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9
계획에 없던 피란을 잠깐 들러보기로 했다. 어제 가지 못한 피란을 못내 아쉬워하는 지금사진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어제 동굴여행을 오고 가면서 ‘저기가 피란이네요’ 하던 말이 우리를 피란으로 이끌었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도로공사를 할 때 대책 없이 길을 막아버리는 경향이 있다. 오늘만 해도 그렇다. 차선 하나를 그냥 막아버리고 공사를 하고 있다. 물론 공사차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주말이잖아요) 임시로 개설한 차선은 공사 중인 차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다. 주행차선으로 갔어야 했다. 추월차선에서는 피란으로 가는 입구로 나갈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아마 도로 어디에서인가 이런 것에 대한 정보가 있었을 테지만 외국인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피란으로 가는 길을 누군가 막고 있는 기분이다. 지금사진에게 어쩔 수 없다고 아쉬워하지 말라고 하는 순간, (불법) 유턴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 공간을 만들어 둔 곳이 보인다. 이곳을 놓치면 블레드까지 그냥 가야 한다. 과감하게 (불법) 유턴을 하고 피란으로 가는 길로 들어섰는데, 여기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아침에 마신 커피 한잔 때문일까. 오늘 아침엔 왜 이렇게 이뇨작용도 활발한 것인가.
공중도덕을 지키고 싶었지만 ‘자연의 힘’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한 나 자신이 초라하다. 다행히 간이 주차장으로 보이는 곳이 나와서 차를 일단 빼놓고 으슥한 곳으로 가서 ‘노상방뇨’를 하고야 말았다. 지마음은 자는 척을 하지만, 지금사진을 뒤에서 사진을 찍어두었다며 놀린다. 새옹지마, 전화위복이란 말을 이런 곳에 사용하긴 싫지만, 간이 주차장을 지나 마을로 들어섰다가 다시 메인도로로 나가는 길이 ‘지름길’이었다.
이 사건 이후로 지금사진은 ‘노상방뇨를 하면 길이 보인다’며 너스레를 떨고 있다. 이 사건이 오늘 만만치 않은 일정을 소화해야 할 전조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피란 외곽의 주차건물에 일단 주차를 하고 성벽에 올라 전경을 찍은 다음, 바닷가 마을의 광장을 빠르게 다녀오는 것으로 ‘일단’ 계획을 세웠다. 성벽까지는 멋진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니 모두 같이 올라갔다. 성벽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피란의 풍경은 역시 감탄사를 나올 정도로 아름답지만, 성벽 위에는 강렬한 햇빛을 피할 곳이 없다. 오늘따라 화장도 하지 않은 지마음. 이날 생긴 햇빛알레르기로 남은 여행 내내 콧잔등에 뾰루지를 달고 다녀야 했다. 지금사진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우리는 내려가서 나무그늘로 ‘피란’.
나중에 합류한 지금사진과 마을로 내려가는 중에 성당과 베네치아 탑을 본 지금사진. 지마음이 나에게 속삭인다. “지금사진님, 백 퍼센트 탑에 올라갔다 올 거예요”. 지금사진에게는 우리는 광장으로 내려가 있겠다고 하고 헤어졌다. 광장 주변의 식당 중 가장 괜찮아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일단 시원한 음료를 원샷하고 나니 이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벼룩시장이 보인다. 으음. 불안하다.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지금사진이 오지 않는 걸로 봐서는 탑에 올라갔나 보다.
시간을 보니 아예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블레드로 출발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점심을 먹고 광장에 열린 벼룩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왜 아니겠어) 시장을 구경하지 않고서는 그 마을을 안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것인가. 시장만 보면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아무튼 셋이서 시장을 구경하고, 직접 만들었다고 주장하시는 영감님에게서 그라빠도 몇 병 사고 와인도 몇 병 샀다. 살짝 맛을 본 그라빠는 이탈리아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풍미에 깜짝 놀랐다. 그라빠는 식후에 소화를 돕는다는 핑계로 딱 한잔 하는 술이다. 40도에 육박하는 독주이지만, 포도로 만들어서일까, 꽤 향이 좋은 술이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지금사진 그라빠를 아주 소중하게 안고 있다. 골목구경을 한 후,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지름길’. 시작부터 끝까지 언덕길이다. 확실히 동유럽에서의 지름길은 만만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이제 블레드로 가야 한다. 어제 이미 슬로베니아 ‘뷔에넷’을 받아 두었으므로 오늘은 걱정 없이 국경을 지날 수 있다. 블레드 호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은 블레드 성이다. 혼자 왔으면 블레드 호수 근처에 대충 주차를 해두고 절벽에 난 길을 따라 블레드성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심해어족임을 자처하는 지마음을 위하여 블레드 성 앞의 주차장으로 차를 가져간다. 역시나 주차장은 이미 만차이다. 지마음과 지금사진을 내려주고 먼저 성안에 가있으면 내가 알아서 주차를 하고 찾아가겠다고 하고선 아까 올라올 때 봐 두었던 공터에 차를 주차를 했다. 먼저 들어가라고 했지만 두 사람의 성격상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 헐떡거리며 고갯길을 올라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 아 쫌 먼저 들어가라니깐.
