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13
이제 마지막 목적지만이 남았다. 차량을 반납하기로 한 4시까지만 비엔나로 들어가면 되는 일이라서 여유가 있는 아침이다. 민박집 주인내외의 도움을 받아 차로 짐을 옮기고 내려오는 길에 ‘방정맞은’ 신호등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나니 이제 이 마을과도 안녕이다. 신호등이 방정맞을 수 있다는 것을 이곳에서 알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아쉬웠던 적이 있었던가. 운전을 하고 가면서 멋진 풍경이 나타나면 잠깐 차를 세우고 사진도 찍고, 길을 잘 못 찾으면 그것대로 즐기면서 아주 천천히 비엔나로 들어가고 있다. 얼마쯤 운전을 했을까. 언덕 위로 보이는 작은 마을이 근사해 보인다. 차만 타면 멀미를 하는 지마음은 잠이 든 것 같다. 지금사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저기 가볼까요?”
방향을 바꿔 마을로 향해 들어간다. 마을로 들어가는 것 같은 게이트를 지나서 올라가다 보니 길이 막혀있다. 아마도 역사지구로 들어가는 길이라서 막아 놓았나 보다. 뒤따라서 오는 차가 없어서 다행이다. 당연히 이곳에 사는 사람이라면 이 길이 막힌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 좁은 길이다. 조심스레 후진을 한 후 돌아서 미을로 올라갈 것 같은 길로 들어선다. 이번엔 틀리지 않았다. 마을 외곽을 돌아서 올라간 길의 끝에는 마을 공용주차장이 있다. 관리상태를 보아하니 유료주차장은 아닌 것 같다.
잠에서 깨어난 지마음은 어리둥절. “여기 어디예요?”
“몰라요. 멀리서 보다 보니 마을이 근사해 보이길래 그냥 와봤어요”
“아, 완전 좋지요”
우리는 늘 이런 식이 었다.
지도로 현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노베흐라디’ 또는 ‘노브흐라디’라고 발음해야 할까. 우연히 찾아온 마을이지만 체코에서는 역사적인 마을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풍기던 ‘아우라’가 괜한 것이 아니었다. 보헤미안 왕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까닭에 부침이 있었지만 수많은 전쟁에서 어찌 되었든 살아남았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국경 근처에 있는 평화로운 마을이지만 깊은 해자로 둘러싸인 성을 방문하면 힘들었던 역사가 보이는 듯하다.
광장과 성당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성이 이곳의 볼거리이다. 성당문이 잠겨 있어서 아쉬움에 지마음이 철창문에 한참을 매달려 있다. 이제 그만 가려고 하는 순간 성당을 관리하고 계신 분이 내려오셔서 문을 열어주셨다. CCTV를 보다가 지마음이 철창문에 매미처럼 매달려 있는 것을 봤다고 하신다. 그리하여 들어간 성당 내부는 경건한 분위기이다. 작은 마을이라도 이렇게 관리를 잘 하고 있는 성당이라니. 이곳 사람들이 어떻게 성당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지마음은 오늘도 초를 켜고 기도를 드린다.
성당 앞에 예쁜 카페는 오스트리아 약국을 떠올리게 한다. 카페가 약국 같다는 말은 아니고 카페이름이 독일어의 약국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끼리 ‘아프면 아포테케’라고 하면서 돌아다녔는데 카페이름이 이것과 비슷하다. 지마음은 ‘아, 이런 아재개그 따라 하면 안 되는데’ 하다가 결국 한국 돌아와서 입에 붙어버렸다는 후문이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홀짝 마시고 다시 마을 구경에 나선다. 성으로 가는 길에 뭔가 근사한 건물이 있어서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보니 소방서란다. 아니 무슨 소방서 건물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처럼 생겼냐구요.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매표소가 있다. 아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겨우 한 시간 남짓뿐이다. 준비하고 떠난 여행이 아니라서 급조한 방문이라서 돌아다니다가 그냥 얻어걸린 곳이라서 아무리 핑계를 만들어내더라도 성안의 전시실을 가보지 못한 것은 아쉽다. 다행히 성벽안으로 들여보내줘서 성안에서 성밖도 바라보고 성 주변의 해자도 둘러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도 모델은 지마음 작가이다>
성밖으로 나와 공원을 지나 광장 쪽으로 가다 보니 마트가 보인다. 아마 이 마을에 있는 유일한 마트인 것 같다.
