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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노그림 Jul 24. 2020

나는 어쩌다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방구석 드로잉 여행 2

  누구나 그리기를 즐거운 놀이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 색연필 한 자루를 쥐어주고 종이를 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즐거워한다. 종이로 만족하지 않는 아이는 벽을 캔버스 삼아 잠재되어 있던 본능을 마음껏 발산하다가 혼이 나기도 한다. 요즘에는 전지 사이즈의 종이를 미리 붙여 놓아 아이의 예술성(?)을 마음껏 뿜어내도록 도와주는 부모들도 많은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잠재적으로 그림쟁이가 될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림의 역사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부터 찾아 볼 수 있듯이 굉장히 오래되었다. 원시시대에 태어난 그림그리기는 시대가 바뀌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기록을 남기는 도구로 또는 순수 예술로 지금도 그 생명력을 왕성하게 뿜어내고 있다.


  한때 그림이 위기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 사진이 등장한 것이다. 사진이 보편화 되면서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법원의 재판 풍경을 그리던 화가, 꼼꼼하게 공사의 진행상황을 그림으로 옮겨 놓던 화가, 대항해 시대의 박물학자들. 듣기만 해도 낭만적이던 일 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정조의 화성성역의궤와 화성행차도를 생각해보라. 기록화이지만 너무나 멋진 그림들이다.


  이렇게 사진의 등장으로 인해 실용의 목적으로 그리는 그림은 이제 더 이상 사진과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화가들도 변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사진처럼 대상을 그리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이 사진과는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창작활동은 더욱 더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많은 기록 화가들이 직업을 잃었지만 그림그리기라는 본질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현대에 와서 또 다른 이유로 그림그리기가 주목을 받고 있다. 다시 실용적인 분야에 그림그리기의 중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장의 그림이 여러 마디의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시각적인 것에 훨씬 더 몰입을 쉽게 하는 현대인의 특징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그리기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콘티’가 있다. 영화를 만들거나 광고를 만들 때 사용되는 간단한 스케치는 떠오른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모든 흐름을 직관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경을 하고 건축을 하시는 분들의 컨셉 스케치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매우 실용적인 그리기이다. 이런 전통적으로 스케치가 필요한 분야를 떠나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그림그리기는 창의적 사고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손에 펜을 쥐고 뭔가를 끄적여 본 경험이 있는가. 그냥 낙서를 하면서 또는 글자가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그림자를 넣어보기도 하면서 머릿속 생각의 실타래를 풀어내 본 적은 없는가.          


  최근에 자기계발도서로서 인문학 분야의 책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빨라지는 세상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느리게 해야만 하는 일들이 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일까. 기계, 컴퓨터, 속도 등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 인간일 수 있는 길은 그것들과 다르게 행동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림그리기도 이 중의 한 범주에 들어간 느낌이다. 이름만 척 대면 알만한 회사의 중역들도 그림그리기 수업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바쁘신 분들이 왜 ‘프리핸드 드로잉’에 귀한 시간을 쪼갰을까? 갑자기 아마추어 예술가로 살고 싶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리기가 가장 강력한 업무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런 실용적인 목적 외에 그림그리기 자체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한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재미있는 일은 이런 분들 중에 이외로 혼자서 그림그리기를 터득하신 분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기의 본능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 고유의 본성이니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더라도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일단 나부터 중·고등학교 때 배운 미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부이니 ‘근본 없는 그림’이라 폄하해도 개의치 않는다. 사실이니까.


  혼자서 그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시작했을까. 아마도 막연하게나마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찾아온 우연한 계기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는 서문에서 말했듯이 북촌 골목에서 시작되었다. 그냥 시작하기 막막한가? 요즈음엔 뭐든지 인터넷에서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아나로그한 생활을 위해 디지털 세상을 뒤져봐야 하는 것이 아니러니 하긴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융합이 아니겠는가.


