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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방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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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Nov 02. 2020

연극이 끝나고 난 후

11월 2일 기록


 달 동안 준비했던 연극이 끝났다.


작년 가을 로컬매거진을 준비하는 편집장과 피디들이 책방을 찾아와 매거진 제작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단순히 인터뷰한 내용을 싣는 매거진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지역에서 생업을 이어가고 자리를  잡을  있게 필요한 교육과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하여  결과물을 매거진으로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라 하였다. 책방 문을 연지  달도  안되던 , 지역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를 마을 안으로 끌어 들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한경 SARM 매거진> 만드는 과정은  길었다. 브랜딩 교육을 먼저 하였는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 나를 알아가는 과정부터 시작하였다. 나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수많은 질문들에 답을 하면서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은 무엇인지, 그리고 나의 가치관이 담긴 나만의 브랜드가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결국 책방이라는 브랜드도 운영해가는 사람의 철학과 취향이 반영된 공간이므로 나를 대변할  있는 또 다른 존재였다. 책방을 열기 , 남편과 며칠 밤을 새우면서 우리가 원하는 공간, 우리가 편하게 느끼는 공간의 분위기, 사람들이  공간에서 어떤 느낌을 가져가길 원하는지 수없이 고민했었다. 그때 책방을 찾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편안한 것도 좋지만 하루 종일 머무르는 우리가 가장 좋아할 만한 공간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우리가 나가고 싶지 않을 만큼 편안하고 책에 집중할  있는 공간을 만들기로  것이 책방 브랜딩의 시작이었다. 목표했던 바를 생각하며 공간을 만들었지만  공간에 가장 오래 있는 나에 대해선 정작 많이 생각해보지는 못했던  같다. 대략적으로 나는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은 해보았지만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나열하거나  질문에서 파생되는 다른 질문에 스스로 답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매거진을 만들기 위해 브랜딩 교육을 시작하며 얻은 첫 번째 결과물은 바로 나를 제대로 이해하기였다. 우리가  책방을 해야만 하는지 에 대한 답이 어린 시절 상처와 치유의 과정 속에 그대로 담겨있었고, 책에서 얼마나  위로를 받았으며, 책을 통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있었는지를   있었다.
 길고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 속에서 참여한 사람들 저마다의 스토리를 뽑아내고  분위기를  보여줄  있게 사진을 찍고 그들의 이야기를 기사로 만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한경 SARM 매거진이 탄생했다.

책이  만들어져서 뿌듯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단 것이 좋았다.  번의 교육과 마지막 작업이 끝나고 모인 뒤풀이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먹했던 감정도 점점 옅어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근처에 이런 공간이 있는 줄도, 제주도에서 이런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몰랐는데 서로 얼굴도 익히고 다른 사람들이 가진 재주와 나의 공간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몇몇 분들과는 책방에서 전시 기획을 함께 진행했고,  몇몇 분들과는 제주에서 없어서는   소중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인연의 시작은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오묘하다. 함께 참여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모르는 사람으로 스쳐 지나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매거진 발행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매거진의 편집장이었던 곽PD님은 사람과 삶을  다른 방법으로 보여줄 기획을 하였다. 바로 연극이었다. 제주에서 살면서 겪는 다양한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친구가 되어주고 함께 울고 웃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극으로 만들고자 했다. 어떤 삶도 예술이   있지 않은가. 삶이란 슬픔 속에서도 찬란하게 피어나는 꽃과 같은 것일 텐데  어찌 예술이라 말할  없겠는가. 하루하루 사람이 있어 살아가고 살아가니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 어찌어찌 뒤를 돌아보면  삶도  펼쳐진 꽃길이었구나 싶은 그런 우리네 인생을 극으로 옮기게 되었다.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 스태프들은 모두 매거진에 참여했던 마을 사람들이었다.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요이땅 삐삐 펍에 모인 마을 사람들의 소소한 ,  속에 담긴 애환과 희망을 있는 그대로 연기했다. 내가 맡은 역은 현실과 똑같이 책방 소리소문의 책방지기 역할이었다. 불안이 하나도 없을  같은 환상의 , 제주에서 살아가는 우리들도 모두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매한가지다. 극 중의 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를 들고 끙끙 앓지만 결국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고 같이 노래하고 웃으며 잠시라도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그렇게  발씩 매일 앞으로 나아간다. 고산리의 해녀 삼춘  분도 함께 출연했다. 우리 같은 이주민이 진짜 해녀 삼춘들과 함께 밥 먹고 맥주 마시면서 노래 부르고 서로 챙기는 일을 어디서 해보겠는가. 연극에서나 일어날 일이라 생각했지만  놀라운 사람의 힘은 대본을 넘어 실제로 일어났다. 연극이 끝나고   삼촌들을 끌어안고 울고 웃었다. 작은 무대를 깔아줬을 뿐인데 사람과 삶이 만나는 장이 정말로 만들어졌다.


연극의 성과며 관객의 수며 이런 수치로 환산할  있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달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는 , 나이의 구분 없이 토박이며 이주민이며 누구나 와서 친구가   있는 공간이 되었다는 , 그리고 끌어안고 있던 문제들로 제주의 삶이 지칠  결국 이겨낼  있는 힘은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  모든 것을 배웠던 경험이었다.


11월만 오면 속이 시원할  알았다.  끝나고 연습하러 가지 않아도 되고 쉬는  편히 놀러 갈  있어 좋기만   알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오늘, 함께 했던 모든 사람들이 생각난다. 삼춘들은 이제 물질만 하고 계실까? 연출가님은  다른 생업을 위해 바삐 작업을 하고 있을까? 서울에서 원정온 스태프들은 언제    있을까. 모두 자주 모일  있는 모임을 만들어볼까? 길지도 않은 대사 까먹기 전에    해볼  있으면 좋겠단 생각까지.     환히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시원할  알았던 가슴이 먹먹하다. 다시   것도 아니지만 2020 10월의 마지막 , 함께 웃고 울었던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그래도 아주 오랫동안 꺼내 들고 추억할 깊은 사연이 하나 생겨 정말 다행이다. 아주 오래오래 고이 접어 간직하고 싶다. 지치고 위로가 필요할 , 조용히 꺼내 삶을 나누어준 많은 분들의 얼굴을 곱게 떠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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