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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우, 그리운 그곳

동유럽 일기 - 10

by 지노그림

고사우는 이번 여행에서 내가 가보고 싶어서 추천한 곳이다. 이곳을 택한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는 유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사우에서 겨우 10분 거리에 할슈타트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어서 굳이 일부러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유명한 관광지로는 비엔나, 잘츠부르크, 할슈타트 정도인데, 이 세 곳 모두 너무 알려진 곳이어서 나는 크게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고사우 정도라면 잘츠부르크와 할슈타트가 가까워서, 주변 유명관광지를 돌아보기에도 편하고 오스트리아 시골의 목가적인 풍경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어제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고사우로 들어오는 길의 풍경이 어땠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아침에 창문을 열어보고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 무서웠다고 하던 지마음도 창문 밖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남은 과일과 빵을 자르고 지금사진은 커피를 준비한다. 어젯밤 너무 늦게 도착해서 숙박요금은 다음날 정리하자고 했는데, 할아버지는 어디에 가셨는지 보이지 않으신다. 금전관계는 깔끔하게 정리를 하고 가야 내 마음이 편한데 말이다. 할아버지 집 앞에서 서성이다 그냥 돌아왔다. 저녁때 돌아와서 드려야겠다고 일단 크리스틴에게는 메시지를 보내두었다. 괜찮단다. 아무 때고 할아버지 만나면 드리면 된단다.


<창문 밖 풍경이다>


간단한 아침을 하면서 오늘 무얼 할까를 정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루틴이 되어버렸다. 일단 고사우에 가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으로 슈욱 올라간다. 지마음과 지금사진은 대찬성이다. 심해어족이지만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아무렇지도 않단다. 케이블카로 내리면 고원이 시작된다. 겨울에는 스키를 타는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지금과 같은 초여름에는 트레킹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트레킹 길이 아주 잘 정돈되어 있어, 남녀노소 누구라도 간단한 복장으로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휠체어도 빌려 주고 있으니, 지마음이 힘들다고 하면 휠체어에 앉혀서라도 트레킹을 할 생각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다.

“아. 제가 그 정도는 아니에요”


많이 걷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고사우에서는 걷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즐길 수 없는 곳이다. 케이블카로 올라갔다가 고사우 호수를 감상하고 차 한잔하고 내려올 거라고 일단은 꼬드겼다. 지마음의 눈빛을 보니 반신반의하는 듯하다. 케이블카에 산장에서의 점심식사가 포함된 티켓을 구매했다. 케이블카 가격에 몇 유로만 더하면 되기 때문에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데다가, 산장에서의 점심식사는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시원한 맥주까지 한 잔 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케이블카의 운전수는 중년의 부인이시다. 입을 꾹 닫으시고 안전장치를 차례차례 확인한 후, 케이블카를 운전하시는 모습에 확실히 독일계 사람들은 매우 진지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관광객을 모두 안전하게 내려주신 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앉으셔서 무료한 표정을 지으시는데 그것조차도 멋진 고사우이다.

지마음은 많이 걷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걷는 트레킹 길이다.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산장을 확인해 보니, 조금은 걸어야 한다.

“쪼기,(저기라도 하면 멀어 보일까 봐) 눈앞에 보이는 산장까지만 가 봅시다”


심해어족이 산길을 걷는 모양새는 흡사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동영상으로 남겼다가 지금사진에게 보여주니 웃음을 터뜨린다. 같이 케이블카에서 내린 분들은 벌써 어디로 사라지셨는지 보이지 않는다. 어슬렁거리며 경사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방울소리(워낭소리)가 들린다. 소 떼가 나타났다. 사람이 있건 없건 소 떼들은 묵묵히 자기 길을 간다.


소 떼를 보고 아이처럼 신이 난 지마음에게 마침 송아지 한 마리가 급관심을 보인다. 마치 엄마소를 따라가듯이 지마음을 따라가고 지마음은 즐거움에 ‘꺄악‘ 소리를 지르며 신이 났다. 고사우가 아주 마음에 든단다. 지금사진은 꽤 멀리까지 가서 사진을 찍고 있다.