  처음 그림을 시작하는 나에게 도움이 되었던 블로그는 단순하게 단색의 펜으로만 그린 그림을 보여주는 작가님이었다. 그 분도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단색의 펜으로 꼼꼼하게 풍경을 그리는데 그 디테일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모든 창작의 시작은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 중 쉬워 보이는 그림을 하나 골라 똑같이 따라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런 분들 중에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모여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고 아주 조금의 강의료만 받고(거의 커피 값 정도) 그림의 기초를 알려주는 초급반을 부정기적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아마추어의 장점(?)중의 하나는 빠른 시간 내에 성과를 보여주고 싶은 조바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석고 데생, 구도 잡기 등 여러 가지 단계를 훌쩍 건너 띄고 뭔가를 직접 그리고자 하면 기꺼이 ‘근본 없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사용하는 펜은 피그먼트 라이너 0.1mm를 추천한다. 나중에 물감을 입히더라도 번지지 않아서 선을 그대로 살려 놓을 수 있다.


  이렇게 펜으로 그리는 그림이 조금 손에 익으면 대충 두 가지 길이 나온다. 펜으로만 계속해서 그리면서 디테일에 치중할 것인가 아니면 색깔을 입힘으로서 미숙한 그림에 화장(?)을 하여 ‘100미터 미인’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경우는 후자였다. 디테일을 고집하기엔 눈도 좋지 않고 게으르기도 하여 색깔을 입히기로 선택하였다. 그렇다고 꼭 선택한 길만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근본 없는 그림’이므로 색깔이 입히든 화장하기 전 수수한 상태로 남겨 놓든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색깔을 입히려면 약간의 노하우가 필요하긴 하다.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색연필과 오일파스텔이 있다. 오일파스텔은 예전에 크레파스라고 부르던 바로 그것이다. 둘 다 모두 누구나 쉽게 시작할 수 있다. 비교적 디테일 살아있는 펜그림 이라고 생각되면 색연필을 이용하여 살살 칠해보자. 나도 모르게 나의 실력에 감탄할 수 있다. 오일파스텔은 큰 면을 칠하기에 좋다. 대충 스케치를 하고 오일파스텔로 꼼꼼하게 그리면 이외로 멋진 작품 같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이 정도 하게 되면 수채물감으로도 그려보고 싶어질 것이다. 집에 아이가 있다면 물감과 팔레트는 이미 방구석에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없다면 고체물감과 물붓을 사용하여 그려보는 것을 추천한다. 고체물감은 말 그대로 물감을 튜브에 넣어 놓은 것이 아니라 조그마한 사각 통에 넣고 굳혀 놓은 것이다. 12색 정도로 구성된 윈저앤뉴튼 고체물감이면 한동안 쓸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고체물감은 아주 자그마한 플라스틱 팔레트와 함께 판매하고 있으므로 별도의 팔레트는 없어도 무방하다. 물붓(워터브러쉬)은 손잡이에 물을 담아 놓을 수 있다. 담아 놓은 물을 살짝 누르면 물이 나오면서 붓을 적시게 된다. 이렇게 적셔진 붓으로 고체물감을 살살 녹여 팔레트에 문질러 색을 혼합하거나 물을 섞어 색의 농도를 조절하여 사용할 수 있다. 고체물감과 물붓은 휴대가 매우 용이하므로 현장에서 그림을 그릴 때 아주 유용하다.              


  물감과 붓 그리고 팔레트가 준비되었다면 이제 종이가 있어야 한다. 수채화를 그리고자 하면 두툼한 종이가 필요하다. 말 그대로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너무 얇은 종이를 사용하면 종이에 구멍이 나거나 너무 심하게 울어 버려서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우리같은 초보는 300g 정도는 사용해야 큰 무리 없이 그릴 수 있다. 종이는 화방이나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캔손몽발이나 파브리아노 300g이면 초보라도 종이에 대한 걱정 없이 마음껏 그려볼 수 있다. 종이의 크기는 처음부터 너무 큰 것으로 하게 되면 지칠 수 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종이를 선택해서 조그마한 그림부터 그려보는 걸 추천한다. 15cm x 21cm 정도, 개략 A4 반 정도 사이즈가 적당할 것 같다. 작은 그림이라서 시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외로 많은 ‘근본 없는 그림’들이 이 정도 사이즈에서 수준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다.



