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11
고사우를 떠나야 하는 아침이다. 다른 곳을 떠날 때는 이렇게 섭섭하지 않았는데 이틀 만에 이곳이 맘에 쏙 든 모양이다. 나만 이런 생각이 든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제 지마음이 사 온 빵으로 맛있는 아침을 하면서 이곳에 다시 오기로 약속을 했다. 내년이 될는지 그다음 해가 될는지 알 수 없지만 고사우의 산과 호수 그리고 민박집 할아버지를 잊지 못할 것 같다.
2층부터 0층까지 낑낑거리며 짐을 내리고 있다. 일단 무거운 짐부터 내려두고 그동안 모아둔 (소중한) 와인이 든 가방과 잡동사니가 들어있는 가방은 마지막에 들고 나오려고 했다. 지마음은 나오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말하려는 순간, 지마음이 문을 닫고 나온다. 아니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자동으로 닫히지 않아서 열쇠를 이용해야만 열고 닫을 수 있던 문이 오늘은 그냥 자동으로 닫힌다.
“얼래, 저절로 닫히네. 열쇠는 가지고 나왔나?”
아무도 열쇠를 챙긴 사람이 없다. 당황하는 지마음을 안심시킨다.
“괜찮아요. 할아버지에게 비상열쇠가 있을 테니 그걸로 열어달라고 하면 돼요”
이제 떠나려 한다고 인사도 할 겸, 할아버지네 집에 가보니 엥! 차고에 차가 없다. 아침 일찍 외출하신 모양이다. 미안해하는 지마음에게 괜찮다고 하고 마침 옆집 아주머니가 아이들과 함께 나와 있길래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줄 수 있나 물어보기로 했다. 원래 이렇게 주접을 떨면서 뭔가 물어보는 일은 내 차지이다. 이런 주접쟁이를 지마음은 ‘유럽의 인싸’라고 추켜세워준다. 하여간 안 맞아, 안 맞아.
헬로우 마담. 구텐 모르겐. 우리가 어쩌구 저쩌구 불라불라.
다행이다. 영어를 할 줄 아신다. 걱정 말라며 크리스틴에게 전화를 걸어 준단다. 크리스틴 말이 아빠랑 엄마 병원에 가신 거라고 물리치료만 받고 금방 돌아오실 거라고 걱정 말란다. 지마음 이제 마음이 놓였나 보다. 아이들과 어울려서 다시 천진난만해졌다.
10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할아버지 내외가 오신다. 오시면서 크리스틴에게 연락을 받으신 모양이다. 커다란 웃음을 웃으시며 댁에 들어가셔서 마스터키로 현관문을 열어주신다. 할머니를 보니 다리가 불편하셔서 목발에 몸을 기대고 계신다. 지금사진과 내가 위층에 올라가서 남은 짐을 챙겨 오는 동안, 지마음은 할머니와 그새 친해진 모양이다. 내려와보니 할머니랑 꼬맹이들이랑 밭에서 놀고 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할머니도 뵐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스트리아 시골도 우리의 시골과 마찬가지로 이웃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도 보았다. 지마음이 보기에 할머니는 꼬맹이들을 마치 친손주처럼 예뻐하고 있단다. 지마음이 만약 문을 잠그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거나 알지 못했을 일이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바로 놓아줄 생각이 없으시다. 독일어로 말씀을 하시는데 이상하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다 알아듣겠다. 바디랭귀지의 달인이시다. 아내분은 몸이 불편하시지만 자기는 스키로 단련된 몸이라면서 허리를 요리조리 돌리는데 지금사진과 지마음은 그 모습에 웃겨서 뒤로 넘어간다. 아내와 함께 아주 오랜 세월을 보냈다고 하신다. 가족사랑이 지극하신 분이다. 커다란 손으로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고 그렇게 헤어졌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크리스틴에게 우리가 묵었던 숙소 그림을 보내주면서 내년에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가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다. 크리스틴도 다시 고사우에 오게 되면 꼭 들려달라고 했다. 지금사진은 고사우에 다시 오면 수제비를 만들어서 동네분들에게 대접을 해야겠다고 했다. 이름하여 고사우 수제비. 지마음은 빙구 김밥을 만들겠다고 했다. 왜 빙구 김밥이냐고 물어보시면 그건 지마음이지요.
고사우에서 할슈타트는 지척이나 다름없다. 차로 고작 20여 분만 더 가면 되는 곳이다. 계획형 인간임을 자처하면서 마을 입구에 표시되어 있는 주차장별 주차가능면수를 확인한다. 2 주차장에 자리가 아지 남았다. 2 주차장이 푸니쿨라 정거장과 역사직구가 가까워서 늘 먼저 빈자리가 사라진다. 주차를 하고 바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한다. 내려올 때는 산길을 따라 내려오자는 제안에 둘이서 이구동성으로 대답한다.
“노 플리즈”
그럴 줄 알았다. 예전에 이곳에서 만났던 신혼부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땐 내려오는 길에는 푸니쿨라를 이용하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오는데 이 길을 따라 올라오는 신혼부부를 보았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느냐고 묻길래, ‘한참을 더 올라가야 하는데, 신발의 상태가 불량하다. 그런 신발로 산길을 오르면 두배로 힘이 들 것이고, 끝까지 완주를 했다가는 결혼생활 완주가 힘들 것’이라고 충고를 해주었다. 다행이었다. 냉큼 알아듣고 방향을 바꿔 같이 내려왔다. 2 주차장에 가면 푸니쿨라가 있으니 마을 구경 다 끝내고 올라가서 시원한 맥주 한잔 가라고 해주었다.
