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5
어젯밤 탐색과 산책의 결과, 이곳에선 부지런히 돌아다녀야 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냈다. 기차역에서 시작하면 공원을 따라오면서 이것저것 구경할 것이 좀 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걸어 다녀야 할 거리가 길어지면 좀 쉬어야 할 지마음이 또 쉬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아담하지만 귀여운 아르누보 건물의 미술관이 좀 아쉽기는 하고, 진짜 좋은 건 기다란 공원의 이런저런 행사장과 모여든 사람들 구경하는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날씨 때문에 글렀다. 공원은 그냥 생략.
하지만 시장구경은 빼놓을 수 없지. 돌라츠 시장에서는 매일 아침 신선한 야채를 구할 수 있다. 급할 것이 전혀 없는 아침이지만, 시장이 일찍 파장하기 때문에 지마음이 솜씨를 발휘하여 예쁘게 깎은 과일과 차 한잔으로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대신하고 시장구경을 나선다. 부다페스트 중앙시장에서 충분한 야채를 이미 사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사진과 지마음은 예쁘게 생긴 야채들에게 마음을 뺏겼다. 기어코 양파와 호박을 사서 에코백에 넣어두면서 한마디 잊지 않는다.
“아, 감자가 맛있어 보이는데 조금 더 살까요? “
“아, 쫌! ㅋㅋㅋ“
사실 나도 목이 안 좋아서 꿀을 파는 할머니들이 나오면 프로폴리스를 사려고 했는데, 오늘은 꿀 파는 할머니들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구경을 끝내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기네스바가 보이길래 쉬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아. 아일랜드) 혼자서 주문과 서빙을 모두 하고 있는 이 분이 사장일까. 종업원일까. 아무튼 이리저리 분주하게 꿀벌처럼 돌아다니기는 하시는데, 어쩐지 일의 요령이 없어 보인다. 유럽에서는 기다림과 기다림을 일상화하지 않는다면 본인만 지치고 힘들다. 간신히 눈을 마주쳐서 기네스 두 잔과 한잔의 커피를 주문할 수 있었다. 지마음은 오늘은 알코올음료를 자제하기로 하고 눈으로만 마신다. 손으로 내 기네스를 들고 온갖 폼은 다 잡고 있다. 기네스는 어디에서나 진리이다.
성당들이 모두 공사 중이어서 오늘의 목적지는 딱 한 곳만 남았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자그레브에 간다면 꼭 가보고 싶다고 했다. ‘깨진 관계에 대한 박물관 Museum of broken relationship’. 글을 다루는 직업이라서였을까. 이곳에서 어떤 영감을 받는 것을 기대했으려나. 세계 곳곳에서 보내온 사연이 담긴 전시품과 사연을 꼼꼼히 읽어보면서 세 사람 따로 또 같이 시간을 보냈다.
기억이 나던 물건은 ‘카세트테이프 리코더’였다. 남편이 죽은 후 그의 목소리를 담아 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던 리코더였는데, 여자는 살아 있는 동안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한다. 혹시나 잘못되어 그의 목소리가 테이프에서 휘발되어 버릴까 봐 차마 리코더를 켜지 못했다고 한다.
기발한 이별법도 있었다. 300일의 연애 후, 그는(혹은 그녀는) 자기의 전화기를 그녀(혹은 그)에게 주고 떠났다. 남겨진 이는 전화를 할 수 없었다.
내가 겪었던 ‘깨진 관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비가 오던 날 ‘우산‘이었는데. 아주 어리고 유치할 때였다. 막 사귀기 시작한 친구였는데 만나기로 한 그날 비가 왔다. 난 그녀를 만나려고 일부러 먼 길을 왔는데, 그녀는 그녀 단짝친구의 방을 알아봐야 한다고 했다. 투덜거리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그녀에게 ‘화’를 내는 대신 ‘우산’을 들고 그녀에게 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다. 두 분의 욕심에 질려서 한바탕 말다툼을 했었다. 그 뒤로도 서너 번 더 말다툼을 하고 마음속에 있던 끈이 ’툭‘하고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뒤로 두 분을 대하는 내 마음이 마치 ’아무래도 상관없다 ‘는 듯하다. 겉에서 보기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내 마음은 그냥 그 날이후 ’깨진 상태‘이다.
지우개라도 기념으로 살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마법의 지우개라고 믿기엔 너무 세속적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4유로라니…
박물관 구경을 끝낸 후 느긋한 점심. 하아. 이곳에서는 식사량이 많아도 너무 많다.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다. 점심을 먹었으니 골목길을 둘러볼 차례이다. 학교가 끝나서 노는 건지, 아니면 오늘은 야외수업을 하러 나온 건지,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모두가 행복해 보여서 내 마음도 좋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지마음과 지금사진도 같은 기분이었나 보다. 미소가 입가에 한참을 머물러 있다. 확실히 이곳 사람들은 아이나 어른이나 느긋하다는 느낌이다. 힘들게 5 퍼센트에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대신, 그냥 95 퍼센트로 살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다시 비가 흩뿌린다. 날씨 요정 둘을 데리고 다녀도 날씨 악마 하나를 이기지 못하는 모양이다. 비를 피해 눈에 보이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서 에스프레소 한 잔.
비가 잦아든다. 광장에서 사진만 몇 장 더 찍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진 지마음 비 맞고 돌아다니다가 감기가 심해지면 안 될 일이라고 지금사진이 넌지시 눈짓을 한다. 광장에서 집까지는 겨우 오분거리이다. 하하 호호하면서 돌아오는 길이 즐겁다. 드디어 부다페스트에서 만들어 둔 ‘부다 막걸리’를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지금사진은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와 건조매생이로 리조또를 만들고 지마음은 남은 야채로 ‘전’을 부쳐내었다. 비 오는 날 막걸리와 전은 어디에서나 진리이다. 지금사진과 내가 ‘옛날이야기’ 해주는 것을 지마음은 너무 재미있어한다. 신이 나서 버스안내양 이야기도 해주고, 어항으로 물고기를 잡아 천렵하던 이야기도 해주고 뭐 별별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있다. 착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