<지마음 작가를 모델로 그려보았슴>


이렇게 각자 산 위에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점심식사 시간이 되었다. 눈여겨 두었던 산장에 가서 케이블카 역에서 구매한 바우처를 보여주니, 메뉴 중 Grilled meat만 제외하고 아무거나 주문해도 된단다. 딱 정해진 음식만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이외로 선택지가 많아서 횡재한 기분이다. 파스타, 병아리콩과 경단 그리고 샐러드를 주문하면서 맥주 2잔도 잊지 않는다. 오후 운전은 지마음이 하겠다고 자청한다. 산 정상에서 마시는 맥주 한잔은 정말 잊지 못할 맛이다. 마시지 못하는 지마음은 맥주잔만 들고 마시는 척 사진만 한 장 남겼다. 안타깝다. 진짜 맛있는데. (아닌가, 한 모금 마셨던가)


산장을 운영하고 있는 부부는 누가 봐도 산사람들이다. 쭉뻗은 몸매와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에 그만 ‘정말 멋진 몸매를 가지셨어요’라고 칭찬을 하고야 말았다. 지금사진과 지마음이 깜짝 놀란다. 성희롱에 해당되는 말이란다.

“그래요? 여기선 칭찬을 하면, 칭찬으로 잘 받아주는데”


부부는 이곳 산장에서 늘 지낸다고 한다. 위층에 생활공간이 있고, 아래층에서는 식당과 카페를 운영하며 지낸다고 한다. 산에서 살지 않는 삶은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시는데 백만 불짜리 미소이다. 산에서의 생활이 풍족할 리 없지만, 이들 부부는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멋진 산과 매일 만나는 새로운 사람들. 이런 곳에는 진상고객도 없을 테지.


케이블카로 내려가서 호수구경을 하기로 했다. 지금사진이 주변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동안, 지마음은 웬 꼬맹이랑 놀고 있다. 하여튼 아이들만 보면 어쩔 줄 모르고 좋아하는 지마음이다.


오후에는 잘츠부르크로 가서 시내구경을 하고 저녁을 먹고 오기로 했다. 나는 이전에 한 번 가봤던 곳이라서 가지 않아도 되지만, 두 사람은 처음이니 가지 않으면 어쩐지 서운할 듯해서 가보자고 했다. 오늘 이미 상당량을 걸었으므로 역사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주차장을 검색한다. 주차장 입구에 가보니 FREI라고 표시가 되어있다. 지금사진과 나는 그래도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한 사람들이다. 독일어로 아임쏘리는 못하지만 그래도 FREI가 FREE인지는 알고 있었다.

“FREE라면 공짜라는 뜻일까요?”

“아, 오늘이 일요일이라서 주차장이 무료인가 봅니다”


이렇게 둘이서 단정을 짓고 신이 나서 돌아다니고 왔다. 저녁까지 먹고 난 후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그래도 혹시 몰라 주차권을 정산기계에 넣으니, FREI란 말에 다른 뜻이 있었음이 생각났다. ‘빈자리 있음’. 공짜일 거라 생각한 우리가 순진했다. 꽤 많은 요금을 지불해야 했다.

‘ZIMMER FREI 빈방 있어요.’


주차장의 맞은편에는 시장이 열렸는데(미치겠다) 이탈리아 국기가 즐비하다. 당연히 발걸음은 시장으로 향한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직접 이탈리아 농축산물을 가져와서 팔고 있는 장터였다. 풀리아에서 온 상인을 보니 반가워서 괜히 말을 걸고 인사를 나누었다. 유쾌한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시장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와인시음을 하던 지마음에게 또 지름신이 오셨다. 달콤한 디저트와인에 눈이 번쩍, 가격도 완전 저렴. 이건 사야 해. 나는 또 내 에코백에 넣고 다니고 있다. 이쯤 되면 내 에코백은 이제 시장가방이다.



<할아버지가 우리를 반겨주었던 고사우 숙소>



<잘츠부르크에 이탈리아 시장이 열렸다. 풀리아에서 왔다고 하니 괜히 더 반갑다.>


햇빛을 피할 수 없는 무척이나 뜨거운 날씨이다. 미라벨정원을 얼른 가로질러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이곳의 다리에도 약속의 자물쇠가 주렁주렁. 제발 좀 헤어지라구.


오늘 이미 많이 걸었으므로 좀 쉬어가기로 한다. 일요일이라서 그런가 문을 닫은 곳이 꽤 많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관광지라도 일요일은 쉬어간다는 느낌이다. 이럴 땐 검색의 달인 지마음이 실력을 발휘할 때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 지마음만 따라간다.


예쁜 카페이다. 각자 마음에 드는 음료를 한잔 하면서 쉬고 있다. 옆 테이블은 아무리 봐도 게이커플 같다. 앞쪽 테이블은 이탈리아 사람들 같은데 독일말을 하고 있다. 지금사진은 아까부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지마음은 코를 훌쩍거리고 있다. 아직도 감기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다. 돌아갈 때는 내가 운전을 해야겠다.