“체코돈이 조금 남았는데, 마트 잠깐 들려볼까요?”
지마음이 슬쩍 운을 띄우고 지금사진은 그걸 덥석 문다.
결국 마트에 가서 와인을 몇 병 사고 군것질할 과자도 사면서 체코돈을 드디어 다 썼다고 좋아한다. 와인을 한 아름 안고 나오는 지금사진은 싱글벙글이다. 우리 돈으로 4천 원밖에 하지 않는데 굉장히 좋은 와인이라고 좋아한다. 좋은지 어찌 아느냐구요? 이미 이번 여행을 하면서 먹어본 와인이거든요. 이곳이 그동안 다녔던 곳 중에서 가장 물가(와인이겠지)가 저렴한 곳이라는 것에는 반박할 수 없다.
먼 길을 돌아서 다시 비엔나로 돌아왔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엔나 공항에서 출발해서 비엔나 중앙역으로 왔으니 돌아온 것은 아니다. 이 비어진 구간은 이틀 뒤 한국으로 돌아갈 때 채워지겠지. 차량 반납을 하기 전 기름을 채워 놓으려고 중앙역 근처의 주유소를 찾아다니고 있는데, 지도를 보고 기껏 찾아갔더니 엥, 사라지고 없다. 지도 업데이트가 늦은 모양이다. 아 놔, 서울역 근처에서 주유소를 찾는 격이다. 몇 번의 유턴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하나 찾았다. 이제 혼자서도 척척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므로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는다. 호텔 앞에 가방을 내려두고 나는 차량을 반납하러 가고 지금사진과 지마음은 체크인을 한다. 호텔 건너편 공용주차장이 차량반납하는 곳이라서 너무 편하다.
대충 짐만 방에 가져다 두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후 시내구경을 가기로 했다. 아직도 감기기운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를 위하여 지마음이 폭풍검색으로 국숫집을 찾았다. 물론 이곳 사람들 입맛에 맞게 만든 정체불명의 퓨전국수이다. 따뜻하고 짭조름한 국물을 먹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이곳에도 굴라쉬가 있을까.
트램으로 몇 정거장만 가면 오페라하우스이다. 호프부르크 왕궁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구 시가지를 이리저리 걷다가 음악회가 열리는 성당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드레스코드도 필요 없는 현악 4중주의 공연이었다. 우리가 언제 다시 비엔나에 와서 음악회를 가겠나 싶었다. 이상하게 독일어권 사람들은 아직도 현금거래를 좋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고사우의 숙소에서도 이곳에서도 현금으로 거래를 한다.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을 시작으로 익숙한 레퍼토리어서 다행이다. 중간에 처음 들어보는 클래식도 있었지만 대체로 무난했던 것 같다. 지금사진과 지마음도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다.
유럽의 낮은 참 길다. 해가 가장 긴 유월에는 9시가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다. 음악으로 촉촉해진 감성때문이었을까. 드디어 어두워진 비엔나의 밤풍경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어깨에 숄만 걸쳤을 뿐인데 우아하다는 느낌을 뿜어내는 비엔나의 토박이들도 근사하다. 젊음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왜 이곳이 살고 싶은 도시를 선정할 때마다 상위권에 랭크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여행일정을 만들면서 의도적으로 비엔나를 가장 마지막에 두었다. 가장 화려한 도시를 보고 나서 다른 곳이 혹시 시시해질까 봐. 기우였던 것 같다. 화려한 비엔나도 좋았지만 그냥 우연히 들렸던 노베흐라디가 더 마음에 남았다. 노베흐라디 보다는 고사우의 시골풍경이 더 좋았고… 나이 먹었다는 증거다.
호텔로 돌아와서 아까 사두었던 와인도 마시면서 또 폭풍수다. 새벽 두 시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도 어느 정도 ‘지마음’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