자는 남편의 부재 앞에서 떨지 않았다. 여리디 여리지만 또한 강하디 강하게 홀로 서 왔기 때문에 새삼 남편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갈등은 없어 보였다. 이 포악한 책에서 가느다란 위안을 얻은 이유다. 홀로 설 수 있는 용기, 자연스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자신감은 어쨌든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의 경제적 독립과 자아의 되찾음이라고 밖에는, 결국 할 말이 없게 했다. 


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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