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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라와 로비니 - 골목길과 노을

동유럽 일기 - 7

by 지노그림

풀라는 예약한 숙소 중에 유일하게 세탁기가 있는 곳이다. 깔끔한 지금사진은 어제저녁 진즉에 빨래를 해 두었고, 조금 게으른 지마음은 아침 기상과 함께 빨래를 하고, 제일 게으른 나는 마지막으로 빨래를 했다. 아직 감기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지마음과 함께 약국을 찾아다녀보지만 문을 연 곳이 없다. 시장도 한산하기 그지없고 이상한 날이다. 그래도 문을 연 카페는 있다. 물어보니 오늘이 국경일이라서 그렇단다. 하아. 그렇군.


그래도 식당은 문을 열어서 다행이다. 올리브영(BIPA)도 문을 닫고, 약 비슷한 것을 살 수 있는 DM도 문을 닫았다. 폴라 구경은 역사지구를 환형으로 감싸고 있는 보행자전용 길을 따라 반 바퀴 도는 것으로 끝이다. 길의 끝에는 아레나가 있고 반대쪽 길의 끝에는 개선문이 있다. 그 길의 중간에 성모승천성당과 고대로마의 신전이 있다. 풀라의 전경을 보려면 언덕 위의 성채로 올라가면 될 듯한데, 오늘은 노 플리즈.


이스트라 반도의 해안마을은 거의 베네치아 인들이 건설한 식민도시였다. 식민도시라 부르니 뭔가 착취를 할 것 같은 뉘앙스가 풍기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 해안 도시들은 아드리아 해를 따라 이슬람 제국을 오가며 상업활동을 하는 베네치아의 상선들이 물과 식량을 구하고 부족한 선원을 보충하기도 하는 중요한 기지역할을 하였다. 물론 모든 보급품과 선원들에게는 제 값을 치러야 했다. 당시의 상선은 갤리선이 주를 이루었는데, 바람이 불 때는 돛을 이용하여 항해하지만 바람이 없을 때는 노를 저어 항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슬람의 해적들이 노예를 이용하여 노를 젓도록 하는 것에 비하여 베네치아 상선의 노잡이들은 모두 자유인이었다. 이 차이는 둘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베네치아의 상선에게 확연한 수적 우위를 점하게 해 주었다. 노예에게 무기를 주어 전투에 임하게 할 수는 없지만 자유인은 무기를 들고 전투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의 상선들이 바다의 ‘고속도로’를 통하여 항해할 때, 풀라, 피란, 로비니 같은 해안도시들은 ‘휴게소’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베네치아에서 이런 식민도시들로 이주한 사람들은 베네치아와 비슷한 형태로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록 수로는 없지만 골목은 베네치아의 그것처럼 만들었다. 왜 아니겠는가.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금세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고향처럼 만들어두고 살고 싶었을 것이다. 성당옆이나 광장에는 베네치아 탑을 만들어 두었다. 비록 베네치아 본섬 마르코 광장에 있는 탑의 규모보다야 작지만 이곳이 베네치아의 영토라는 것을 자랑하듯이 우뚝 솟아있다.


유적지 구경을 하고, 지나가면서 봐 두었던 식당에 들러 점심을 해결하고 1일 1젤라또를 먹어야 한다는 지마음을 따라 오늘도 젤라또 하나씩을 물고 거리를 걷는다. 다리가 길게 나오게 사진을 찍는 법도 배우고, 내가 그동안 찍은 사진은 거의 3등신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랬나? 난 그냥 생긴 대로 찍어준 건데. ㅎㅎㅎ


와인을 사랑하는 지금사진은 와인가게에 들러 시음을 하며 신중하게 와인을 고른다. 지마음도 같이 시음을 하며 와인 고르는 것을 돕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와인으로 다시 모두 모여 오늘의 여행을 추억할 것이라고 했다. 이 두 사람 너무 사랑스럽지 않은가.


으음, 날씨가 너무 덥다. 숙소로 돌아가서 아침에 세탁기에 넣어 둔 빨래를 널어야 한다.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것은 자제하기로 하고 숙소로 돌아간 김에 잠시 낮잠을 자두기로 했다. 뭐 휴가 중이니 시에스타를 즐겨도 누가 뭐랄 사람이 있을까.


아주 달게 낮잠을 자고 나서 로비니를 가기로 했다. 풀라에서 40분 정도 떨어진 곳인데, 지금사진의 말로는 아주 예쁜 곳이라고 한다. 지금사진은 삼각대까지 챙기면서 사진 찍을 생각에 싱글벙글이다. 교통체증 걱정 없는 시골길을 따라 콧노래를 부르며 로비니로 가고 있다. 로비니 주차장에서 빈자리를 찾기 위하여 조금 기다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기다릴 여유가 생겼다.