“하여간 안 맞아, 안 맞아”
주말에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우 인기가 있는 곳이어서 거의 매주 행사가 있다고 한다. 오늘도 역시 결혼식이 있다. 잘 차려입은 하객들의 복장을 보면 신부를 배려하지 않는 듯하다. 화려한 드레스를 뽐내고 다니는 부인네들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매우 우아한 여성을 보고 지금사진과 나는 시선을 거둘 수가 없다. “우와, 진짜 멋있네요” 감탄을 동시에 하고 있다. 물론 우리 지마음도 그 사이 화장을 하고 나니, 어디에 가도 빠지지 않는 미모로 동유럽 사내들의 시선을 강탈 중이다. Please, believe me.
지금사진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우리는 또 휴식모드. 시간을 보니 아예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가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에 폭풍검색을 하고 있던 지마음. 탁, 휴대폰을 접으면서 오늘은 태국음식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난 굴라쉬만 아니면 오케이. 지금사진도 역시 오케이.
주차를 해 둔 공터로 터덜터덜 내려가는 길에 지마음 또 머리에 꽃을 꽂았다. 초록의 나뭇잎을 배경으로 이 모습을 한 장 찍어주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 나왔다. 물론 순전히 내 기준이다. 식당까지 꽂고 가겠다는 걸 ‘그라는 거 아니라구’ 간신히 말렸다.
“하여간 안 맞아, 안 맞아”
아주 깔끔한 식당이었다. 볶음국수가 아주 맛있었다. (역시 믿고 가는 지마음작가 추천) 지금사진은 사진 찍느라 고생했으니 시원한 태국맥주도 한 잔 하고, 지마음과 나는 운전을 번갈아 하기로 하고 오늘 숙소인 고사우에 가서 오스트리아 맥주 한잔 하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두 시간 정도면 갈 거리였다. 행복한 저녁식사를 할 때만 해도 몰랐다. 그 길이 어떤 길이 될런지.
숙소에는 당초 약속했던 8시보다 조금 늦은 9시쯤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 두었다. 호기롭게 지마음이 먼저 운전을 하겠다고 한다. 좋아요. 한 시간씩 운전하면 되겠다며 일단 시작. 블레드를 벗어나 메인도로에 들어서자마자 길이 주차장처럼 되어버렸다. 차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길가에는 차를 세워두고 노상방뇨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으음, 내가 그 심정을 알지”
아주 잘 생긴 청년이 볼 일을 보다가 나랑 눈이 딱 마주쳤다. 엄치척을 해주면서 시원하게 웃어 주었다. 이 청년도 세상에 근심을 모두 버린 듯한 표정으로 활짝 웃는다.
두 시간 동안 지마음이 운전한 거리는 20km쯤 되었을까. 지마음이 피곤해하는 듯하여 이제부터 내가 운전을 하기로 한다. 어쨌든 체증만 해결되면 1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니깐. 휴게소는 그야말로 인산인해. 화장실 앞은 끝이 안 보이는 긴 줄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꽤 많은 노상방뇨 장면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에 담담해져 버렸다.
교통체증의 원인은 터널 앞의 통행요금 징수박스 때문이었다. 아니 ‘뷔에넷’ 발급받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곳에도 아무래도 ‘민간투자‘라는 자본주의의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확인해 봐야겠다.
오스트리아 국경에 들어서니 벌써 11시가 넘었다. 고사우까지는 국도로 가야 하는데 캄캄해도 너무 캄캄하다. 로드스튜어드는 그의 노래에서 “black, more than night”를 주절거리고, 길은 무섭다.
<길 막히는 거 잘 보이시죠 >
별 생각이 다 든다. 숙소까지 가긴 갔는데 너무 늦어서 들어갈 수 없으면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 밤길을 가로질러 숙소에 도착하니 12시 30분. 전화를 하려 하니, 영감님이 나오시며 환한 미소를 보여주신다. 영어는 못하시지만 그의 미소에서 환대가 느껴졌다. 울컥해서 안아 드릴 뻔했다. 따님이신 크리스틴을 전화로 연결해서 통화를 하고 열쇠를 받고 드디어 숙소에 들어선다. 2층(우리 기준으로는 3층)이라서 낑낑거리며 짐을 옮겨야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3층 전체를 우리가 쓰게 되었다. 지금까지 지내온 숙소 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지마음은 방이 너무 커서 무섭단다. 난 탁 트인 이곳이 아주 마음에 든다. 크리스틴이 아래층에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 조용하게 지내달라는 부탁이어서 조심조심 걸어 다닌다. 길고 긴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잠이 들었던 하루였다.
다음 이야기는 고생 끝에 낙 ‘고사우’에서의 행복한 날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지마음 작가님이 그날의 에피소드를 아주 맛깔나게 정리해두셨네요.
https://brunch.co.kr/@f3b4b2ba5cf94f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