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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커피를

동유럽 일기 - 14

by 지노그림

어제 좀 달렸다. 지마음은 좀 더 쉬었다가 오후에 합류하겠다고 한다. 시내에서 만나기로 하고 지금사진과 나는 브런치를 먹으러 간다. 황제가 먹던 팬케익과 커피로 유명한 곳이다. 카페뮤지엄. 예전에는 이곳에 가려면 줄을 서야 한다고 했는데, 유명세가 한풀 꺾인 듯하다. 아침시간이라 그렇겠지 하더라도 아주 한가하다. 비엔나에 왔으면 비엔나커피 마셔줘야지. 달콤한 크림을 잔뜩 올리고 사루비아 과자를 꽂아주던 비엔나커피가 이곳에서 왔다고 했다. 그때는 ‘아인슈페너’라는 이름보다 ‘비엔나커피’가 귀에 쏙 들어왔겠지. 요즘에 비엔나커피를 찾는 사람은 영락없는 옛날사람이다. 내가 공돌이라서 그런가. 아인슈페너를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것은 ‘스패너’라는 기계공구였다. 아인슈페너? 스패너 한 개? 이러면서 속으로 피식 웃었었는데 이제 비엔나커피를 달라고 하면 ‘뭥미’라는 눈으로 쳐다본다.


그나저나 역시 원조 비엔나커피는 다르구나. 마치 가체처럼 풍성하게 올린 달콤한 크림과 사약처럼 진하게 내린 커피. 오늘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까부터 옆 테이블의 노부인이 마시고 있는 오렌지주스에 눈이 자꾸만 간다. 오늘 아침은 뭔가 신선하게 시작하고 싶었나 보다. 지금사진은 스패너 한 개를 나는 오렌지 한 개를 직접 착즙기에 넣고 짜낸 농장의 신선함이 살아 있는 것 같은 주스를 주문한다. 한 모금 맛을 본 지금사진의 눈이 동그란 해진다. 사실 커피를 마시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다. 아침에 커피를 잘 마신 후 예상치 않았던 생리작용으로 무척 난감했던 적이 있어서였다. 치욕적인 일이라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 뒤로 퇴로가 완전히 확보된 상황이 아니면, 웬만하면 커피는 ‘노 플리즈’이다.

황제가 즐겨 먹었다던 그 유명한 팬케이크는 주방장이 실수를 했는지 다 찢어져 버린 채 나왔다. 아니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건가. 는 아니고 원래 이렇게 나온단다. 뭐 이렇게 나오게 된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 황제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했나 보다. 항상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만 먹다가 어쩌다 보니 이런 음식을 접했는데 이외로 자기 취향이었나 보다. 쌀밥이 지겨워서 가끔 보리밥도 먹어야 하는 뭐 그런 거였을까.


아침도 먹었고 다음 목적지는 쇤부른궁전이다. 아침인데도 벌써 햇볕이 살갗을 파고드는 것 같다. 지금사진 말로는 관광용 셔틀이 있어서 걷지 않아도 여름궁전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여름궁전과 쇤부른 궁전의 원경을 찍으려 두 대의 카메라와 삼각대까지 챙겨 와서 그 무게가 상당하다. 사진작가도 어찌 보면 극한직업이다. 별도의 교통수단이 없다면 이 모든 장비를 이고 지고 가야 하니 말이다. 장비가 없다면 좀 덥긴 하지만 산책 삼아 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노 플리즈’


셔틀을 타려면 표를 사고 정류장을 찾아야 하는데 이리저리 둘러봐도 딱히 눈에 띄는 곳이 없다. 누군가 와서 아는 척을 한다. “혹시 셔틀을 타려고 하는 것이냐?” 자기들에게 표를 사면 된다고 한다. 웬만하면 자그마한 부스를 하나 만들어두면 찾기 쉬웠을텐데, 이 두 친구들이 호객과 발권을 동시에 해주고 있는 시스템이다. 이곳이 정류장이라며 알려주는 곳에는 ‘H’가 쓰인 포스트이다. 노란 바탕에 쓰여있는 H는 뭐랄까. 셔틀정류장이라기보다 호텔픽업 표지판 같이 보였다. 이 친구에게 ‘H’가 무슨 의미냐고 하니, 할트슈텔레, 영어로는 STOP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아니 그냥 영어로 스톱이라고 써두는 것이 훨씬 더 가독성이 있어 보이는데 굳이 독일어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곳에서 셔틀을 타는 사람은 거의 관광객일 텐데.