시장을 지나 땡땡문을 지나 골목길로 올라가면 된다는 지금사진(이곳에 오려고 미리 사전조사를 해 놓았다)의 말을 따라 시장으로 들어섰다. 땡땡문은 앞에서 보면 이슬람 양식이고, 뒤에서 보면 베네치아 양식이다. 베네치아가 쇠약해지면서 아드리아해의 주인행세를

하게 된 오스만튀르크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단다. 실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베네치아의 후손다운 행동이다. (땡땡문은 이름이 아니다. 내가 기억을 하지 못해 적어둔 것이다. 나중에 바꿔 두어야지)


우리가 어찌 한국사람인지 알았을까. “맛있어요. 싸요. 비싸요. 송로버섯 맛보세요”를 중얼거리는 상인을 만났다. 이런 곳에서 한국말을 하는 상인을 만나다니, 확실히 베네치아의 피가 흐르는 상인이라는 느낌이다. 시장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지마음. 기어코 청포도와 살구를 사고야 만다. 아 또 모양 빠지게 내 에코백에 구겨 넣고 로비니의 골목길 구경에 나선다.


정말 예쁜 골목들이다. 베네치아의 골목과 아주 닮았는데 심지어 더 예쁘다. 감탄을 금하지 못하면서 성당을 찾아 올라간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해안가 언덕에 건설된 성당옆에는 예의 베네치아의 탑이 당당하게 서있다. 이곳 역시 베네치아의 도시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골목길을 올라오느라 더워진 몸을 그늘에서 식히는 동안, 지금사진은 분주하다.


다시 내려갈 시간, 지금사진이 노을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한다. 성당을 내려가 차를 가지고 가려다 보니, 그냥 걸어가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은 거리이다. 성당과 역사지구가 가장 잘 보이는 식당에 자리를 잡고 노을이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 한참을 있어야 할 것이라서 저녁식사를 근사하게 하기로 했다. 메뉴판에 눈길이 가는 것은 ‘프루티 디 마레’인데 오늘 잡은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다고 되어 있다. 값도 제법이다. 2인 이상 주문가능하고 무려 50유로나 한다. 그래 오늘은 탕진잼이다. 구운 생선요리도 하나 주문하고, 우리의 최애 음식, 깔라마리도 하나 주문한다. 프루티 디 마레는 바다에서 나오는 과일이라는 뜻이다. 각종 해산물을 일컫는 말이다.


탁월한 선택이라며 엄지척을 하던 식당직원이 가져온 ‘프루티 디 마레’는 익히지 않은 날 것이었다. 해산물 모둠구이 정도를 기대하고 있던 우리, 특히 지마음은 깜짝 놀라서 직원에게 ’ 이건 뭐냐 ‘며 손가락으로 해산물을 하나하나 집어가며 물어본다. 질문이 좀 전투적이었나 보다. 식당직원의 표정이 거의 울상이다. 가장 값나가는 요리를 시켜두고 우리의 태도를 보니 못 먹을 것처럼 보였나 보다. 아, 웃겨. 우리를 뭘로 보고.


생새우는 아, 달다. 문어숙회는 한국에서 먹던 딱 그 맛이고, 완전 짜게 숙성한 멸치조차 맛있다. 생선살을 상큼한 소스로 무쳐 낸 회를 한 입 먹고 나서는 모두 눈이 번쩍한다. 드디어 종업원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구운 생선도 맛있고, 이 집 음식 제대로 할 줄 아는 곳이다. 맥주 한잔을 곁들인 저녁만찬은 이번 여행 중 최고였다.


삼각대까지 설치해 놓은 지금사진은 식사를 하면서도 사진을 잊지 않는다. 지마음과 나는 산들산들 부는 바람과 멋진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행복한 저녁이다. 지금사진 열심히 사진에 몰두하는 동안 수다도 떨고 서로 사진도 찍어주고, 지마음은 어느새 젤라또도 사가지고 와서 하나씩 나누어 먹는다. 어떤 맛의 젤라또를 좋아하는지도 벌써 알고 있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50유로가 각각인 줄 알았다. 이게 웬일인가. 2인분이 50유로였나 보다. 우와 이렇게 멋진 음식이 50유로였다니. 사전정보 없이 고르는 식당마다 최고의 음식을 맛보고 있다. 노을 사진을 원 없이 찍은 지금사진도 행복하고 즐거운 저녁을 보낸 지마음과 나도 행복하다. 세 사람 모두 로비니에서의 저녁은 평생 잊지 못할 듯하다.


돌아오는 길. 로비니에서의 페스티벌을 즐기려는 사람들도 가득한 광장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신이 났다. 버스킹을 하는 거리의 음악가에게 지마음은 언제나 동전을 보태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아름다운 사람이다.


로비니에서의 잊지 못할 저녁을 지마음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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