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8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할 일은 감기약을 사는 일이다. 어제가 쉬는 날이어서 그랬을까. 약국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너무 오래 기다릴 것 같아서 어제 시장 근처에서 봐 둔 약국으로 옮겨본다. 이곳도 역시 사람들이 있지만 아까 그곳보다는 기다리는 사람이 적다. 특이하게도 약국 안에서 기다리지 않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 사람이 나오면 다음 사람이 들어가는 뭐 그런 시스템이다. 사람들끼리 눈짓을 하고 먼저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 팬데믹때 하던 습관이 굳어진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런 방식으로 줄을 섰던 것일까.
이곳 약사님 만만치 않으시다. 기왕 사는 감기약 넉넉하게 사려고 하니, 안 된단다.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약의 양이 정해져 있단다. 한국에서 항생제로 찌들어 버린 몸에 웬만한 약은 효과가 없다. 이곳에서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약은 뭐랄까, 건강보조식품에 가까운 듯하다. 하지만 이 마저도 내 맘껏 살 수가 없다.
지마음은 빨리 회복하려는 욕심에 두 가지 약을 한꺼번에 복용할 생각으로 두 가지 모두 달라고 했더니, 손가락을 흔든다. 용도가 비슷한 두 가지 약을 한 사람에게 줄 수는 없다고 한다. 그게 맞는 말이긴 한데, 아 우리는 이 정도로는 약빨이 들지 않아요.(마음의 소리). 아, 한 가지는 내가 먹을 거예요. 약사님 약간 못 미더운 눈초리이긴 하지만 어쩔 거야.
아무튼 약을 사고, 어제 못한 시장구경을 하고 가겠다고 한다. 아 제발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말아 주세요. 어제 사가지고 온 포도와 살구가 아직 많이 남았잖아요. 다행이다. 구경만 하고 돌아 나온다.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로 가는 길에 드디어 지마음이 운전을 한다. 국경 근처의 주유소에서 E-비넷을 사야 하는데, 종업원 녀석 모르는 척한다. 비넷이 오히려 뭐나며 되묻는다. 옆에 주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뷔에넷’이라고 하니, ‘아’하면서 아는 척을 한다. 으음, 뭐라는지 알면서 마치 ‘네 발음이 후져서 못 알아듣겠다’라는 느낌을 살짝 받았는데, 심증만 갈 뿐이다. 살짝 싸가지가 없어 보이는 녀석이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슬로베니아에서 동굴로 유명한 곳이다. 포스토이나에 가면 아주 거대한 석회암 동굴이 있다. 뭐 동굴 구경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 정도는 가 볼만한 곳이다. 우리나라에도 석회암 동굴이 있긴 하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다. 동굴 안에는 슬로베니아의 상징인 용의 새끼가 살고 있다. 실제는 동굴 안에서 서식하는 도롱뇽 같은 녀석인데, 이 녀석이 살고 있다는 어항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찾기 어렵다.
동굴투어는 일단 시작하면 입구에서 기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간 다음, 걸어서 잘 정리된 길을 따라 동굴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기차로 나오게 된다. 중간에 그만 둘 방법이 없다. 동굴 안이 이렇게 추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여름이나 한겨울에도 항상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한여름 복장으로 갔으니 추울 수밖에. 원래 더위를 많이 타는 지금사진은 시원하니 좋다고 한다. 가지고 온 바람막이 잠바는 지마음이 입었다. 지금사진이 진짜 시원해서 바람막이를 양보한 건지, 아니면 감기에 걸린 지마음이 걱정되어 시원하다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
원래는 1시간 30분 정도의 동굴여행을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한 군데 더 갈 곳이 생겼다. 아까 입장권을 살 때, 프레자마 입장권도 같이 구매를 했었다. 동굴에서 40여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점심을 먹고 가면 살짝 늦어서 입장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가서 보고 난 후,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프레자마는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우뚝 솟은 절벽 안에 성채를 만들어 두어, 도개교만 올리면 그야말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다. 이곳의 성주는 이 요새에 들어앉아 로빈훗처럼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 성을 정복하려고 당시 유럽을 호령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졸개들이 성 앞에 진을 치고 포위를 했지만 성주는 요지부동이었다. 동굴 안에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성 외부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배신하는 것은 믿는 도끼이다. 현상금에 눈이 멀었던 부하의 밀고로 성주는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다가 돌에 맞아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그 화장실 앞에 가면, 당시의 참상(?)을 알려주는 듯한 돌폭탄이 굴러 다니고 있다.
<이런 허술한 화장실 벽으로 저런 돌이 날라와서리…>
지금사진과 내가 성을 탐색하고 있는 동안, 동굴에서의 추위로 살짝 지친 지마음은 따뜻한 햇볕이 그립다며 성밖으로 나갔다. 동굴로 나가는 길이 있다고 했는데, 이리저리 돌아다녀 보아도 나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지마음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배도 고프기도 해서 우리도 그만 내려왔다. 혼자 심심할 줄 알았던 지마음 어떤 미국인 언니 사진을 찍어 주느라 분주했단다.
이렇게 찍어 달라는 둥, 저렇게 찍어 달라는 둥, 아주 주문사항이 많았단다. 사진에 관심이 많고 제법 찍을 줄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자기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단다. 웬걸,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는단다. 커커커. 지마음을 예쁘게 찍어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단다. 우리니까 그 정도로 예쁘게 나오는 거라니깐.(사진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예쁘게 나옵니다. ㅋㅋㅋ)
점심은 성 아래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뭐 먹을 게 있나. 깔라마리 튀김이지. 감자튀김도 한 접시 시키고 비교적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했다. 가는 길에 지금사진은 피란에 들려 사진을 찍고 싶어 했지만, 오늘은 그만 숙소로 돌아가자고 했다. 지마음의 상태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고 나도 동굴에서 추워서 체력소모가 심해진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러면 숙소에 가서 수제비를 만들어 줄게요”
”아, 그거 좋지. 지난번 자그레브에서도 뜨끈한 수제비를 먹고 다음날 컨디션이 좋아졌었잖아요 “
지금사진은 이렇게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다. 귀찮을 법도 한데, 신이 나서 수제비를 만들고 있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운전을 했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란다. 지마음은 아스파라거스 볶음을 하겠다고 야채를 손질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심심해서 같이 야채를 손질하고 있다. 우리 셋 이렇게 손발이 잘 맞으면서도 ‘안 맞아, 안 맞아’를 중얼거리고 있다.
자그레브 수제비에서 업그레이드가 된 김치해물수제비이다. 우리는 이 수제비를 나중에 ‘고사우 수제비’라 이름 지었다.
“와아, 국물맛이 미쳤다 “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져온 와인도 한 병 나누어 마시고, 이렇게 행복한 저녁식사를 하고 났더니, 신기방기하게도 다시 기운이 회복되었다. 풀라의 마지막 밤인데 숙소에만 있을 수는 없지. 신전 앞 광장에 가서 칵테일도 한 잔 하면서 풀라에서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고 있다.
멀쩡한 사진이 별로 없어서 오늘도 지마음 작가에게 묻어갑니다.
https://brunch.co.kr/@f3b4b2ba5cf94f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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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추하기는 한데, ’ 노상방뇨’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