유럽사람들의 모국어 사랑은 각별하다고 들었다. 특히 프랑스사람들은 외래어의 침략(?), 특히 미국어의 침략에 강박관념까지 가지고 있는 듯이 프랑스어 보존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공공기관에서 무분별하게 외래어, 특히 미국어를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고 했다. 아마 이곳 오스트리아도 특별히 영어사용자들을 위한 배려는 하지 않는 듯하다. 뭐 그래도 알파벳으로 구별할 수 있으니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얼마 전 프랑스 의회에 가서 유창하게 영어연설을 하고 온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가 떠오른다. 그가 얼마나 평소에도 *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지 본 적이 없으므로 평가할 수 없지만, 적어도 프랑스 의회에서 미국어로 연설을 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어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국 의회라면 뭐 그럴 수 있겠다고 넘어가겠지만 (사실 이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통역을 쓰면 혹시 내용이 잘 못 전달돼도 핑곗거리가 있는데, 본인이 한 말은 빼박이다) 프랑스 의회에서 미국어연설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프랑스 의원들은 미국어 연설을 들으면서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하다. 참으로 희한한 어느 나라의 국가원수이다.


셔틀이다. 전기로 구동하는 최첨단 셔틀이라기보다는 뭔가 연륜이 있어 보이는 굴절차량이다. 창문을 모두 열고 자연이 내어주는 바람을 맞으며 아주 느긋하게 달려가고 있다. 조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셔틀의 속도 정도는 내가 추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속도로 가고 있다. 관광지라서 그럴까. 상대적으로 모든 것이 느려지는 느낌이다. 알프스 산속에서 훔쳐온 것 같은 별장을 지나고 동물원(여기에 동물원이 있다)도 지나고 아무튼 셔틀은 여름궁전까지 우리를 데려다준다.


<지금사진 작가의 여름궁전 사진>


지금사진이 장노출로 찍은 사진이다. 구름이 흘러가는 궤적이 보이시나요? 나는 동영상을 좀 찍어서 지마음에게 보내준다. 여기 오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지 말라는 문자도 친절하게 넣어주었다. 더워도 너무 덥다. 지마음은 호텔에서 나와서 중앙역을 탐색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역에는 쇼핑몰과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이제 그만 시내로 돌아갈 시간이다. 지하철이 반지하철이라서 지금사진은 몹시 궁금해한다. 왜 ‘반지하’라고 하는 가 하면 가보시면 알 수 있는데, 그게 지하철이 완전히 땅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덩이를 파고 철길을 놓고 그 위를 달리고 있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지마음과는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으니 우리 비엔나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겨우 오전 몇 시간 떨어져 있었는데 왜 이렇게 반가운 거지. 희한하다. 비엔나에서는 무얼 먹을까 고민을 별도 하지 않는다. 찾아보는 것도 조금 귀찮아지고, 독일어권 음식 중에 매우 맛있다고 소문이 난 음식도 들어본 적도 없고, 오늘 점심엔 파스타와 피자를 먹기로 했다. 이탈리아 식당을 패스트푸드처럼 운영하는 체인점이다. 서울에도 있다고 하는데 가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시원하게 이탈리아 맥주(드디어 감기기운이 사라졌다)까지 한잔하고 나니 드디어 좀 살 것 같다. 더워도 너무 덥다. 나름 유명하다는 카페에 가서 조금 앉아 있다가 나왔다. 자리도 좁고 불편하고 더위에 힘이 들어서 쉬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호텔로 돌아가서 조금 쉬다가 더위가 조금 지나간 후에 다시 나오기로 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호텔로 귀환, 각자 조용하게 휴식모드.


조금 늦은 오후, 지금사진은 대관람차에 노을이 걸치는 광경이 보고 싶었다. 원래는 대관람차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노을을 보려 했는데, 어쩐지 구름이 없는 말간 하늘의 노을을 볼 게 없다며 패스하자고 한다. 대신 대관람차가 있는 놀이공원을 이리저리 산책한다. 이곳은 입장료가 없고 각각의 탈 것마다 표를 구매하는 방식인가 보다. 놀이기구는 역시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차지이다. 이곳의 놀이기구는 이게 과연 놀이기구인가 아니면 놀이기구를 빙자한 훈련인가 싶을 정도로 과격하다. 전부 담력훈련용 놀이기구뿐이다. 밑에서 쳐다보는 것만으로 아찔하다. 어떤 아이는 내려와서 서러운 듯이 울고 있다. 주변의 친구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둘러싸고 울고 있는 친구의 등을 감싸고 위로를 해주고 있다.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거겠지.

“슈미트,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그랬어. 하지만 익숙해지면 이것보다 짜릿한 것은 없어. 자, 그만 울고 다른 거 타러 가자 “

귀여운 친구들이다.


이제 오페라하우스의 야경을 감상할 시간이다. 아까 낮에 지금사진은 야경을 찍을 수 있는 포인트까지 다 찾아두었다. 지마음과 나는 지금사진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마음껏 사진을 찍게 하려고 같이 가지 않았다. 근처 카페에서 시원한 밤공기와 함께 달콤한 초콜릿음료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다.

<지금사진 작가의 오페라하우스 야경>


이제 호텔로 돌아가야 할 시간. 이제 마지막 밤이다.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감기기운도 사라지고 즐거운 수다는 오늘도 새벽까지 이어진다.

아, 아쉬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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