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트비체 - 유행어의 탄생

동유럽 일기 - 6

by 지노그림

밤부터 내린 비가 새벽이 되어어 타닥타닥 창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번 여행을 계획하면서 아침에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날이 이틀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어제 휴식 비슷하게 여유로운 하루를 보낸 덕분이었을까. 8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7시 50분 이미 주차장에 나가서 차에 짐을 싣고 있다. 플리트비체를 들렸다가 풀라로 갈 예정이다.


9시 이전에 떠날 경우를 대비해서 미리 주차장 차단기를 열 수 있는 키도 받아 두었는데 마침 청소를 위해 출근하는 아주머니를 만나서 키를 건네주었다. 영어를 잘하셔서 깜짝 놀랐다.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청소일은 부업처럼 하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건네는 말투에서 아주 여유로움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자기가 운전을 하겠다고 우기는 지마음에게 오늘은 참아달라고 했다. 감기약을 복용한 사람에게 운전을 맡길 수는 없으니 차에서 푹 자두라고 했다. 지마음의 특기 중 하나가 등을 대면 잠이 드는 것이다. 매번 운전을 할 때마다 목격하는 일이다. 신기한 건 자면서도 우리가 하는 대화를 기억하기도 한다. 아마 자다 깨다 하면서 가는 모양이다. 비가 온 다음이라 그런가 안개인지 구름인지. 수증기가 지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온다. 오늘도 사실 비예보가 있는데 플리트비체 트레킹을 하는 동안 비가 오지 않기를. 날씨 요정들을 믿고 가본다.


1 주차장은 이미 만차인 듯해서 2 주차장으로 바로 간다. 2 주차장도 가까운 곳은 이미 주차할 곳이 없다. 한참을 올라가서 주차를 하고 다시 내려온다. 그 사이 매표소 앞에 두고 내린 지마음이 표를 구매하고 코스를 파악해 두었다.


2 주차장 기준으로 가장 짧은 코스인 E코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지마음과 플리트비체를 대표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는 F코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지금사진, 트레킹길이 가장 긴 H코스를 마음에 두고 있는 나. 드디어 '아. 안 맞아, 안 맞아' 소리가 나왔다. F코스로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선다.


사실 F코스도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배를 타러 가는 곳까지만 해도 족히 20여분은 걸어야 하고, 배로 호수를 가로지른 다음에는 서너 시간을 걸어야 하는 길이다. 게다가 날씨도 불순하니 어쩐지 살짝 걱정이 된다. 배를 타고 있는 동안 살짝 비가 내린다. 아직까지는 흥이 난다. 걷지 않고 뱃놀이를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니 트레킹을 바로 시작하기에 애매한 시간이다. 아마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고 가면 가는 도중 배가 고파서 신경이 예민해질 듯하다. 햄버거 하나씩을 시켰는데 사이즈가 슈퍼 빅 그랜드 사이즈쯤 되는 것 같다. 결국 다 못 먹고 조금 남겼다. '하여간 안 맞아' 소리가 또 나왔다.


슬금슬금 내리던 비는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세찬 비로 바뀌었다. 그래도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서 다행이다. 우리 앞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소년과 소녀가 예쁘다. 도시락을 챙겨 와서 나누어 먹는 모습도 예쁘고 옆모습이 블랙핑크의 제니를 닮아서 더 예쁘다. 딱 우리나라 사람 같은데. 나중에 지마음이 확인해 봤는데 크로아티아로 이민을 왔다고 한다. 우리말은 아주 어려운 상태이고 같이 도시락을 먹은 사람은 남자친구 아니고 그냥 오빠라고 한다고 했다. 아닌데, 오빠 동생치곤 너무 다정해 보이는데.


본격적인 트레킹 시작. 호수를 따라 자연친화적으로 만들어 둔 길을 따라 걸으면서 작은 폭포도 보고 사진도 찍고 모두 즐거워한다. 주욱 내리막길을 가고 있으니 힘도 들지 않는다. 드디어 지금사진이 보고 싶어 하던 빅웨이브폭포. 전날 비가 와서였을까. 폭포의 수량이 늘어나면서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사람들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 사람들이 물안개에 젖고 있는 동안, 지마음은 저만치 떨어져 있다. 실컷 구경하고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내려왔으니 올라가야지.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지마음은 투덜투덜. '역시, 안 맞아'.