  이제 그릴 준비는 모두 갖추었다. 망해도 좋으니 시작해보자. 한 번 망하고 나면 이제 오기가 생길 것이다. 펜 드로잉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터넷의 바다에는 무수히 많은 고수들이 기꺼이 초보들을 돕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나의 경우는 인스타그램을 많이 이용한다.


  상상을 해보자. 저 너머 우주의 한 구석에서 우연히 라이트 세이버 광선검을 손에 넣은 농부가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쉽지 않은 광선검의 사용법. 이제 농부는 추수를 뒤로 미룬 채 은둔하고 있는 고대 제다이 기사를 찾아 먼 길을 떠나기로 한다. 하지만 이외로 제다이의 고수는 우리와 이웃하고 있었다. 이제 농부는 추수를 뒤로 미룰 필요도 없이 틈틈이 은둔 고수로부터 비법을 사사받는다. 비법은 비법인지라 알 듯 모를 듯하다. 이런 상태로 악당을 찾아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 생각한 농부는 그저 아마추어 제다이 기사로서의 생활에 만족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매일 매일 수련하는 것을 잊지 않고 고수로부터 사사받은 비법을 곱씹어보며 언젠가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것을 소망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드로잉을 즐기는 사람 하나를 찾으면 아마도 고구마 줄기를 찾은 것처럼 줄줄이 매달려 나올 것이다. 한 시간만 뒤적거리고 나면 따르고 싶은 고수를 만날 수 있다. 팔로우를 하고 정중하게 그림을 칭찬하고 나면 고수는 기꺼이 그대를 제자로 맞아들여 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내가 찾은 스승님들. 쉽게 그림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니까 무시해도 좋다.

  jini77park, 그림쟁이 지니

  ham4611, 함형미     


  여기까지 왔다면 그리기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풍경그림을 그리다 보면 현장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리기가 여행으로 진화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게다가 현장에서 그림을 멋지게 그려보고 싶은 충동이 생기면 이미 어반스케처스(Urban Sketchers)가 될 자세가 된 것이다. 어반 스케처스는 마을이나 도시, 여행지의 풍경을 현장에서 그리는 화가(?)들의 모임으로, 스페인 출신 기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가브리엘 캄파나리오(Gabriel Campanario)가 설립한 단체이다. 단체라고는 하지만 특별히 가입을 하여야만 어반스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어반 스케처스의 취지에 맞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물론 이런 어반스케처스도 인스타그램에서 만날 수 있다. 가끔 국제 심포지엄을 열기도 하는데 참가할 수 있으면 재미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그림 그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그림을 그리고 서로를 칭찬하고 웃고 떠들고 마시며 먹고 인생을 즐기는 심포지엄이니 즐겁지 않으면 이상하다.                 


  여행지에서 그림을 그린다니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현지인은 그대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호의를 베푸는 경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조그마한 시골일수록 구경꾼에서 기꺼이 참견꾼으로 변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의 손을 끌고 자기만이 알고 있는 기가 막힌 장소로 안내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 기존의 여행보다 훨씬 깊어진 여행을 하게 되고 이렇게 맺어진 인연은 소셜미디어를 통하여 시공간을 초월하며 지속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되려면 일단 그리기를 시작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리기의 즐거움을 느껴 보려면 아무래도 그림을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 거창하지 않게 조그마한 무지노트를 사서 아무거나 한 번 그려보는 걸로 시작해보라. 아무래도 그릴 것이 마땅치 않다면 서점과 도서관을 가서 관련 도서를 찾아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외로 많은 드로잉 관련 책들이 그리고 싶은 열망과 영감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그림 그리기는 살아가는 동안 지속적인 재미를 줄 수 있고 어쩌면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도 있다. 그림 그리기에 발을 내딛고 그림쟁이들과 교류하다 보면 이외로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 대신 흥미진진한 모험 같은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그냥 나의 일상에 조그마한 균열을 만들어서 그 균열이 어찌 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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