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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Jan 04. 2021

멋진 중년의 시작

며칠 전 서울의 병원에 다녀오고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의 일이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자 승무원의 안내가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 비행기를 운행한 기장님이 40년간의 비행일을 마치고 오늘 마지막 비행을 한다고 했다. 모두들 박수로 긴 여정의 마지막을 격려했다.


40년... 한 가지 일을 40년 동안 해왔다는 사실에 무척 경외감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 비행을 배우고 20대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좋은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어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많은 사람들을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주었을 것이다. 때론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도 생계를 위하여 혹은 다른 여러 이유로 다시금 일터로 나가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40년을 한 가지 일을 반복하며 살다 이제 마지막으로 비행하는 기분은 어떨까. 내일부터는 아침 일찍 나갈 곳이 없고 오직 나를 위한 시간만 남게 되는 그 기분은 어떨까. 오랫동안 하나의 일을 해온 경험도 없고 오랫동안 해오던 일을 마지막으로 하는 경험도 적어 그 기분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그 기장님은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분의 입장이라면 이제 일을 안 해도 된다는 해방감보다는 할 일이 없어졌다는 아쉬움이 더 클 것 같기도 하다. 요 근래 친정집에 머물면서 우리 아버지를 바라본 바로는 그런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아버지는 이제 일흔이 넘으셨다. 여전히 양복을 만드는 일을 하고 계신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부지런히 준비를 하고 새벽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경기도에서 종로까지 출근을 한다. 우리 아버지는 먹고사는 생계를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하셨다. 아버지 연세에도 등산이나 낚시와 같은 취미 생활을 즐기는 분들이 많긴 하지만, 아버지는 그저 일해서 돈을 벌어오는 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살아오셨다. 퇴근 후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이 유일한 낙인 아버지는 이제 은퇴를 해도 될 연세가 되었지만 여전히 일을 하신다. 돈이 넉넉지 않아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는데 요 며칠 함께 지내면서 그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아버지는 일을 빼고 나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자신을 위한 시간을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이 살아와서인지 긴 휴일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알차게 보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은 그저 텅 비어있는 지루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자식이라도 가까운데 살고 손주라도 보면 조금 덜 적적하실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부부 두 내외만 덩그러니 남겨진 노후의 휴일이 마냥 지루하기만 해 보였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은퇴 후의 삶이 어떨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노는 것도 놀 줄 아는 사람이 재밌게 노는 것인데, 이제 와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받아들여보라 권하기가 참 어려운 일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나가는 아빠는 어쩌면 그 나이에도 나갈 곳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슬슬 중년이라고 할 나이에 접어들자 나도 지나온 삶보다 앞으로 남겨질 삶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무엇이든 다 될 줄 알았던 20대를 보내고, 무엇이든 열심히만 해야 했던 30대를 보냈다. 이제 마흔, 현재 가지고 있을 것들과 빼고 남겨둘 것들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은퇴 후에 이제 오롯이 나의 삶을 즐길 수 있겠다며 기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이 중요하지만 일만이 삶의 전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돈이 많아서 가진 것이 많은 삶보다는 과일 한쪽을 나누어먹더라도 함께 먹을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외롭지 않게 늙는 것, 좋아하는 것을 잃지 않으며 늙는 것이 나의 목표다. 오랜 일을 하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날, 나도 멋지게 박수를 받으며 새로운 출발을 향해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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