이 오르막을 올라야 항공뷰처럼 보이는 사진을 찍을 수 있고 2 주차장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다. 중간에 다시 비가 흩날려 우비까지 챙겨 입은 지마음이 헥헥거리며 오르고 있다. 그래도 중간에 카메라들 들이대면 웃어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겉으로는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걷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입으로는 '하여간 안 맞아, 안 맞아'을 연발하면서 말이다.


'안 맞아'는 여행하는 내내 우리 입에서 떠나지 않고 유행어가 되었다. 또 하나는 '노 플리즈'였는데 이건 굴라시 때문에 생긴 말. 이름은 같지만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모든 굴라시를 먹어보겠다고 했는데, 크로아티아 굴라시에서 그만 질리고 말았다. 누가 굴라시 먹겠냐고 하면, '노 플리즈'. 이 두 가지 말이 재미있어서 여행하는 내내 기회가 생길 때마다 우리는 '안 맞아'와 '노 플리즈'를 입에 달고 다녔다. 듬직해서 원래 누구한테 싫은 소리 안 하는 지금사진도 우리한테 (나쁜)물이 들어 ‘안 맞아’를 따라하고 있다.


플리트비체를 나오면서 지금사진이 라스토케가 가까운 곳에 있으니 들려보자고 한다. 작은 마을이니 한 시간 정도만 들러보면 될 듯했다. 오늘 걸어야 할 총량을 이미 소화한 지마음이 걱정이 되었지만, 뭐 이 정도는 아직 할만하다는 표정이다. 한 시간 정도면 끝날 줄 알았는데, 마을을 외곽으로 한 바퀴 돌면서 둘러보는 길이 이외로 길었다. 정신줄을 놓아 버린 지마음. 드디어 들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 다닌다. 지금사진은 멀찌감치 떨어져서 사진을 찍는 척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외면한다. ㅋㅋㅋ


내비게이션이 수상하다. 분명 왔던 길로 가면 고속도로가 나오는데 다른 길로 안내를 한다. 우리끼리 짐작하기를 '아, 지름길로 안내하네'. 지름길인건 좋은데 길이 폭이 너무 좁고 구불거린다. 반대쪽에서 차가 올 때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이리 좁은 길에 제한속도는 90km라고 적힌 표지판이 붙어있다. 아니 정말 이런 길을 90으로 달린다구. 이 동네 사람들 전부 카레이서인가 보다. 무서운 '지름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돌면서 고속도로로 올라간다. 슬쩍 뒤를 보니 지마음 기절한 듯 자고 있다. 그치 오늘 무리했지. 이만보가 넘게 걸었으니. 이해한다. 그래도 고개가 너무 꺾인 것 아닌가.


드디어 고속도로, 연료도 채우고 우리 몸에 고인 물도 빼고 휴게소에 들러 운전자도 교체.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풀라가 있는 이스트라 반도에 들어섰다. 바다가 보이는 곳을 보면서 지금사진 한마디 한다. '부산이네'


반도를 가로질러 드디어 풀라 도착. 숙소를 찾아 짐을 내리고 주차를 하고 나니 저녁시간이 다 되었다. 더 늦기 전에 저녁식사를 해야 한다. 이스트라 반도는 이탈리아 냄새가 나는 곳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이스트라 반도의 해안 곳곳에 식민도시를 만들어 두었는데 풀라도 이 중 하나이다. 풀라는 여기에 더해 로마의 유적까지 남아 있으니 더욱 이탈리아 스럽다. 개선문도 있고 아레나도 아주 보존상태가 훌륭한 채 남아있다. 게다가 신전 앞에서는 주말마다 '고대로마'를 재현하는 조그마한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저녁은 이탈리아 식당에서. 칼라마리 튀김, 칼라마리 구이, 먹물리조또, 봉골레에 로컬 맥주. 양도 적당하고 아주 맛도 좋았다. 알고 보니 이 식당은 이 동네 핫플레이스. 배가 부르고 나니 기분이 좋아진 우리들. 젤라또 하나씩 입에 물고 밤거리를 산책한다. 고대로마의 성벽을 걷다 보면 마을의 끝에는 이 동네 젊은이들이 모두 모여있는 것 같은 칵테일바가 있다. 시끄럽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그게 뭐 대수일까.

이 동네 몇 시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다.


지마음도 플리트비체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다운 사진과 함께 글로 남겨 두었다.


https://brunch.co.kr/@f3b4b2ba5cf94f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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