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12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할 일은 방을 추가로 구해야 하는 일이다. 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잔 지금사진이 오늘 밤마저 나 때문에 설친다면 미안한 일이다. 게다가 내일 오스트리아로 넘어가면서 운전을 번갈아 가며 해야 하는데 컨디션 조절을 해야 한다.
호텔은 아니지만 조식서비스가 제공되는 펜션이다. 주인장이 신경을 써서 조식을 준비하는 것이 느껴지는 아침식사이다. 일단 따뜻한 스크램블 에그가 아주 마음에 든다. 아침을 먹고 나서 주접을 떨기 시작한다.
“보아하니 빈 방이 있는 거 같다. 둘이 같이 방을 쓰는 것이 불편해서 방을 따로 사용하고 싶다. 이 경우 어제 네가 준 10% 할인 바우처를 사용할 수 있겠느냐“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하하하, 이런 경우는 없었지만 물론이다“
그러면서 열심히 뭔가 계산을 하더니 추가금액을 알려준다. 우리 돈으로 15만 원 정도.
“아니, 땡땡닷컴에 있는 것보다 싸게 해 준다더니 이건 너무 비싸다. 그냥 둘이서 한 방 쓰련다. 미안하다“ 하고선 내방으로 돌아왔는데, 주인장 다시 와서 한마디 한다.
“땡땡닷컴에서 어떤 것을 보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아까 알려준 가격은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이야” 하면서 땡땡닷컴 사이트를 보여준다.
“엥, 이건 방이 2개잖아. 내가 원한 건 방 1개. 오늘 밤 따로 자고 싶은 거라구“
(머리를 탁 치며)”아, 세퍼레잍 룸. 이제야 알겠다“
다시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우리 돈 7만 원을 제시한다.
“그렇지. 이러면 오케이”
이제 서로 간의 오해가 풀렸다. 약간 냉랭했던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해지는 순간이다. 새로 내어 준 방이 둘이 쓰던 방보다 넓고 환해서 좋았다. 우리는 우리대로 모여서 깔깔거리고, 주인 부부는 부엌에서 깔깔거리고 있다.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리라.
작은 동네이니 느지막이 나가기로 하고 각자 방에서 좀 더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지마음이 준 약을 먹고 잠을 한 시간쯤 더 잤다. 자고 나니 확실히 좀 나아진 듯 하지만 오늘 하루 더 조심하기로 했다. 사실 이곳에서 해야 할 특별한 계획은 따로 없었다. 그냥 마을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면서 느긋하게 보내기로 한 것이 계획의 전부였다.
느긋한 아침시간을 보내고 마을로 내려가니 어느새 점심때가 다가온다. 지마음의 불꽃검색으로 적당한 식당을 찾았으나, 아뿔싸, 이미 이곳은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선점을 한 후였다. 굳이 단체관광객 틈에 끼여서 점심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대안으로 주변을 찾아보니, 볼레로라는 식당이 보인다. 이곳은 수년 전 가족여행 때 들렸던 곳인데 아직까지도 건재하여 반가움이 앞선다.
동굴로 들어가는 것같이 착시효과를 부르는 입구를 지나, 블타바 강이 보이는 야외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은 조금 이른 시간이라서 블타바 강과 건너편이 아주 잘 보이는 최상의 좌석을 잡을 수 있었다. 조금 늦었으면 실내로 들어갈 뻔했다. 점심으로 주문한 음식들도 매우 만족스러웠고 체코맥주는 명성에 걸맞은 상쾌한 맛이(었을 것이)다. 다만 아직 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물만 마시기로 했다.
점심식사 후 지금사진은 체스키크룸로프의 전경사진을 위하여 성으로 올라가고, 심해어족인 지마음은 '노 플리즈'를 외친다. 지마음과 공원을 산책하다가 카페에 가서 지마음은 글을 쓰고 나는 스케치를 한 장 하기로 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다. 사진을 찍고 내려온 지금사진이 합류할 때까지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대에 있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바랬던 시간이었을지 모르겠다.
다시 같이 있는 시간이다. 마을 구경을 좀 더 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공원의 그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 구경을 하다가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젤라또를 입에 물고 다니고, 오늘도 만보를 걷고 있다며 투덜거리는 지마음. 아니 유럽에 오면 걸어야 하는 게 디폴트라니깐요.