“한 커플을 위기에서 구해주셨습니다”
걷는다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이라니요. 인간의 아킬레스건은 지구상 어느 동물보다 오래 걸을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인데 말이죠.
푸니쿨라를 타고 슈웅하고 올라간 곳에는 전망카페가 있다. 물론 카페를 들르지 않고도 충분히 전망을 즐길 수 있다. 전망대 끝에는 늘 사람들이 붐빈다. 지금사진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우리는 카페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에스프레소를 탁 털어 넣는다. 전망은 좋지만 음식맛은 형편없기로 소문이 난 곳이라서 이곳에서 점심을 할 생각은 없다.
다시 마을로 내려가서 식사할 곳을 찾는다. 역사지구 안에 이름 있는 식당은 이미 자리가 없다. 어차피 할슈타트의 베스트 조망을 보려면 마을을 가로질러야 하기 때문에 적당한 식당이 나올 때까지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면서 놀멍놀멍 간다. 오스트리아 전통복장을 입고 호객을 하는 분이 보인다. 더 이상 가면 식당을 없을 듯하다. 이름만 봐선 어떤 음식인지 감이 없지만 그냥 이것저것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을 시켰는데, 고기 빠진 라자냐에 토마토소스가 듬뿍 얹힌 맛이다. 지마음은 파스타가 싱겁다며 내 토마토소스를 가져다가 비벼먹는다. 조금 나아졌단다. 지금사진도 따라 한다. 음료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오스트리아 전통음료라며 강추하길래 한병 가져다 달라했다. 으음… 맹물에 몇 가지 약초 달인 물로 희석한 것 같은 아주 건강한(?) 맛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주방장 추천요리를 받으면 실패한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성공한 적이 없다.
뷰포인트에 가서 지금사진이 사진을 찍는 동안 더위에 지친 지마음과 나는 성당에 들어가서 조용하게 침묵을 즐기고 있다. 지마음은 촛불하나도 켜고 조용히 기도까지 한다.
“뭘 빌었어?”
“로또 당첨하게 해 달라구요. ㅋㅋㅋ”
이제 체코로 넘어가야 한다. 체코는 원래 계획에 없었는데, 지마음이 예전에 쓰고 남은 체코돈이 많이 남아서 체코돈을 쓸 수 있는 곳에 가서 모두 탕진잼을 하고 싶다는 말에 얼씨구나! 그럼 체스키크룸로프를 가자고 했다. 잘츠부르크에서 하루에 다녀올 정도로 가까운 곳이다. 또다시 그놈의 ‘뷔에넷’을 발급받아야 한다. 국경을 조심조심 서행으로 넘어가면서 어디서 ‘뷔에넷‘을 발급받아야 하나 살피고 있다. 어, 이곳엔 사람은 없고 자판기처럼 생긴 기계에서 발급을 하고 있네. 차량번호 등록하고 카드결제로 끝. 가장 간편하고 알기 쉽다.
체스키크룸로프의 숙소. 제법 경사가 가파르다. 마당이 넓어 주차는 편하다. 숙소는 부부가 운영하고 있는데 실세는 아내 같다. 갑자기 주접을 떨고 싶어졌다.
“그는 당신을 위해 일합니까?”
(살짝 당황하며)”아니요, 그는 나의 남편입니다 “
“맞네요. 그는 당신을 위해 일하고, 나는 나의 아내를 위해 일하고”
그제서야 나의 주접을 이해하고 깔깔 웃는다.
다음번에 오면 쓸 수 있는 10% 할인 바우처를 주면서 직접 연락 주면 북킹닷컴보다 저렴한 가격에 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플랫폼 기업들의 수수료를 아까워하는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다.
아직 해가 길게 남았다. 마을 구경도 하고 저녁도 먹을 겸 내려가는 길. 굽이도는 강을 따라 만들어진 마을을 보며, 지금사진이 한마디 한다.
“하회마을이네”
지마음이 점찍어 놓은 꼴레뇨 식당은 이미 만석이고 대기순번이 제법 길다. 그렇다면 꼴레뇨는 내일 먹기로 하고 예약만 해두었다. 오늘은 베트남 음식으로 정했다. 이곳을 잘 알고 있는 분이 추천한 식당이다. 익숙한 맛에 맥주 한잔씩 걸치고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는 저녁이 되면 시원한 걸 넘어서 추워진다. 벌써 추워진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기로 하고 지금사진은 딱 좋다며 야경사진을 좀 더 찍다가 돌아오기로 한다. 추운날씨에 기침이 조금 더 심해진 것 같다. 헉헉거리며 숙소로 돌아온 지금사진. 밖은 몹시 춥단다. 지금사진이 춥다면 진짜 추운 거지. 6월에 7도라니. 이거 실화냐?
헉헉거리며 올라오다가 주인장을 만났단다. 뭔가 불평을 하려는 순간, 올라오는 길이 힘들지만 전망을 끝내준다며 숙소 자랑을 하신단다. 으음 만만한 분이 아니시다.
셋이서 한 방에 모여 도란도란 수다도 떨고 와인도 마시다가 헤어졌는데, 자는 동안 내가 기침이 좀 심해져서 지금사진이 잠을 자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한다. 지마음이 준 약을 먹고 깊게 잠들어버린 나는 잘 모르겠다.
일기 끝.
사진이 듬뿍 들어있는 지마음 작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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