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일기 - 3
서머타임임에도 불구하고 5시만 되면 벌써 밖이 환하다.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부다페스트를 둘러보기로 했다. 지마음이 2시간짜리 오전 보도투어를 신청해 두었다. 아침에 홍여사에게 오늘은 오전 도보투어를 하려고 한다고 톡을 보냈다.
“혼자 가는겨? 다른 사람들은 아직 자고 있는겨?”
“아니, 같이 갈 건데”
“그래, 그럼 아주 안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아니네.”
내가 뭐라고 했길래, 홍여사는 지금사진과 지마음이 아주 안 걷는 사람들이라고 알고 있을까? 희한하네.
아침산책도 할 겸 가까운 지하철역에 가서 24시간 그룹티켓을 사러 갔다. 일요일 새벽의 도시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비둘기들만이 푸덕거리며 뛰어다닌다. 아니 근데 이놈의 비둘기들은 왜 날지 않고 뛰어다니는 건지. 주변에 비둘기 똥이 그득하다.
5000 HUF, 우리 돈으로 2만 원 정도, 1인 2500 HUF, 3인~5인 그룹권 5000 HUF. 당연히 그룹권이 경제적이다. 아침으로는 어제 브라티슬라바에서 사 온 과일과 홍차 한잔. 한국에서 가져온 바삭한 누룽지도 몇 조각 오독오옥 씹어먹었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확실히 과자 같은 거보다 누룽지 조각이 더 맛있다.
너무 부지런하게 서둘렀을까. 일요일이라서 도로가 한산해서였을까. 약속장소에 너무 일찍 도착했다. 40여분을 빈둥거리며 광장 주변을 돌아보면서 귀동냥을 하고 있다. 소규모 그룹투어로 온 사람들이 7명의 기마동상 앞에서 뭔가를 설명하고 있길래, 원래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그냥 들리는 걸 어쩌라구
“...동상의 보수공사를 하고 새로 단장을 하면서, 엉덩이의 빈 공간에서 제작 당시로 추정되는 오래된 신문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보수가 끝나면서 이것도 전통이니 요즘 신문으로 다시 그곳에 넣었다는...”
“... 7개의 기마상은 마자르 일곱 개의 부족을 상징하는데, 중앙에 있는 동상이 헝가리를 건국했다고 하는 아무개의 동상이고... 철퇴를 들고 있는 기마상은 돌격대 역할을 했던 부족이라...”
뭐 이런 이야기들이 띄엄띄엄 들린다.
이윽고 우리 가이드 도착. 영웅광장(회쇠크광장)에 있는 동상들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1대 국왕인 이스트반이 들고 있는 십자가, 겨우 반층지하에 건설된 장난감 같은 지하철 1호선, 농업부 관청건물로 지어진 드라큐라성, 안익태 선생의 동상 그리고 헝가리의 역사와 부다페스트에서의 개인일상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장난감 같은 1호선 노란색열차를 타고 내린 곳은 대관람차가 있는 지하철역. 이스트반 대성당이 가까운 곳이다. 성당에 대한 설명과 성당 앞에서 두나강까지 길게 이어진 보행자 공간이 인상적이다. 아무래도 점심을 먹으러 다시 이곳으로 와야 할 것 같다.
보행자 길을 따라 내려온 강가에서 버스를 타고 대통령궁과 부다궁으로 간다. 부다궁 주변은 2차 대전 때 피해를 본 지역이라 비교적 최근까지도 폐허처럼 남아있는 곳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은 예전 기록을 토대로 복원 중이라고 한다. 소련연방의 위협에서 벗어나면서 사회민주주의의 길을 모범적으로 걷고 있다고 했다. 지금의 총리가 오랫동안 총리노릇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인기가 많고 민주적으로 헝가리를 잘 이끌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다시 산책길을 따라 어부의 요새로. 실제 요새로 사용되었던 적은 없지만, 이곳에서 어부들이 중심이 되어 부다를 방어한 것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라고 한다. 현지 가이드에게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정보는 역시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식당과 핫플레이스에 대한 것이 아닐까.
헤어지고 난 후, 알려준 식당 중 하나인 곳에 가서 맛살라치킨과 난으로 점심식사. 과연 깨끗하고 친절한 곳이었다. 맛도 그 정도면 훌륭하다.
원래 가보려고 했던 중앙시장은 역시 일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는다. 일요일에 열어야 가장 손님이 많을 법한데,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보다. 확실히 돈보다는 삶의 밸런스를 더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시간이 남았다. 원래 3 보이상은 차량탑승을 원칙으로 삼던 지마음과 지금사진, 그리고 오전에 너무 빨리 걸어 다닌 탓에 피곤해진 지노그림. 무언의 눈빛으로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는 의견교환을 하자마자 재빨리 다시 숙소로 돌아와서 낮잠을 한숨씩 자기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사선으로 지어진 건물에 옥상은 정원으로 만든 특이한 건축물을 발견했다. 언제 우리가 다시 또 이곳에 오겠는가. 이건 좀 보고 가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나서도 지마음은 컨디션이 좋아지지 않은 것 같다. 아프지 말아야 여행이 즐거운 법인데 마음이 좀 ‘거시기’하다.
저녁은 가이드가 알려준 식당 한번 더 가보기로 했다. 한국의 김밥천국 같은 곳이라서 했는데, 정작 가보니 그렇지 않다. 내부에서 피아노도 연주해 주는 아주 아담하고 근사한 곳이었다. 예약을 하지 않고 와서(누가 김밥천국 가면서 예약을 하는가 말이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잠깐 들러본 내부와 종업원들의 태도만으로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곳이었다.
결국에 다른 곳에 가서 드디어 ‘굴라쉬’를 먹었다. 가는 길에 점심때 들렸던 카레식당을 지나가는데, 종업원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한다. 확실히 유럽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친밀도를 높이는 방법이 체화되어 있다느 느낌이다. 과하지 않은 친절과 유쾌한 태도. 손님과 나는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는 자존감이 느껴진다.
따뜻한 굴라쉬를 먹고 나니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맥주까지 한잔 걸친 지금사진은 세상을 얻은 표정이고, 지마음도 어디 가서 맥주 한잔하고 싶을 정도로 조금 나아진 듯하다.
가이드가 알려준 핫플레이스에 가서 맥주 한잔 더 하기로 했다. 내일 점심을 먹을 곳이 근처라서 간 김에 아예 예약도 해두었다. 건물과 건물을 이어서 마치 터널과 같은 구조로 만든 곳에 온갖 식당들과 바들이 가득 들어찬 활기찬 곳이다. 일단 끝에서 끝까지 구경한 다음 자리를 잡았다. 맥주를 골고루 시켜보긴 했는데, 맛이 인상적이다. 탄 맛 같기도 하고
갑자기 왁자지껄해진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할매 할배들이 부부젤라까지 불어대고 있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니 우승축하파티를 하고 있단다. 부다페스트에서 챔피언 결정전이 있었고 자기네 팀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우승을 해서 행복하단다. 응원하는 핸드볼팀을 위해 노르웨이에서부터 이곳까지 원정응원을 오는 열정이라니. 노년의 노르웨이 생활은 심심한 일의 연속이라서 이런 이벤트가 생기면 만사 제쳐두고 달려오는 것일까.
조금 있더니 서포터들이 모여 있는 이곳으로 선수들이 찾아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달아오른다. 어울려 먹고 마시며 즐기는 그들이야말로 부다페스트를 잠 못 들게 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