저녁을 조금 일찍 먹기로 했다. 예약해 두었던 시간보다 30분 정도 먼저 도착했지만 문제없다. 이렇게 이른 시간이지만 벌써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를 시작한 사람들도 보인다. 이곳 날씨는 종잡을 수 없다. 추웠다, 더웠다, 바람 불었다, 구름이 모여들었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면서 기온 변화도 심하다. 저녁을 먹기로 한 이곳은 꼴레뇨(체코식 족발요리)와 고기를 구워주는 것으로 유명한 곳이다. 명성에 걸맞게 꼴레뇨는 그 부드러움과 촉촉함에 모두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런 음식을 두고 물만 마시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몸 상태도 조금 나아졌으니 맥주 한잔과 함께 즐거운 저녁식사를 보내고 있다.
저녁식사 후에는 어제 봐두었던 광장 근처 마트에 가서 체코 와인을 몇 병 사가지고 오기로 했다. 우리가 한국에서 왔는지 주인이 어찌 알아보고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 곳이다. 베트남 사람인데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했다. 좋은 기억만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지만, 신문에 오르내리는 기사들을 보면 마음이 불편했던 까닭이다. 다행히 우리를 보고 웃는 모습을 보니, 심한 일을 겪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체스키크룸로프에서의 마지막 밤이다. 지마음과 지금사진은 여행이 벌써 끝나가는 것에 좌절하고 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가 버리다니. 내일 비엔나로 돌아가서 차량을 반납하고 나면 더 허전해지겠지. 꿈을 꾸는 듯 즐거웠던 여행이라서 더욱 그럴까. 지마음은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들 생각이 없다. 오늘 아침 민박집 주인아주머니와의 작은 신경전끝에 구한 내 방에 모여 늦은 시간까지 방금 전에 사 온 와인을 홀짝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다. 사람마다 가장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시간대가 있는데, 지마음은 바로 이 시간에 최적화가 되어 있는 듯하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텐션이 올라간다. 한 때 아침형 인간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침형 인간이라서 상관이 없었지만 저녁형 또는 야행성인간은 뭔가 게으르거나 낙오된 사람류도 분류되어 억울해한 적이 있었다.
사람마다 생체시계가 다른데 말이다. 이른 나이에 남다른 성공을 거둔 김연아도 아침형 인간은 절대 아니다.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동안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아이스링크를 빌려서 연습을 해야 했던 이유로 김연아는 야행성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그냥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면 되는 일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 획일화하고 싶어 하는 것일까. 공부만 해도 그렇다. 공부도 재능이라면 재능인데 없을 수 있지. 그런거 같아서 학원도 과외도 멀리하고 있으면, 왜 아이를 놀리고 있느냐며 성화인 오지라퍼들이 있다. 아 쫌 그냥 냅두라고요.
누군가 5%에 속하게 될지 95%에 속하게 될지 모를 일이지만 확률적으로 95%에 속하게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은가. 기어코 5%에 들어가야겠다고 오늘 그리고 내일을 담보로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사람들도 있지. 난 그냥 옆으로 슬쩍 비껴 서서 그런 사람들이 내 앞으로 쌩하고 지나가게 내버려 두고 싶다구. 나는 슬슬 뒤에 따라가면서 꽃구경도 하고 멍하니 앉아서 노을 구경도 하면서 가는 걸 좋아한다구. 이런 나를 닮은 우리 아이도 느긋하기로는 ‘일류’이다. 옆에서 보면 한심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게 뭐 어때. 모두가 5%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마도 이런 류의 쓸모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겠지. 기억도 하지 못하는 걸 보면 심각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였을거야. 그런데 이렇게 수다를 떨면서, 하등의 쓸모없는 책을 보면서 또는 황당한 영화를 보면서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내는 시간이 있어야 나는 살아갈 수 있다. 주변에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은 이제 되도록 멀리하고 싶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가야 할 날이 많았을 때는 좀 참았는데, 그 반대가 되면서 ‘무엇 때문에’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도 일도 오늘도 이렇게 흘려보낸다. 여행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렇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법일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