골목 구경을 하고, 버스킹 구경도 하고, 벼룩시장이 또 있다. 지마음 내일 아침식사를 위해 빵을 사둔다. 시장에서 그냥 가면 지마음이 아니지. 우리가 샀던 빵 중에서 가장 쫄깃하고 맛있었던 빵이다. 빵은 얌전히 시장가방 속으로. 시간이 넉넉했다면 푸니쿨라를 타고 잘츠부르크 성에 올라갔겠지만 뜨거운 날씨로 지쳐 보이길래 저녁을 좀 일찍 먹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늘 밖으로 나가기 싫어서 사진도 이렇게 찍었다>


저녁시간으로는 조금 이른 5시 30분이지만, 아까 봐둔 중식당이 그때부터 영업을 한다고 했다. 마파두부와 볶음밥 그리고 볶음면요리를 시키고 지금사진을 맥주 한 잔 더. 난 운전을 해야 해서 숙소에 가서 한잔 하기로 했다. 지금사진은 이럴 때마다 아주 미안해한다. 그럴 필요 전혀 없는데, 운전은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말이다. 주변 풍경 동영상도 만들고 사진도 찍고 즐기면 된다니깐.

‘하여간 안 맞아. 안 맞아’


일찍 자리를 잡은 덕분에 몇 개 되지 않는 야외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날씨만 허락한다면 야외식탁이 항상 우선순위이다. 잘츠부르크의 역사지구에는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골목이 많다. 건물과 건물사이에 통로를 만들고 그 사이에 식당이나 상점이 들어선 특이한 구조이다. 사람만 드나들 수 있다. 늦은 밤이 되면 건물에 있는 문은 닫히고, 길은 사라진다.


우리 앞자리에 아기를 데리고 온 부부가 앉아 있다. 아기를 본 지마음, 가만있지 못하고 아기랑 눈짓을 주고받더니 급기야 아기를 안아주고 온다. 낯선 동양인에게 털썩 아기를 맡기는 부모를 보아하니 확실히 아기는 선입견이나 인종차별이 없는 건강한 시민으로 자랄 것 같은 느낌이다. 안아주고 돌아온 지마음 조그마하게 속삭인다. 이름이 로라인데요, 8개월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8개월이 왜 이렇게 커요.

확실히 독일계 유럽인들은 발육상태가 남다르다.


저녁식사를 하고 되도록 해가 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오기로 했다. 어제 그 길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저녁노을이 지는 고사우숙소의 사진을 찍고 싶기도 하고. 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맥주를 몇 병 사려 했으나, 오늘은 일요일. 모두가 쉬는 날이다. 결국 맥주를 구하지 못하고 빈 손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도 마침 집에 계신다. 크리스틴에게 메시지를 보냈더니 할아버지가 오셨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항상 기분이 좋은 분이시다. 할아버지는 독일말로 나는 영어로 한참을 떠들고 있다. 아마 관광은 잘했냐. 밥은 먹고 다니냐. 너희들 보기 좋다. 나도 여행하고 싶다 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영어는 못 하시지만 바디랭귀지에 능하신 할아버지이시다.


거스름돈을 주려고 하셔서 할아버지에게 대신 맥주를 우리에게 주면 어떻겠냐고 여쭈었다. 엥 무슨 말인가 싶으신지 따님인 크리스틴에게 전화를 건다.

“크리스틴, 우리가 자기 전에 맥주를 마시고 싶은데, 일요일이라서 맥주를 사지 못했다. 거스름돈 대신 맥주로 대신 주면 안 되겠니?”


전화를 바꾸어 든 할아버지 큰 소리로 껄껄 웃으시면서 잠깐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시더니 맥주를 한 아름 안고 오신다. 결국 이 맥주 다 못 먹고 비엔나의 호텔에 두고 와야 했다. 이렇게 고사우에서의 마지막 밤도 깊어가고 친밀도일까 우정일까 뭐 그런게 깊어가는 느낌이다

참 내 안 맞으면서도 이렇게 잘 다니고 있다니...


오늘도 역시 쓸만한 사진이 별로 없습니다. 지마음 작가는 저보다는 부지런해서 열심히 사진을 찍어두었군요.

https://brunch.co.kr/@f3b4b2ba5cf94f3/18


다음이야기는 아침에 짐을 숙소에 두고 문을 잠가버린 이야기와 할슈타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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