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4
오늘 부다페스트 일정을 위해 봐 두었던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약국부터 찾아본다. 아무래도 약을 좀 사서 먹어야 할 것 같다. 약국에서는 처방전 없이 증상대로 살 수 있는 약이 몇 가지 있어 반갑다. (아니, 이게 반가워할 일이냐고요.)
지마음이 가고 싶다던 중앙시장. 시장에서는 오로지 현금만 된다길래 환전소 앞에 서 있다. 앞사람이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벌써 10분째 저러고 있다고 앞에 있던 중국인 부부가 몹시 화가 난 표정이다.
한참을 기다려 환전을 하고 나더니 커미션이 너무 세다고 불평을 한다. 시장 안에 있는 환전소라서 그럴 거라고 짐작은 했다. 우린 겨우 20유로만 바꾸는 것이라 커미션을 아끼려고 정식환전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크게 의미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20유로 줬더니 6000HUF 좀 넘게 주는거 같다.
주머니에 든든하게 HUF를 채우고 수렵활동에 나선다. 아니 시장구경이 이렇게 신날 일인가. 지마음과 지금사진의 뒷모습이 깔깔거리는 듯하다. 저녁때 자그레브에서 수제비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지금사진이 한국에서부터 가져온 특제 국물을 만들어내는 마법의 봉투(?)가 있으니 야채와 밀가루만 있으면 된단다. 호박을 사고 감자를 사고, 에잇 산 김에 아스파라거스도 사고, 과일도 몇 가지 샀다.
아직 HUF가 많이 남았다. 스낵처럼 먹는 헝가리 소세지도 한 묶음 사고, 지금사진은 아이처럼 코를 박고 뭔가를 구경하고 있다. 전구를 형상화한 한 귀여운 용기에 담겨있는 예쁜 색깔의 와인이다. 먹지도 못할 거지만 너무 예쁘다며 자리를 뜨지 못하길래, 에잇, 남은 HUF를 다 주었다. 남은 돈에 딱 맞은 가격이다. 신났다.
이제 시장에서 산 야채들이 담겨있는 봉다리를 들고 부다페스트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아! 모양이 몹시 빠진다.) 점심은 어제 가이드가 알려준 뷔페식당이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맥주를 마시던 곳 근처이다. 혹시나 해서 미리 예약도 해두었다. 어제의 그곳은 이제 사뭇 달라진 풍경이다. 그 많던 할매와 할배들은 노르웨이로 돌아갔을까. 아침부터 카라오케 집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가이드가 꼭 가보라고 극찬을 한 뷔페식당은 내 기준으로는 한 번으로 족한 곳이었다. 음식이 맛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많이 먹지 못하면서, ‘본전생각’이 나서 과식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미련하게 먹다가 탈이라도 난다면 그거야 말로 큰일 아닌가. 헝가리의 전통음식이라니 조금씩 맛만 보았다. 그래도 벌써 두 접시 째다. 고기가 많이 든 음식이 많아서 그런지 매우 무겁다. 굴라시는 어제 먹은 것과 다름없이 맛있어서 좋았다.
지마음이 바비큐를 해주는 곳이 있다길래 가보았더니 고기와 야채를 고르면 구워주고 있다. 요리하는 직원에게 추천해 줄만한 것이 있냐고 했더니 양념이 된 고기를 추천한다, 으음, 그 질기고 질긴 고기라니, 꾸준하게 운동을 해서 탄탄해진 근육을 자랑하던 소로 만든 것일까. 구두가죽에 양념을 바르고 구워서 씹어 먹으면 이 맛이 나려나. 결국 남기고야 말았다. 악성재고를 밀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돼지와 야채는 맛있어서 다행이다.
지금사진은 시원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뿐이었다. 민머리로 서빙을 하고 계신 웨이터라기 보단 ‘기도’에 가까운. 아무튼 그분께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넣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 뭔 말인지 알았다’는 미소로 돌아가더니, 에스프레소에 얼음을 넣어 미지근한 커피를 가져다준다. 지금사진 폭소를 터뜨린다. 민머리 그분은 어리둥절. 큰 유리잔에 얼음만 가득 넣어서 가져다 달라고 다시 부탁. 결국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DIY 하는 데 성공한다. 아, 어렵다 어려워.
이제 부다페스트를 떠나 자그레브로 가야 한다. 거의 직선으로 300km를 가야 하는 구간이라 지마음과 교대로 운전을 하기로 했었다. ‘감기’라는 변수가 생겼다. 감기약을 먹은 환자(?)와 맥주를 마신 음주자(?)에게 운전을 맡길 수는 없지. 도로는 한적하고 달리는 데 거침이 없다. 다만 공사구간이 있어서 1차선을 막아 둔 채이다. 공사를 하고 있냐고? 글쎄... 공사하겠다고 차단봉은 잘 세워 두었지만 공사차량이나 공사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벌써 퇴근을 한 것인가. 어제에 이어 오늘도 어떻게 살아가는 사회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야 하는 건지. 왜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건지.
자그레브에 도착해서는 감기기운이 있는 지마음을 위해 지금사진이 요리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수제비를 만들어서 따뜻한 국물을 먹기로 했다. 부다페스트 시장에서 사 온 야채를 듬뿍 넣고 다시마와 멸치로 국물을 낸 지금사진의 특제수제비는 환상적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지마음은 숙소에 두고 둘이서만 시내구경을 갔다. 자그레브는 공사 중이었다. 성당도 공사 중이고 야경풍경은 부다페스트의 그것에 비하면 실망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반대편 성당으로 가는 계단길은 ‘남산길’과 같다. 힘들게 올라가서 볼 수 있는 풍경은 보수공사 중인 건물들 뿐이다. 지마음을 두고 온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진 몇 컷만 찍고 숙소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